창덕궁의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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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7.1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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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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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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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의 신 만나다

DUMMY

머리에 뿔이 있고 온 몸으로 덮인 비늘을 잘 표현해 놓은 것이, 기린 인 것 같았다.

소의 꼬리에 말의 다리를 가진 이 야릇한 모양의 짐승은,

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힘을 가진 전설의 동물이라고 했다.


'투둑 투둑-' 굵은 빗줄기가 떨어질 때마다,

석상 위를 덮고 있던 잎줄기도 툭툭 쥐어 박히며 아래로 내리 뻗었고,

그 사이로 석상의 얼굴 모양이 간간히 드러나 보였다.


"형님 ..."


" ... 네, 전하!"


"갑자기 들어 온 궁궐이지만,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그들을 살피는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쉽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요."


"네. 전하!"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던 백 선이 입을 다물었다.


"이 나라 백성으로 살다가, 원치 않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그들을 다 살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도운다고 해봤자 얼마나 많은 이들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냥 ...

나랏일은 모르겠고, 사람 목숨 하나라도 더 살리고자 한 일이었는데,

이 자리에 잠시라도 있어보니, 알 듯도 해 졌습니다."


여전히 백 선은 그의 주군의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힘이 없고 어리석은 만큼, 백성들도 힘이 들어지는 것입니다!"


"전하..."


"네,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서 제가 먼저 힘을 길러야겠습니다. 헌데...!


"...?"


"그 길만 가기에는 지금 다급한 백성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죽기 직전의 백성은 바로 살리고, 조금 더 시간이 있는 백성은 앞으로 더 나아 질 수 있도록,

제왕의 길도 부지런히 닦으려 합니다!"


"너무 위험한 길인 것 같습니다. 전하!"


"표독한 관리들 눈을 피해서 깊은 산중으로 피신을 시켜놓은 백성들이 꽤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화전을 일구고 살기위한 준비는 해 주어야 하는데,

한동안 계획대로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사부님에게 돈이 조금 있어서, 그걸로 당장 필요한 몇 가지는 마련을 해 주었지만,

많은 수로 준비하기에는 부족하지요.

그런 그들에게 이제 점점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겨울을 날 준비는 도와주어야 합니다!"


"표독한 관리들이라면, 아마도 사라진 백성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전하!"


"하지만 아무리 패악한 놈들이어도,

요즘 것들은, 제 눈을 벗어난 것까지는 귀찮아 서라도 신경을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심경이 언제 뒤틀릴지는 모를 일이지만, 조금 이라도 기회가 될 때 백성들을 살려 두어야 겠습니다."


말을 하는 내내, 수풀에 덮여있던 석상에 눈길을 두고 있던 원범이었다.

어느 순간, 굵은 빗방울이 석상위의 잎사귀를 크게 흔들어 놓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원범이 천천히 석상으로 다가갔다.


곁에서 우산을 높이든 백 선도 그의 발길을 따라 움직였다.


"석상의 머리를 원래 이렇게 삐뚤게 만들었을 까요?"


기린의 몸통에 붙은 머리가 조금 틀어진 채 붙어 있었다.


"아, 목과 몸통사이에 선이 있어요. 이게 ... 이렇게 ... 머리가 돌아가는 것인가?"


원범이 기린의 머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오른쪽 방향으로 돌려 보았다.


'끼기긱-'




****



"상추 어른 오셨습니까!"


간만에 완위각에 들른 노 상추가 땅이라도 꺼질까 몸이라도 깨질까,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디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상추 어른,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하십니까?"


"아니, 아니야! 전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어. 갑자기 비를 좀 맞아서 그래."


"그래도.. 걸음이 편치가 않아..."


"괜찮다니까. 그건 두고, 문규야. 저 번에 얘기하던 ... 그 어딘가 걸리기만 하면, 알아서 당겨준다던 밧줄 말이야...

그건 안 만드느냐?"


"아 네 어른, 그건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해서 안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아니, 왜?"


"어차피 상추 어른이나 매화께서는 경공술의 '초상비' 단계 까지는 수련이 되신 걸로 아는데,

그러면 밧줄보다 더 가볍게 몸을 내달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굳이 필요하지도 않을 듯해서요."


사람들이 모이는 저자거리에서는 원범을 이제 '매화'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몇몇 호칭 중에서 가장 당긴다며, 원범이 선택한 단어였다.


"문규야, '청출어람(靑出於藍)' 이라는 말 알지?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뿐이다.

내가 글로 배운 걸, 매화께서 해내신 것뿐이야!

난 그거 안 된다. 그러니, 그것도 차차 만들었으면 좋겠구나!"


"아...그게."


"대답이 왜 그래?"


"이제, 위험한일에 쓰일 물건은 만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상추어른. "


"어? 왜?"


"이제 매화께서도 제자리로 돌아가셨고, 상추 어른도 위험한 일에 계속 나서시는 일은 없어야 하여서요.

이때가 되면 완위각 에서는,

전하께서 내탕금으로도 쓸 수 없는 일에 사용할 돈을 준비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고, 사부님께서 제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답답하기는! 내 말이 그 말 이지만, 매화께서 이 일을 멈추실 생각이..."



"책,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장!"


그들 사이로 다가온 사내가 서책 두 권을 문규 앞으로 내어 밀었다.


언뜻 보아도 사내의 의복은 계절에 맞지 않게 초췌해 보였다.

참으로 낡아 보이는 민 항라 도포자락에, 회갈색 빛 세조대가 오랜 세월을 버틴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쳐져 있었다.


원래가 검은 빛 이였을 잿빛 갓이 피곤한 모양새로 머리위에 얹혀 있었지만,

곁 눈길로 보이는 젊은이의 안색은, 피곤해보이지도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맑고 청아하기까지 했다.


"네, 선비님. 오늘 필사는 다 마치셨습니까?"


"그러합니다. 주인장 덕에 오늘도 좋은 책을 구경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양까지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 말씀을요 선비님. 선비님이 부지런하셔서 구하신 책이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밖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계시다가, 비라도 그치고 나서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머무는 곳이 그렇게 멀지 않으니, 많이 젖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가 와서 오늘 필사한 책을 가지고 가지는 못할 것 같으니, 이곳에 좀 맡기고 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오실 때 까지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정말 아량이 깊으신 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장."


"아닙니다 선비님. 그럼 살펴 가십시오!"


젊은 선비가 사라지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던 문규의 얼굴에, 간만에 밝은 미소가 깃든 것 같았다.


"자주 들리는 분이시냐? 한성부 사람이 아닌 듯하구나."


그가 남긴 책을 건성건성 넘겨보던 상추가 재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경상도 에서 올라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곳까지 무슨 일인고? 아직 과거도 멀었는데?"


"지방에서 구하지 못하는 서책을 찾아보기위해, 한양까지 와서 머문다는 것만 아는데 ...

한 눈에 봐도 서책을 다 사서 보기엔 힘에 부칠 듯해서, 필요한 서책이 있다면 필사를 해서 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마음에 들었구나. 네 놈이 웃는 걸 보니."


"마음이 진실 되고 한결 같으신 분 같습니다. 벌써 여러 권의 서책을 필사해 내셨습니다."


책 표지를 덮으며 상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비결(神器祕訣)' 이군. 선비인 자가 화기 규범서 같은 잡기를 필사한다고?"


"필사하는 서책들이 대부분 조총과 염초(焰硝)에 대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오 호, 그 참 호감이 가는 사람이구만!

헌데, 객이어서 그런가.

기운은 있어 보이는데 힘은 없어 보이는 것이, 밥은 잘 먹고 다니나 모르겠군."


"네, 하지만 저 선비가 필요한 것만 도움이 되어야, 마음 편히 이 곳에 들르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나저나 지난 번 부탁했던 여인네 장도는 준비가 되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굴 위해서 ...?"


"딸내미에게 줄 거야!"


"딸내미요?. 상추 어른, 전하를 보필하기도 바쁘셨을 텐데, 언제 그런 일까지 ... ?"


"예끼 놈! 그런 거 아니다. 수양딸이다."


"아 네. 따님이 사용할 것이어서, 이렇게 각별한 신경을 쓰셨던 것이었군요. 여기 있습니다 상추 어른."


문규가 내미는 여인용 장도는 칼집이 따로 없는 짧고 도톰한 크기에,

몇 가지의 날이 켜켜로 채워져 있었다.



****



"형님, 영평군의 사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떨떠름한 표정의 김 수근이 김 좌근의 앞에서 볼멘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 많이 반기는 눈치더냐?"


"웬걸요! 강화에 있을 때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지 부모가 근방의 혼자 사는 양반네에게 수양딸로 보내 버린 지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고 합니다."


"뭣이라? 그게 누군데!"


"지금 영평군의 집안 끝자락에 있는 별채에 머무는 객인데,

강화 섬에서의 친분과 신세 진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분간 영평군의 사가에서 지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제 배 채우겠다고, 자식새끼를 혼자 사는 놈 팽이한테 줘 버렸다고?

쌀 몇 섬에 팔아먹은 거겠지. 하여튼 잡스럽기는, 쯧쯧...!"


"그나저나 그럼, 중전 감을 빨리 물색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안 그래도, 이전부터 생각을 해두었던 아이가 있기는 하다만,

조정을 우리 가문으로 완전히 깔아버리는 것 같아,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아이고 형님, 이제 그런 때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능구렁이 같던 효명 세자도 사라졌고, 까칠한 환 이도 이제 세상에 없어진지가 오래인데,

뭐가 신경이 쓰여서, 주변을 의식까지 하여야 한답니까! 형님두 참내."


"이럴 때 일수록 머리를 낮추어야, 모든 일에 막힘이 없는 법이야!

저 답답해 빠진 성균관 유생들이 어떤 녀석들이냐!"


"허기야, 좀 그렇기는 하네요. 하지만 중전감이 중전감 답다면야, 그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에 꼽아놓은 아이라도 있으십니까?"


"자네 아우 김 문근의 딸 김 진이네."


"아 하! 그렇습니다 형님.

제가 왜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까요!

헌데... 워낙에 반듯한 아이 인지라, 제 아비도 조심스러워 살갑게 대하기가 꺼려진다고 하던데,

그렇게 반듯한 아이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 우리에게 내명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명부에서 품어주는 아이가 필요한 것이지."


"네? 아, 네..."


김 수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나저나 형님, 왜인들이 얼마 전 보내 온 조총의 대금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가고시마쪽에 금은괴를 넉넉하게 보냈는데,

그새 또 돈을 달라고 떼를 쓴다고?"


"우진이가, 가고시마 병영쪽으로 조총을 몇 자루 더 들였다고 합니다."


"뭐야? 새로 들이는 게 있으면, 반드시 내게 먼저 연락을 하라고 했거늘!

어째 내 주변에는 전부 도둑놈 같은 것들 뿐인 게야. 좀 기다리라고 해라!"


"네 형님. 그러니까요...

아무리 반이 왜인이라고는 하지만,

차라리 이제, 가고시마에서 훈련 중인 우리 무사들을 조선으로 데리고 와서 훈련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왜의 땅에 있는 이들을 관리하기에는 비용도 많이 들고, 훈련 상황도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아직은 이르다.

더구나 얼마 전 옥호정에서 놓친 녀석들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판에,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어."


"그 복면의 녀석 중 무공이 뛰어난 한 놈의 무예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기술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녀석 같은데, 궁에 소속된 녀석은 아닌 듯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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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32 베르겐
    작성일
    23.09.07 16:44
    No. 1

    드라마처럼 재밌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9.07 17:44
    No. 2

    ㅎ... 베르겐님~
    항상, 극찬에 감사합니당~~
    5시 연재시간 지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바람이 굉장히 좋아요.
    베르겐님 에게도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하윌라
    작성일
    23.12.18 12:54
    No. 3

    기린 석상에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있을 것 같네요.
    여기저기 심어두신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
    경상도에서 올라오신 선비도, 또한 숨겨두신 보물같구요.

    그리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그래선 안됩니다만,,,
    이걸 읽으면서... 계속 김씨가 싫어지네요
    ㅍㅎㅎ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12.18 17:22
    No. 4

    난 윌라님 댓글 읽는게 훨 재밌어요.
    김 씨분들이 만약 댓글 보면, 어쩌시려고...ㅋㅋ
    소소한 글에 생기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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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사야가의 후손 +2 23.08.14 134 6 13쪽
28 미련둥이 호위무사 +4 23.08.13 136 6 11쪽
27 백성이 훔치다 +4 23.08.12 150 5 11쪽
26 검무 추는 흥선군 +4 23.08.11 136 6 12쪽
25 기억속의 여인 +4 23.08.09 137 6 12쪽
24 절실한 거래 +4 23.08.08 138 5 14쪽
23 무사 흥선군 +4 23.08.07 159 6 13쪽
22 대왕의 비밀통로 +4 23.08.06 148 6 12쪽
» 총의 신 만나다 +4 23.08.05 163 6 12쪽
20 원래, 있었던 것 +4 23.08.04 159 6 11쪽
19 분명. 그다! +4 23.08.03 152 6 13쪽
18 복면의 검객 +4 23.08.02 152 6 12쪽
17 음모 +4 23.08.01 156 6 12쪽
16 조선의 실세 +8 23.07.31 181 9 13쪽
15 시작된 의심 +6 23.07.30 204 9 14쪽
14 흔적 +6 23.07.29 226 10 13쪽
13 난(蘭)쟁이 흥선군 +6 23.07.28 227 10 13쪽
12 물색 +6 23.07.27 261 12 14쪽
11 신료들의 나라 +6 23.07.26 291 11 13쪽
10 사인검의 주인 +6 23.07.25 308 8 13쪽
9 강화도령 +7 23.07.24 323 9 14쪽
8 상감마마 행차시다. +6 23.07.23 351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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