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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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해품글
작품등록일 :
2023.07.16 15:33
최근연재일 :
2023.1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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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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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백성이 훔치다

DUMMY

원범이 가슴 안에서 하얀 띠 수건을 꺼내어 금고 안으로 넣고 있었다.


의아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백 선이 원범을 바라보았다.


이내 금고 문을 다시 닫아 건 후,

추사의 글씨가 써진 족자도 멋스럽게 걸고 난 원범이, 기분 좋은 웃음을 띠었다.


"백성들의 흰 머리 수건 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이 이렇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원범과 백 선이 지붕을 다시 오르고 집 밖으로 나설 때 까지,

사랑채의 넓은 마당 앞에서는 흥성군의 흥에 겨운 검무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모양 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길목으로 접어들었지만,

뒤에서 들리는 양반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한참동안이나 들려오고 있었다.


"완위각에서 비밀 통로로 들어가기 전에, 물건들을 옆에 두고 가면 된다.

그러면 문규가 청나라 상인이나 왜인들에게 팔아서, 며칠 후에 상평통보로 바꾸어 놓을 것이야."


"네, 완위각은 외국 상인들과 바로 직거래를 하는 곳이니,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사부님."


"소위, 엽전 세탁이라는 것이다.

훔친 물건일 때는 이 과정이 꽤 많이 중요하지! "


나란히 걷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꽤나 닮아 가는 것 같았다


"다시 봤네. 무사 양반!"


하지만 백 선은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백 선에게 노상추는, 주군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나쁜 이웃으로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



"왕궁의 지붕은 참 넓습니다.

높은 곳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저 아래에 있는 백성들에게도 한번 보여주고 싶습니다."


보름달이 차갑게 떠오른 밤이었다.


궁궐의 지붕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원범이

한 결 같이 그를 떠나지 않는 백 선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사인검을 보면, 정말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리고 이 검이... 백성을 살릴 것이라고 하였다죠.

백성을 다 살리고 난 후엔, 여전히 나를 지키는 사인검으로 함께 늙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말이지요."


"네, 전하 그리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이 검을 볼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어째서 정조 대왕께서는, 칼날 안에 사인검의 특징인 동서남북 사방을 의미하는 이십팔수의 별자리 문양을 넣지 않고,

산수의 윤곽을 조각하였을까요?"


"정조대왕께서는 세상의 중심을 조선으로 여기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 일부러 나타낸 이 지도에,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인가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죠."


"네. 전하..."


"사실, 어쩌면... 혹시나, 하고 드는 생각이 있는데. 모르겠습니다.

이게 지도가 맞기나 한 모양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


"...?"


밤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 지고 있었다.

달빛아래 빛나는 원범의 볼 빛이 발갛게 식어가고, 주군을 바라보는 백 선의 표정에 조바심이 비치고 있었다.


"전하, 근간에 금고를 털린 대신들이 지금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하얀 머릿수건을 넣어 둔 탓에,

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백성들이 만든 음흉한 집단의 움직임 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조심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나선 일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두려움이라도 심어 줄 수 있어, 저는 통쾌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매일 밤마다 그들이 피해를 본 터라,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당분간만이라도 옥체를 보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렇게 하지요."


백 선의 눈빛은 언제나 깊고 평온했다.

그가 아는 어떤 이야기라도 들려주고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지난 번 옥호정 에서 김 좌근 무리의 이야기를 들은 게 있습니다."


"...네? 어떤..."


"영종 대왕께서 왕권을 다지기 위해, 많은 양의 금궤를 비밀리에 전국으로 나누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 장소를 알게 되기만 한다면, 지금 어려운 백성들에게 많은 힘이 될 수 있을 텐데.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판 무리들이 찾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곳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네, 전하. 저들의 동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금궤가 있는 위치는 어람용 의궤의 어느 한부분이고,

그 의궤를 표시해 둔 곳이, 편전의 용좌에서 보이는 단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단청 위를 몇 번이나 들여다봐도, 그런 흔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영종 대왕께서 정조 대왕에게 말씀을 전하셨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신 정조 대왕께서, 당시 나이어린 순조 대왕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 비밀을 함부로 전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전하."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정조 대왕처럼 신중한 분이시라면, 김 조순 대감을 믿고 말씀을 전하셨다고는 하지만,

분명 그전에 그들이 통과해야 할 단계가 있었을 것 같아요.

아마도 풀어야 할 열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참, 며칠 후 강무가 열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병조에서 이미 사냥할 곳의 경계를 표하기 위해, 철원으로 군사를 집합시켜 나섰다고 합니다.

하오나 전하... 명중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렇겠지요? 그러면 덜 바보 스러워서 위험하겠지요?"


그의 말소리는 조용하다 못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



멋스럽게 깃을 꽂은 주황색 초립에 붉은 색의 옷을 입은 가동들이, 오피화(烏皮靴)를 신고 악공들 사이에서 흥을 보태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햇살은 낮은 풀밭사이로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왕가의 먼 친척들과 대소신료들이, 사냥터의 한쪽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거나 둘러 서 있었다.

그들은 한양에서 함께 따라나선 몇몇의 식솔들과 함께, 뿌듯한 표정으로 사냥의 시작을 구경하고 있었다.


원범은 왕가의 먼 친척이라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그에게는, 반가움이라거나 설레임 따위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


명경 대비는 찬바람에 무릎이 시려 온다는 탓에, 궁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은 흥이 전혀 오르지 않은 표정으로, 원범이 주변을 둘려보고 있을 때였다.


그 여인이 또 다시 눈에 띄었다.

뜻하지도 않은 반가운 마음이, 이번에는 그에게도 차오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는 영돈녕부사 김 문근의 옆 자리를 다소곳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운명처럼 끌리듯이 그녀 또한 그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린 원범은 의외였다.

여인이 무색 할 만큼 냉정하게, 얼른 눈길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하지만 여인도 그의 눈길에 별다른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맑고 고요한 표정 속에 잔잔한 미소만 담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북소리와 함께 사냥이 시작되었다.

말을 탄 원범의 주변으로 종친들과 젊은 장수와 군사들도 말을 몰고 모여들었다.


기병들의 세 번째 몰이가 이어질 때였다.


'슈웅-'


활 소리가 낮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모여든 사람들이 일제히 활이 시작된 곳을 돌아보았다.


김 좌근의 활시위가 멈추는 순간,

낮은 하늘께 에서 비틀거리던 장끼 한마리가 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졌다.


"불충 입니다!"


사냥터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무서운 긴장감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짐승의 몰이 후엔, 응당 임금님께서 활시위를 먼저 당겨야 하는 법입니다!"


서슬 퍼런 외침이었다.

하지만 소리는 , 사람들의 틈 사이 이제 열 살쯤 남짓해 보이는 아이에게서 나온 것 같았다.


"하전아. 쉿!"


종친들과 함께 구경나온 이 하전을 향해,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길이 쏟아지고 있었다.


김 좌근이 그를 쳐다보는 사이,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침묵을 깬 건 원 범이었다.


"어른보다도 기개가 큰 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보니, 이야기가 미리 전해 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 이판에게 전교를 보내었답니다.

과인이 요 며칠간 미령하여 활을 잡기가 불편하니, 여러 대신들의 우러름을 받는 이판이 첫발을 쏘아달라고 하였지요."


백 선과의 이야기 끝에 찾은 해답이었다.


그가 쏜 활이 명중한다면, 김씨 가문의 견제를 받을 것이고

명중하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신망을 잃을 것이었다.

동시에 아무리 세도가의 이판이어도, 임금의 명 아래 움직이는 한낱 신하일 뿐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이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사냥감을 쏘아 떨어뜨렸으나, 멧돼지도 사슴도 아닌 그냥 작은 장끼 한 마리였다.

그렇게 김 좌근은 사냥술이 대단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저 그런 정도의 힘을 가진 늙은 신하일 뿐이었다.


껄끄러운 순간이 지나고, 다시 이어진 기병들의 몰이에 맞추어 사냥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임금을 위하여 마련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소일을 하던 원범이,

쭈뼛거리며 일어나 숲 사이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백 선과 몇몇 궁인들이 조금의 간격을 두고 따라 나섰다.


"좀이 쑤십니다. 좀 걷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전하."


천천히 옮기던 걸음은 어느새 숲 사이로 제법 깊이 들어 선 것 같았다.


"전하, 숲이 깊어집니다. 이제 그만 걸음을 돌리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호위 별장..."


그 때였다.


자리에 문득 선 백 선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다급한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하, 잠시..."


백 선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검을 스치고 있었다.

그의 긴장한 모습을 느낀 원범도 자리에 서서 그들을 향한 어두운 기운을 찾기 시작했다.


부스스 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이윽고 백 선의 손이 검을 다잡았다.


하지만 잠시 후, 수풀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 건 흥선군 이었다.


'그대로 있으시오!'


분명 백 선의 곁을 스치며 그에게 내 뱉는 단호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원범을 향했다.


"전하. 이 토끼...!"


" ... "


이윽고 흥선군이 원범에게 다급하게 내밀 던 새하얀 토끼의 통통한 뱃살 속으로,

순식간에 날아 든 화살 하나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꽂혀 들었다.






* 강무 - 조선 시대에 국왕의 친림 아래 거행된 군사 훈련을 겸한 수렵대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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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32 베르겐
    작성일
    23.08.12 20:07
    No. 1

    잘 읽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8.13 01:13
    No. 2

    ..ㅎㅎ..감사합니다 베르겐님~
    꾸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하윌라
    작성일
    23.12.25 22:02
    No. 3

    아주 몰입감이 뛰어납니다.
    와아... 오늘 피곤해서(사실 며칠 피곤했음요) 글판 꺼내서 좀 적고 자야지 했다가
    들어왔는데, 눈이 번쩍 뜨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12.25 23:47
    No. 4

    윌라님~~
    오늘 재미있는 하루 잘 보내셨나요.
    날씨가 다행히 좋았어요.
    이렇게 바쁜날에도, 창의를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우리의 하윌라님께서 좋다 하시니,
    저 잘하고 있는거 맞겠쭁~~ㅋ
    열심히 하겠씀미당~~!!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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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미련둥이 호위무사 +4 23.08.13 137 6 11쪽
» 백성이 훔치다 +4 23.08.12 151 5 11쪽
26 검무 추는 흥선군 +4 23.08.11 136 6 12쪽
25 기억속의 여인 +4 23.08.09 137 6 12쪽
24 절실한 거래 +4 23.08.08 138 5 14쪽
23 무사 흥선군 +4 23.08.07 159 6 13쪽
22 대왕의 비밀통로 +4 23.08.06 148 6 12쪽
21 총의 신 만나다 +4 23.08.05 163 6 12쪽
20 원래, 있었던 것 +4 23.08.04 159 6 11쪽
19 분명. 그다! +4 23.08.03 152 6 13쪽
18 복면의 검객 +4 23.08.02 152 6 12쪽
17 음모 +4 23.08.01 156 6 12쪽
16 조선의 실세 +8 23.07.31 181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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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흔적 +6 23.07.29 226 10 13쪽
13 난(蘭)쟁이 흥선군 +6 23.07.28 227 10 13쪽
12 물색 +6 23.07.27 261 12 14쪽
11 신료들의 나라 +6 23.07.26 292 11 13쪽
10 사인검의 주인 +6 23.07.25 308 8 13쪽
9 강화도령 +7 23.07.24 323 9 14쪽
8 상감마마 행차시다. +6 23.07.23 351 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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