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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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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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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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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DUMMY

아직 이른 시간대여서 그런지 오르포스 역에는 사람이 적었다. 정차와 동시에 잠에서 깬 율리아는 정차하는 동안 베일린과 함께 먹을 걸 사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쓰러져 잠든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헬리온은 생각에 잠겼다.


‘대충 보니까, 오는 길목이랑 역 안에 사람을 다 배치해둔 것 같던데. 만약 저번과 똑같이 균열이 터진다면 충분히 대응은 가능하겠어.’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둔 기분이었다. 작게 한숨을 쉰 헬리온은 자세를 바꾸어 먼 곳을 내다보았다. 로타님 부근의 하늘은 아직 맑았다.


‘로타님에 균열이 발생하면···, 그때는 나도 전력을 다해야지. 여기서 백작이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무심코 손에 힘을 주었다. 직접 본 균열은 생각보다 훨씬 무시무시했고, 처참했으며, 잔혹했다. 헬리온이 이 초고 속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흘러넘치는 피, 뜯긴 살점, 지독한 탄내······.

역시 공격 마법은 내키지 않는다. 헬리온은 또다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공격 마법은 쓰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적어도 달리안이 있으면 내가 공격 마법을 쓸 일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율리아와 베일린이 돌아왔다. 가벼운 간식을 한 아름 들고 돌아온 두 사람은 자리에 앉으며 헬리온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자, 헬리. 하나 먹어.”

“어, 고맙다.”

“그러고 보니까 밖에 무장하신 분들이 꽤 있더라고요···.”

“아, 맞아. 나도 봤어. 이 근처 방위대 아니야? 뭐 일이 있나 보지.”


베일린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위대가 균열만 관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그녀처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일지도 모른다. 기차는 다시 출발하려는 듯 길게 경적을 울렸다.


“으음···.”

“오, 레오 일어났다. 먹을래?”

“응···? 아, 뭔가 먹을 거 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니, 사 왔구나.”

“응. 40크로네 줘.”

“뭐? 잠깐만, 내가 돈을 가져왔던가?”


10크로네가 1200원 정도였으니, 대충 5천원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잠도 덜 깬 채 허둥지둥하는 레온하르트를 보며 베일린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됐어, 됐어. 장난친 거야. 내가 사 주는 거니까 감사히 먹도록.”

“아이고, 레이디 베일린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이 미천한 놈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 그거 기만인 건 알지?”


이런 사소한 대화에서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화기애애한 네 명과 잠든 두 명을 실은 기차는 천천히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로타님 역에 도착하자 공기가 서늘해진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낮은 온도에 헬리온의 근육이 긴장했다.


“여기까지만 와도 살 것 같다···. 수도랑은 공기부터가 달라.”

“베이 더운 거 진짜 못 견디네.”

“그래서 벨라토르 놔두고 수도 저택에 주로 있잖아.”


달리안은 언제 잠들었냐는 듯 말끔한 얼굴로 제 짐을 들고 있었다. 피에 물들지 않은 연녹색 드레스를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달리안은 그런 헬리온의 시선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강하게 쏘아붙였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기분 나빠.”

“그런 눈이 뭔데···.”

“죽어가는 야생 동물을 구해 놓고 무사해서 다행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난 죽어가지도 않고 야생 동물도 아니거든?”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다.”


실없는 소리를 몇 마디 주고받자, 저 멀리서 익숙한 모양의 마차 두 대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태양이 새겨진 수레바퀴가 정중앙에 박힌 문장은 딜라드 가문의 상징이었다.

천천히 마차가 멈추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을 끝으로 얼굴을 보지 못한 메이드 소피였다.


“어머, 도련님! 여기예요, 여기!”


사람들이 몰려 있는 탓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마차는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소피는 한눈에 헬리온을 알아보고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인파를 뚫고 마차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소피는 헐레벌떡 그들에게 달려와 인사했다.


“딜라드 가에서 헬리온 도련님을 소피라고 합니다. 혹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그리 인사하며 소피는 아이들의 짐을 마차에 실으라는 듯 손짓했다. 지난겨울 집안을 오가며 스쳐 지나갔던 것 같은 메이드들이 그들의 짐을 하나씩 마차에 실었다. 소피가 헬리온의 가방을 받으려 하자, 헬리온은 손을 내밀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했다.


“라피가 이 안에 있어서요. 제가 들고 타겠습니다.”

“아, 고양이도 데리고 오셨군요! 알겠어요, 우선 다들 마차에 타실까요?”


*


마차가 두 대인 이유를 헬리온은 겨우 이해했다. 어차피 짐을 실어야 하고, 사람도 여섯 명이나 있으니 짐과 메이드들은 다른 마차에 타는 것이 쾌적할 테다. 아직 신분제가 존재한다는 걸 알기 쉽게 드러내는 것 같아 찝찝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쪽에서는 아직 이런 시스템이 당연하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기득권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대접받는 걸 싫어할 리는 없다. 30년을 대한민국에서 아득바득 살아온 윤명진에게 주어진 신분이라는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나쁜 것도 없었다. 그래도 위화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헬리온이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동안, 레온하르트는 또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번 고개가 떨어지더니 제 움직임에 놀라 고개를 휙 드는 모습이 우스웠다.


“풉··· 어흠, 흠. 레오, 아직도 졸려? 그냥 자.”

“베일린, 그런다고 네가 웃은 게 감춰지진 않아···.”


베일린은 멋쩍게 웃었다. 멋쩍은 건 레온하르트도 마찬가지였는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니, 잠은 아까 많이 잤어. 근데 그동안 꿈자리가 사나워서 좀, 회복이 덜 됐다고 해야 하나.”

“무슨 꿈을 꿨길래? 아까 엄청 뒤척이긴 하더라.”

“베일린, 너 안 잤어?”

“자긴 잤는데 일찍 깨서. 그래서, 무슨 꿈이었길래? 유령이라도 나왔어?”


레온하르트는 드물게 망설이는 듯싶더니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


“유령은 무슨 유령, 그런 거 무서워할 나이도 아니고. 기차 사고 나는 꿈 꿔서 그래. 이런 현실적인 꿈이 유령보다 백 배는 더 무섭지.”

“우와, 기차 타고 있는데 기차 사고 나는 꿈은 좀 무섭긴 하네.”

“그렇지? 게다가 무슨, 마수까지 나와서. 꿈속에서는 진짜 심각했다니까.”


어느새 대화에 끼어든 프레이야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헬리온만은 웃으며 대화에 낄 수 없었다.


‘내가 능력을 쓰기 전에 있었던 일이랑 똑같은 내용이잖아.’


물론 단언할 수는 없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기에, 레온하르트가 태어나서 마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더라도 자료를 통해 보았다면 충분히 꿈에 나올 만한 소재였고, 기차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차를 타는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이 기차를 타면 이 또한 충분히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싹튼 의심의 씨앗은 점점 크게 자라났다. 만약 의식하지 못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거라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손에 땀이 배어났다.


“헬리,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멀미하는 거야?”

“어, 뭐? 아니.”

“하도 체력이 없으니까 마차 멀미라도 하는 줄 알았네. 내 드레스에 토하기만 해봐, 매일 오전 7시부터 훈련해 줄 테니까.”


현실적인 공포가 잡생각을 이겨냈다. 달리안에게 시달리는 건 학교 안에서 만으로 충분하다. 헛기침하며 표정을 정리한 헬리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달리안의 말을 받아쳤다.


“까먹은 것 같아서 말하는데, 너 일단은 지금 우리 집에 가고 있는 거다.”

“뭐 어때? 가문을 이을 도련님이 아침부터 힘내서 훈련한다는데 누가 막기야 하겠어? 오히려 흐뭇하게 바라보겠지.”

“······.”


확실히, 몸 상태가 최악이었던 지난겨울 이후 헬리온은 수도에서 생활하며 겨우 평균에 가까운 몸을 갖추었다. 그런 도련님이 아침 일찍부터 훈련한다고 하면 조금 걱정할지언정 막지는 않을 것이다. 헬리온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 상대하는 건 진짜 기운 빠지는 일이구나······.’






얼마나 더 갔을까. 슬슬 아이들끼리의 대화 소재도 떨어져 가던 찰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비교적 잘 정비된 도로의 양옆으로 높은 나무들이 즐비했다. 마차가 멈추고 아이들이 내리자 딜라드 저택의 정문이 눈앞에 있었다.

저택은 크기는 컸지만, 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게 무색할 정도로 꽤 큰 규모를 자랑했고, 고딕 양식이 일부 섞인 건물은 멋을 겸비했다.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저택의 뒤편으론 웅장한 레바나 산맥이 펼쳐졌다. 해자가 필요 없는 천연의 요새였다.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헬리온은 어쩐지 긴장이 되어 작게 심호흡했다. 서늘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뭐 해, 헬리? 들어가자.”

“아, 응.”


레온하르트의 부름에 헬리온은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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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균열 너머의 세계(1) 24.09.09 4 0 9쪽
38 38. 비밀 결사(4) 24.09.06 4 0 10쪽
37 37. 비밀 결사(3) 24.09.04 8 0 9쪽
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7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8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9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8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8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8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9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9 0 10쪽
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1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0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1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0 0 10쪽
»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2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3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0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1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5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3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7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19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7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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