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최근연재일 :
2024.09.09 18:0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646
추천수 :
1
글자수 :
182,644

작성
24.07.31 18:00
조회
13
추천
0
글자
10쪽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DUMMY

머릿속이 하얘져 순간 특능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가 가진 능력이야말로 이 절체절명의 사태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다. 분명 자신에게 이 능력을 부여한 미지의 존재도, 이런 사태에 대비하여 능력을 주었을 테다. 그 시기가 이렇게 빨라질 줄 알았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뭐든 좋으니까, 적어도 어제 정도로만 돌아가게 해 줘라···.’


어제라면 충분히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다. 한 시간 앞 기차를 탄다던가, 다른 이동 수단을 선택한다던가···. 어떤 선택이더라도 지금보다 백 배는 나을 것이었다. 헬리온은 금빛 글자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라케시스의 실타래]를 사용합니다.]

[시전자의 의사에 따라 24시간 전으로 돌아가며, 약간의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실타래를 되감는 중입니다··· (1/24)]


주위가 밝고 따스한 금빛으로 물든다. 헬리온의 에테르와 같은 색이었다.

강한 빛에 가늘게 눈을 뜬 헬리온은 변해가는 주변 풍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 곁에 괴로운 듯 쓰러져 있던 달리안의 상처가 아물었고, 흘러나온 피 또한 말끔히 지워졌다. 마수의 피가 잔뜩 묻어 너덜너덜해진 기차 또한 원상복구 되었다. 기차 선두와 충돌한 거대한 인간형 마수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균열도 스멀스멀 작아지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닫혔다.

빛은 한층 강해져 이제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동시에 강한 바람이 불어, 헬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금빛 글자는 그 환한 빛 속에서도 여전히 또렷했다.


[실타래를 되감는 중입니다··· (23/24)]

[작업 완료]

[[라케시스의 실타래]가 종료됩니다.]


헬리온은 몸이 훅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눈을 떴다. 헛숨을 들이키며 주위를 둘러보자, 평화로운 기숙사 침대 위였다.


‘···돌아온, 건가?’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밖은 환했다. 헬리온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전후 상황을 떠올렸다.


‘정말로 24시간을 돌아온 거라면, 오늘은 방학식을 했겠지. 분명 나는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돌아와서 짐을 마저 챙기고···.’


“헬리, 들어간다?”


문밖에서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건 그나 달리안 정도였으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헬리온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서 짐을 챙기는 척을 했다.


“뭐야, 아직 짐 다 안 쌌어? 가져갈 것도 별로 없다면서.”

“···어쩌다 보니.”


분명 능력을 쓰기 전에도 이런 대화를 했었다. 혼자 있는 타이밍으로 돌아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라피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레온하르트의 발목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떨었다.


“오, 라피 웬일이야~? 평소엔 맨날 나 무시하고 네 형한테만 찰싹 붙어 있으면서! 옳지, 이리 와. 형이 예뻐해 줄게···.”


그러나 레온하르트가 손을 뻗는 순간 고개를 휙 돌리곤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허망하게 공중에 정지한 레온하르트의 손에 힘이 쭉 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아···. 오늘도 실패네. 가끔 이렇게 나한테 가까이 와 주면서, 왜 내가 다가가면 피하는 거지?”

“······.”

“헬리?”


평소 같았으면 ‘네가 귀찮게 구니까 그런 거겠지’라 대답해 주었을 테다. 실제로 하루 전— 그러니, 헬리온에게 있어 어제 있었던 일인 이 상황에서는 그렇게 대답했다. 레온하르트의 되물음에도 묵묵부답이던 헬리온은 고개를 돌려 레온하르트에게 물었다.


“내일 기차, 두 번째 거였지?”

“응? 응···. 다들 첫차는 힘들 것 같다고 했으니까.”

“그걸로 바꿔야겠어.”

“뭐?”

“첫 운행으로 타야겠어. 애들한테도 전해 줘. 지금 잠깐 할 게 있어서···.”


제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헬리온을 보며 레온하르트는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니아니, 헬리. 갑자기? 상관은 없긴 하지만,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그게······. 아. 집에서 마중 나오겠다고 해서.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흐음, 알겠어. 그럼 애들한텐 내가 말해 둘게.”


레온하르트는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헬리온을 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방을 나섰다. 그 사이 헬리온은 종이와 펜을 꺼내 급히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이게 통해야 할 텐데.’


헬리온이 적고 있는 건, 오르포스 방위대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다.


‘가문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해서 통할지도 미지수고, 만약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큰 손해지만···. 어쩔 수 없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내일 오르포스 역에서 정차하는 첫 기차가 지나간 후, 두 번째 기차가 오르포스 역에 도착하기 전 그 근방에서 대형 균열이 발생할 것입니다.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방위대를 역 근처에 배치하길 바랍니다. 만약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딜라드 가에서 적절히 배상하겠습니다.

헬리온 딜라드」


처음엔 익명으로 보낼까 했지만, 익명 제보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가문의 이름이라도 들먹이면 그래도 효과가 있을 듯했다. 헬리온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아직 귀족의 세력이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헬리온이 직접 처리할 수 있다면 직접 나서는 게 가장 편하긴 했다. 일도 복잡하게 꼬이지 않고, 번거롭게 이것저것 바꿀 일도 없을 테니. 하지만 그에겐 그럴 만한 힘이 아직 없다. 공격 마법은 꺼리는 건 둘째치더라도 애초에 위력을 잘 내지 못했고, 그는 전멸이라는 끔찍한 결말을 한 번 보았다. 애매하게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기보단 차라리 아예 손을 떼고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그는 끝까지 전면에는 나설 수 없는 서포터에 불과한 것이다.

헬리온은 가볍게 문장을 검토한 후 일하는 아이를 불러 급보를 부쳤다. 한시라도 빨리 보내야 했기에 웃돈을 얹어 주니 크게 기뻐하며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이제 모든 건 하늘에 달렸다.’


그는 딱히 신을 믿지 않지만, 이젠스 왕국은 여신의 존재를 믿는 듯했다. 만약 이곳의 믿음처럼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들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급하게 휘몰아치는 상황을 정리한 헬리온의 눈꺼풀이 무거웠다.


‘아직 긴장이 풀릴 만한 상황도 아닌데. 뭐가 너무 많이 지나가서 그런가···. 대낮인데도 눈이 감기네.’


헬리온은 비척비척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털썩 몸을 뉘며 가방을 힐끔 보니 필요한 건 대충 다 넣은 듯했다. 쓰러지듯 침대에 널브러진 헬리온은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아침. 헬리온은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기차를 탔다. 아이들은 시간을 당기는 일에 순순히 찬성했는지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헬리온의 상태로 보아 불만을 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겠지만.


“아침에 저기압인 건 알고 있었는데, 원래 이 정도였나···?”

“···아니, 오늘만 그런 거니까···. 나를 무슨 희귀 동물처럼 보는 건 관둬라.”


프레이야의 관심은 항상 과했다. 싫다기보단 귀찮은 쪽이었지만, 헬리온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양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조금이라도 두통을 해소하려는, 잠도 덜 깨 보이는 헬리온은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원 원숭이 보는 듯한 시선을 받는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래, 레이— 우리랑 놀자, 저쪽 칙칙한 남자애들은 그냥 두고.”

“달리안, 너도 남자잖아.”

“뭐 어때? 난 너희보다 아직 어리고, 귀엽잖아.”


저 뻔뻔한 발언 또한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헬리온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았을까. 문득 고개를 들자 사방이 조용했다. 달리는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곤 옅은 숨소리만 가득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옆자리를 보자, 가만히 헬리온을 바라보는 베일린과 눈이 마주쳤다.


“···베일린, 왜?”

“쉿.”


그녀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가만 보니, 베일린과 방금 일어난 헬리온을 제외한 네 명이 모두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제 어깨에 기댄 채 잠든 프레이야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손을 내리고는 씨익 웃었다. 헬리온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다들 일찍 나온 거니까, 방해하면 안 되지.’


앉은 채로 잠든 탓에 목이 뻐근했지만, 이내 통증이 사라졌다. 두통도 어느샌가 사라져 지금 헬리온의 몸 상태는 최고였다. 가방에서 자고 있을 터인 라피 또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헬리온은 손짓으로 베일린을 불러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쯤이야?”

“글쎄? 아직 오르포스 역은 안 지났어. 곧 정차할 것 같긴 한데.”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헬리온은 편안한 자세를 찾아 고쳐 앉은 후 가만히 창밖을 응시했다. 오르포스 역에 도착하면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말을 들어 줬다면 좋을 텐데.’


잠시 후, 저 멀리 오르포스 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헬리온은 거의 눈이 빠질 듯한 기세로 밖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은빛 경갑옷. 방위대 사람들이었다. 방위대장은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걸로 일단은 안심이네.’


기차는 덜컹대며 오르포스 역으로 진입했다. 천천히 줄어드는 속도에 잠든 아이들은 작게 움찔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서포터의 시간은 무한합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공지(~9/30) 24.09.11 1 0 -
공지 연재글 수정 안내 24.08.02 9 0 -
39 39. 균열 너머의 세계(1) 24.09.09 4 0 9쪽
38 38. 비밀 결사(4) 24.09.06 4 0 10쪽
37 37. 비밀 결사(3) 24.09.04 8 0 9쪽
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7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8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10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8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8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9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9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10 0 10쪽
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1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1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1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1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2 0 10쪽
»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4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0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1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5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3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7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20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7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