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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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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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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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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DUMMY

방으로 돌아온 헬리온은 그리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기숙사와 별반 다를 건 없었지만, 그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본 풍경이라는 점에서 그의 향수를 자극했다. 라피는 종종거리며 방안을 걸어 다니다 폴짝 뛰어 침대 머리맡을 차지했다.


“라피···. 비켜 봐, 형 좀 눕자.”


고양이는 늘어지게 하품할 뿐 미동도 없었다. 고양이답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제대로 눕지 않아 침대 밖으로 삐져나간 다리가 불편했다. 조금 올라가자고 고양이를 들어다 치우긴 미안했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자니 그 또한 불편할 듯했다.

어머니—미야 딜라드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정신력을 많이 잡아먹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도 그렇고, 신체 건강보다는 정신 건강을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난 김에 초고 좀 보자.’


아티팩트를 가볍게 건드리자 익숙한 노트가 나타났다. 헬리온은 등장인물 란을 건너뛰고 참고 자료를 적어 둔 페이지를 찾았다.


‘그때···, 분명 관련 책을 찾기 힘들어서 찾은 자료를 다 노트에 기록해뒀던 기억이 있어. 그러니까 오컬트나 종교, 신화 쪽도 여기에······.’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책장은 어느 페이지에 다다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페이지의 왼쪽 위에는 [생명 나무와 카발라]라고 적혀 있었다. 제대로 찾은 듯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헬리온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젠장, 읽을 수 있는 글자가 하나도 없잖아.’


왼쪽 위에 적힌 제목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깨져 제대로 된 문자를 나타내지 않았다. 아티팩트의 이름이나 초고, 성경 앞에 붙는 깨진 글자처럼 보이는 게 있는가 하면, 블러 처리가 된 듯 흐리게 번진 글자도 있었다. 가끔가다 보이는 글자는 단어 전체를 표시하지 못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몇 장을 더 넘기자, 더 심각한 꼴이 펼쳐졌다. 제목마저 깨진 데다가 페이지 전체에 잉크라도 쏟은 듯 검은 얼룩이 가득했다. 헬리온은 화가 난 나머지 신경질적으로 노트를 덮고 바닥에 집어 던졌다. 물론 노트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금빛으로 반짝이며 흩어졌다.


‘기본적인 지식은 머리로 생각해 내라는 거야, 뭐야.’


머리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천장을 보며 심호흡한 후에야 겨우 진정한 헬리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일단, 만약 ‘저번’과 같은 흐름이라면 몇 시간 안으로 이 근처에 균열이 터진다. 백작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뭐, 이따 클레어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사비아피스는 그 뒤에 생각할 문제고.’


때마침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방식으로 보아 메이드는 아닌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제 친구의 목소리였다.


“헬리? 여기 헬리 방 맞지? 들어가도 돼?”

“응.”


목소리를 듣자 안심했는지 레온하르트는 밝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등장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커피 테이블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왜? 뭐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심심해서.”

“다른 애들은 어쩌고?”

“짐 풀더니 자기들끼리 다과횐지 뭔지를 하겠다고 하던데. 각자 가지고 있는 간식으로 하려니까, 네 누나가 디저트를 준비해주겠다고 했고. 아마 네 누나도 끼울 생각이지 않나 싶어?”

“···친화력도 좋다.”


클레어는 소심하고 말을 더듬어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낯가림도 있는 듯하여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기도 뭣했는데, 들어오자마자 마주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하여튼, 내가 거기 낄 순 없잖아? 애초에 낄 생각도 없고. 그래서 그냥 네 방이나 구경할까 해서 와 봤지.”

“내 방도 볼 건 없을 텐데.”

“하하하···. 하긴, 너 기숙사 방도 무지하게 재미없으니까.”

“방이 재밌는 건 또 뭐냐?”


시답잖은 대화는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몇 분간 이런저런 헛소리를 하던 중, 레온하르트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집을 안내해 달라고?”

“응. 4년 전에 왔던 게 마지막이니까 잘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어차피 할 일도 딱히 없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헬리온 본인조차 집 구조를 완벽하게 외우지 못하긴 했지만, 적당히 돌다가 밖으로 빠지면 될 것이다. 헬리온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알았어. 그럼 나가자.”






계획은 성공이었다. 큰 중앙 홀과 서재 등을 가볍게 보여 준 헬리온은 자연스럽게 저택 밖으로 향하는 루트로 방향을 틀었다. 레온하르트 또한 군말 없이 따라오는 걸 보니 그냥 남의 집 구경이 즐거운 듯했다. 저택 뒤쪽으로 나오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규모가 작은 성과 레바나 산맥의 일부가 시야를 꽉 채웠다.


“헬리, 저 성은 뭐야?”

“나도 잘은 몰라···. 이 저택이 세워지기 전에는 저 성에 살았다는 것 같던데. 내가 태어나기 전 얘기라 들은 것뿐이지만. 지금은 뭐라더라, 기사들 숙소로 쓰고 있댔나.”

“아, 다 저기서 관리하는구나.”

“나도 그렇게 들었을 뿐이고 가 본 적은 없어. 연병장도 여기 저택에 딸린 것보다 규모가 크다고 했던가···, 아무튼 수비군이나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저쪽에서 생활할 거야.”


몇 달 전 소피가 해 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헬리온은 호기심이 생겨 가 보려 했지만, 당시 그의 몸으로 성까지 몰래 걸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단념했다. 레온하르트는 신선하다는 듯 나무 위로 솟은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성이 더 안전한 거 아냐? 성벽도 제대로 갖춰져 있고, 적습에 대비한 시설 같은 것도 있을 텐데.”

“그런가? 뭐, 저택을 지은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저택에도 방어 마법이 꽤 단단하게 걸려 있으니까 괜찮을걸. 마석만 버틴다면 성벽보다 마법이 더 튼튼하고.”

“그건 그렇네. 아, 그래서 네 방어 마법이 그렇게 엄청난 건가?”

“그건 아무 상관 없지 않아?”


두 사람이 이야기하면 꼭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냥 생각이 없는 걸까, 그만큼 마음을 터놓고 친해졌다는 뜻인 걸까. 어느 쪽이든지 긍정적인 신호이긴 했다. 레온하르트와 가까워질수록 후에 찾아올 평화에 도움이 될 터이니.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듯했다. 파란 여름날의 하늘이 갑자기 어두침침하게 변한다.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결국 터지는 건가.’


균열의 징조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오르포스에서 겪은 것보다 좀 더 짙었다. 표정을 굳힌 헬리온은 레온하르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레온하르트, 지금 당장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애들한테 알려 줘. 곧 균열이 터질 거야.”

“···그래, 알겠어. 너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 들여보내고 나서 어떻게든 해야지.”

“알겠어.”


레온하르트 또한 불온한 공기를 감지한 듯했다. 방금까지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진지한 분위기만 남았다. 조심해라, 라고 덧붙인 레온하르트는 저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헬리온도 그가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걸 확인한 후 빠르게 움직였다.


‘저택에 설치된 방어 마법용 마석은 모두 여섯 개. 에테르 잔량은 충분하지만, 균열이 본격적으로 열리면 약해진 방어막을 보강할 시간 따윈 없다.’


눈에 보이는 사용인 몇을 저택 안으로 들여보낸 후, 헬리온은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마석을 찾았다. 에테르 순도가 높은 그는 자칫 잘못하면 마석을 깨트릴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마석엔 에테르가 가득 차 있었다. 헬리온은 거기에 추가로 보험을 걸어 두었다.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급하게 떠올린 것치곤 훌륭했다. [보존] 마법은 아직 달리안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모습을 몇 번 지켜봤기에 ‘모방’을 쓰면 충분히 실행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보존] 마법에 쓰인 에테르가 닳기 전까지는 마석이 무사할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지금까지 몇몇 문장을 사용하며 깨달은 점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는 문장의 내용에 마법이 영향을 받는 듯했다. 처음 인용한 문장에선 ‘날개’라는 키워드가, 수업 시연에서 인용한 문장에서는 ‘힘을 더한다’라는 구절이 특히 강하게 작용했다. 이 문장은 처음 사용해보는 문장이라 모험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마석을 그냥 두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나으리라.


‘이 마법이 꺼지기 전에 마석의 에테르가 먼저 3/5 이상 닳으면 내가 감지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의도로 뽑아낸 구절이었다. 성 쪽에서도 사람들이 불안한 낌새를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바람을 타고 철컥거리는 금속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그는 실험이 성공하길 빌며 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마석은 5개. 균열이 완전히 열리기 전에, 그리고 아이들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 한다.






“허억······.”


헬리온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저택이 뭐 이리 쓸데없이 넓은지. 마석은 아직 두 개 남아 있었지만, 에테르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체력이 문제였다.


‘빨리 끝내고 애들이랑 합류해야 하는데, 이렇게 지쳐서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착실히 마석에 에테르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에테르 고갈로 쓰러졌겠지만, 순도가 높은 만큼 적은 양을 불어넣어도 마석에 에테르가 꽉 찼다. 헬리온은 손을 거두고 조금 지친 목소리로 읊었다.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그의 체력과 무관하게, 마법의 완성도는 높았다. 달리안이 마법을 잘 쓰는 덕분이니 나중에 그에게 뭔가 사 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이 서서히 셔츠를 적신다.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가볍게 닦아낸 헬리온은 다음 마석을 향해 뛰려 했다.


“헬리온.”


백작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작가의말

*이사야 42:9 (개역개정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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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8. 비밀 결사(4) 24.09.06 4 0 10쪽
37 37. 비밀 결사(3) 24.09.04 8 0 9쪽
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7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8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9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8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8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8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9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9 0 10쪽
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1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0 0 11쪽
»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1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0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1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3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0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1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5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3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6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19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7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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