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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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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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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DUMMY

평소라면 전부 깨져 속이 빈 네모로 보였을 글자 중 맨 앞 글자가 보였다. 헬리온은 혹여라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아무래도 글자가 보이는 게 맞는 듯했다.


‘[아□□ □□□: 초고]라······. 그럼 아마 성경 앞에도 똑같이 표시되겠네.’


 굳이 성경을 펼치진 않았다. 두 권을 동시에 펼쳐 본 적도 없는 데다 지금 헬리온이 집중해야 할 내용은 눈앞의 초고였기에, 괜히 책을 여러 권 펼쳐 두면 정신만 사나울 테다.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아□□ □□□’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한 글자를 알게 되었다고 한들 6글자이다. 겨우 1/6을 알아서 짐작이 갈 만한 단어였다면 애초에 검열되지도 않았으리라.

 

‘검열이 아니라 단순히 시스템 오류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이 헬리온의 눈에만 보이는 노트와 금빛 글자가 웹소설의 단골 소재인 ‘상태창’이라던가, ‘시스템’ 같은 무언가라면 오류를 발견한 상위의 존재— 신에 필적하는 무언가로 묘사되는 그것에 의해 추후 글자가 보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또한 말 그대로 가능성에 불과하다. 만약 그의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현상이 ‘신’같은 특정 존재가 부여한 무언가가 아니라면, 이 세계관의 ‘신’보다 더 거대한···.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관여한 무언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로 검열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데다가, 헬리온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보호 조치 같은 걸 수도 있고···, 지금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복잡한 건 지금 당장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머릿속에 뿌옇게 낀 안개를 흩어낸 헬리온은 천천히 노트를 펼쳤다. 구석에 떠 있는 완성도는 무려 7.48%까지 올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껑충 뛴 수치에 헬리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흐름이 크게 바뀌어서 그런가? 지금까지 자잘하게 오르던 거에 비하면 큰 폭으로 뛰었는데.’


어떻게 되었든 간에, 완성도가 올라간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이 세계가 완성된다고 함은 헬리온이 이 초고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이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상황이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헬리온은 첫 장부터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간다.


‘자잘하게 많이 바뀌었군.’


초반 연재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던 부분도 헬리온의 발자취에 맞추어 내용에 변화가 있었다. ‘헬리온 딜라드’라는 후반부에나 비중을 가지는 주·조연 캐릭터가 주인공의 옆에 붙어 협력하니, 바뀌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예전 연재분에서 뒤늦게 등장하는 인물이나 조연도 최근 몇 달 사이에 우르르 등장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큰 폭으로 흐름이 바뀌지 않은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글은 벌써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부분부터 글자가 조금씩 읽히지 않았다. 헬리온은 시력이 나빠졌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거렸지만, 단순히 글자가 깨졌을 뿐이었다.


‘열차에서 있었던 일은 내 능력이 개입해서 그렇다고 치고···, 뒤쪽은 어떻지?’


백작이 죽고 헬리온이 로타님으로 돌아가는 초기의 내용은 스토리 상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당시 로타님으로 향하는 기차가 지나는 길에 균열이 발생했는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쓰는 주체는 헬리온이다. 이야기는 그의 시각에 가깝게 서술되었고(능력을 사용하여 되돌아간 시간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 듯했다.), 아마 이후에도 쭉 그러할 것이다. 읽히지 않는 부분을 맥락에 맞추어 머릿속으로 채워 넣은 헬리온은 페이지를 더 뒤로 넘겼다.


‘역시 그런가···.’


백작이 죽었다는 언급 자체는 확실히 사라졌다. 이 부분은 우선 안심이다. 그 이후로 헬리온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마다 글자가 깨지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걸 보아하니, 만약 이 보이지 않는 문장들이 초고 앞 여섯 글자처럼 시간이 지나 서서히 보이게 된다고 해도··· 그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래도 다른 건 잘 보이는 편이니까 됐나···. 사비아피스 이야기도 거의 가려지지 않았고.’


본래 로타님에 온 목적은 사비아피스였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괜히 왔다 갔다 하기도 귀찮으니 수도에 눌러앉아 게으른 생활을 보낼 예정이었으니. 헬리온은 손을 뻗어 트레이에 놓인 디저트를 손 가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사과 잼이 들어간 쿠키였다.


‘큰일도 지나갔고, 시간은 많으니까 초고를 뒷부분까지 복습하고···, 책이라도 좀 읽다가 잘까.’


어린아이 수준의 책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방 책장은 어느샌가 헬리온 또래 아이들이 읽을 만한 수준의 책들로 바뀌어 있었다. 중간중간 수준을 뛰어넘는 책도 들어가 있는 걸 보아, 아마 케이슨이 지시한 것이리라고 짐작했다.


“라피, 이리 와.”

“애앩.”


고양이는 침대 귀퉁이에서 배를 천장으로 향한 채 사람처럼 누워 있다가, 헬리온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고롱고롱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라피를 헬리온은 가볍게 쓰다듬었다.

따끈한 고양이와 함께 책을 읽던 헬리온은 어느샌가 잠들었다. 그의 방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본 소피는 조심스럽게 들어와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도련님의 주위를 정리하고 침대에 바로 눕혔다.

잠든 헬리온은 마치 의식이 없던 지난 몇 년간의 그처럼 숨소리가 옅었다. 그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볼 때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헬리온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어린 시절 그를 도맡아 키우던 유모는 그가 쓰러진 직후 건강 악화로 일을 그만두었다. 그녀 또한 딜라드의 은혜를 입은 땅에 살기에 일을 그만두는 걸 매우 아쉬워했으나 당장 쉬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소피는 그런 그녀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딜라드 도련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녀는 도련님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유모의 빈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던 케이슨은 그런 그녀에게 간병인 역할을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좋은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그 도련님은 얼마 전에 쓰러졌다. 보수도 넉넉했으며 하는 일은 일반 메이드보다 적은 편이다.

그렇게 약 4년간 헬리온의 수발을 든 소피이다. 어린 시절 궁금증의 대상이었던 도련님은 생각보다 작고 연약했지만, 절대로 마음조차 약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덮어 주고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불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늘어지게 하품하는 고양이의 움직임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소피는 자신이 도련님을 모시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다음 날 아침.

기분 좋은 새들의 노랫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헬리온은 밝은 주변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언제 이불 속으로 들어왔는지 고민하려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이 밝고, 새소리가 들린다는 건 100% 지각 확정이라는 뜻이다. 눈을 번쩍 뜬 헬리온은 기세 좋게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미친······.”


순간 멍해진 헬리온은 상황을 파악하고 나지막이 거친 말을 내뱉었다. 아직은 생각보다 입이 고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의식적으로 어휘 선택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그에겐 오랜만에 입에 담는 단어였다. 그는 지금 직장인 윤명진이 아닌, 이세계 마법사 학생인 헬리온 딜라드이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선 사리 분별이 잘 안되어, 설마 출근도 못 하고 내리 잔 건가—라며 막연한 공포에 휩싸였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마른세수를 하며 제정신을 되찾은 헬리온은 갑자기 몸을 일으킨 대가로 잠깐 기립성 저혈압의 지배를 받았다.

이내 시야가 돌아온 헬리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섰다. 얼핏 창문을 보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비척비척 기어 나오는 헬리온과 눈이 마주친 건, 다행히도 소피였다.


“아, 도련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혹시 제가 얼마나 잤는지······.”


잠이 덜 깬 목소리에 소피는 빠르게 대답했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주무시게 두었는데···, 아. 간단하게 드실 걸 준비해 올게요. 방에 가만히 계세요!”


그 말을 남기고 소피는 빠르게 사라졌다. 기지개를 켜며 도로 방으로 들어간 헬리온은 오랜만에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로 했다. 고양이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나른하게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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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균열 너머의 세계(1) 24.09.09 4 0 9쪽
38 38. 비밀 결사(4) 24.09.06 4 0 10쪽
37 37. 비밀 결사(3) 24.09.04 8 0 9쪽
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7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8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10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8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8 0 10쪽
»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9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9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10 0 10쪽
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1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1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1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1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2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3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0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1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5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3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7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19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7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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