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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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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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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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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비밀 결사(3)

DUMMY

잔뜩 멋이 들어간 문장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시감을 주었다. 프레이야는 어디에 쓰인 문장인지 기억하고 있는지 오, 하고 작게 감탄했다.


“저걸 저렇게도 응용하는구나.”

“···그러게.”


한 박자 늦은 대답에 프레이야는 히죽히죽 웃으며 헬리온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지만, 프레이야의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달리안은 신중하게 같은 기운을 띠는 광석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 대규모로 분포하는 모양이다.


 “헬리온, 지금 달리안이 쓴 문장이 어디 나왔던 건지 생각 중이지?”

“······.”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이 누님이 알려 줄까?”

“누님은 무슨 누님, 해봤자 두 달 먼저 태어난 정도면서.”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월초고 너는 월말이니까 석 달 정도이지 않을까?”

“거기서 거기지···.”


제 생일을 알려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한 날짜까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헬리온은 그 점에 관해 물어보려다, 입학식 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얘였지. 우리 가문 뒷조사했다고 한 게···.’


친해진 이후로는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게 되어 거의 잊어버릴 뻔한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가 얼마나 깊게 조사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헬리온 자신에 대해선 털어봤자 나오는 게 없었을 테다. 백작가의 잠든 어린 후계자에게 붙을 소문이라고 해봤자, ‘사실 이미 죽은 게 아니냐’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뿐이니.


“그래서, 진짜 까먹었으면 내가 특별히 알려 줄 수도 있는데~”

“됐어. 방금 기억 난 참이고···. [바보 왕] 이야기잖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헬리온도 읽은 기억이 있다. [바보 왕]이라 불리던, 이젠스 왕국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재위한 왕에 얽힌 전설.

어린 시절부터 천재 혹은 바보라는 극단적인 평을 받던 그는, 재위 후에도 기행을 이어간다. 기행이라고는 해도 국정에 방해될 수준은 아니었으니 함부로 왕에게 충고하는 이는 없었으나 주위 사람들은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왕실의 사유지—현재는 왕실 전용 사냥터로 쓰이는 세피어르 숲은 그 시절부터 사냥하기 좋은 장소로 꼽혔던 모양이다. 알테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바쁘지 않은 날이면 왕은 사냥터로 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곳에서 왕은 침입자를 만난다.

숲 중앙의 작은 호수는 사냥하기 좋은 장소였다. 물을 마시러 온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도 있고, 동물의 피나 흙먼지 등을 씻어내기도 용이했기에. 그날도 왕은 검 한 자루와 활, 화살 몇 개를 들고 중앙의 호수로 향했다.

딱히 막혀 있는 것도 아닌 숲이지만, 엄연히 왕실의 사유지이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허가 없이 발을 들이면 가볍게는 조사부터, 심할 경우 실제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곳에서 왕은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얼굴. 딱 보아도 왕실 사람은 아니었다. 차가운 달빛을 의인화한 듯한 은빛 머리카락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겨 추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자, 시선을 느낀 여인은 급히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왕이 그녀를 놓칠 리 만무했다. 기행뿐인 왕이라고는 하지만, 왕국은 평화로웠고 그의 무예는 뛰어났다. 빠르게 도망치려는 그녀의 팔을 낚아챈 왕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닫은 여인을 가만히 보던 왕은 결국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에테르를 이용한 계약.

상호 합의를 거치지 않고 이 계약을 파기할 시 가진 에테르를 절반 이상 잃게 되는, 에테르를 쓰는 검사나 마법사에겐 치명적인 계약이다. 물론 순도가 월등히 높다면 에테르를 절반 이상 잃더라도 문제가 없겠으나, 아무런 지장도 없을 정도로 높은 에테르 순도를 가진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지금의 헬리온이 이 계약을 한 후 무단으로 파기하더라도 마법을 평소처럼 쓰지 못할 테다.

왕은 이 방법으로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며 발설하지도 않을 것이다’를 계약 내용으로 하는 에테르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맺기 직전, 왕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밀이 많은 그대여, 전부 드러내시오. 드러냄은 죄가 아니며, 나의 신은 당신을 용서해 주시리니.’


‘내가 읽은 판본이 너무 어린애들 대상이어서 그런가, 대사가 적당히 변형되어 있어서 다른 문장인 줄 알았네.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할 뻔했어.’


이 이상 상식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건 사양이었다. 달리안도 그 전설의 대사를 완벽하게 똑같이 외우지는 않았으나, 그 정도 차이는 판본에 따라서도 충분히 갈릴 수 있다. 게다가 민간 전설이지 않은가. 모든 대사가 똑같이 전해져 내려오면 거기서부턴 전설이 아닌 역사의 영역이다.

그러는 사이 달리안은 근처에 묻혀 있던 광석을 전부 파낸 듯했다. 꽤 정교한 마법이었지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말끔한 모습의 달리안은 오히려 개운해 보였다.


“이 근처에서 이 돌이랑 비슷한 느낌을 띠는 건 이게 전부야.”

“고맙다.”

“뭐얼, 이런 섬세한 조절은 오랜만에 해 봐서 그런가? 개운하고 좋네.”


아무래도 달리안은 머리를 쓰면 쓸수록 컨디션이 좋아지는 타입으로 보였다. 개운한 표정의 달리안의 옆에 놓인 사비아피스는 총 6개였다.


‘생각보다 많네. 좀 더 깊이 파묻혀 있을 줄 알았는데···, 저번 균열 때문에 지반이 흔들려서 위로 올라온 건가.’


어찌 되었든 헬리온에게는 이득이었다. 수가 많을수록 증명하기 쉬웠으니까.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헬리온은 달리안이 캐낸 사비아피스에 [경량] 마법을 걸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옆에 있던 큰 나무에 에테르로 표식을 남겼다.


“그래서, 그게 뭔데? 자연 마석?”

“음, 그건 아니고.”


자연 마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달리안은 캐내는 과정에서 마력을 느꼈을 테고, 보통은 일반 광석에 마력을 입혀 마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자연 광석은 그 수가 적고 취급하기가 까다로워 웬만해선 시장에 풀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려 줄게. 지금은 일단 내려가자.”






챙— 챙—


연무장 앞을 지나가자, 검술 연습을 하는 레온하르트와 베일린, 그리고 율리아가 보였다. 오늘은 드물게 레온하르트가 율리아의 상대역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던 베일린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어라, 벌써 왔네?”


“응, 헬리온 볼일이 빨리 끝나서.”

“레오, 잠깐 멈춰 봐—.”


베일린은 열심히 맞붙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외쳤다. 그 목소리에 움직임을 뚝 멈춘 두 사람은 베일린을 바라보았고, 동시에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보고 활짝 웃었다.


“어서 와. 다들 빨리 왔네?”

“응, 헬리온 볼일이 빨리 끝나서···, 이거 좀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어?”

“뭐, 그럴 수도 있지. 맞다 맞다. 베이, ‘비밀 결사’ 말인데···.”


달리안은 생각보다 그 모임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베일린은 마침 떠올랐다는 듯 양손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아, 그래. 아까 너희 갈 때쯤 이야기해서 결과를 못 들었겠구나? 우리도 갈 수 있게 되었어. 사실 그 모임, 레이디 클레어 앞으로 초대장을 보냈었나 봐. 수상쩍어서 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던 때에 우리에게 이야기한 거고. 레이디는 그런 자리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고, 우리한테 초대장을 넘겨주겠대.”

“그래도 되는 거야?”

“뭐, 되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아닐까? 초대장 하나당 다섯 명까지 동반할 수 있다니까, 자리도 넉넉하고.”

“뭐 그런 초대장이 다 있담.”


프레이야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 다들 어느 정도 납득한 듯했다. 자신이 할 말은 없다고 판단한 헬리온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 헬리, 어디 가?”

“아버지한테.”


*


소피의 말에 따르면, 이 시간에 백작은 집무실에 있다고 했다. 집무실은 서재 근처에 있어 찾기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쓸데없이 넓어 자칫 잘못해서 길이라도 잃었다간, ‘아무리 넓어도 그렇지, 본인 집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놀림당할 게 분명하다.


“헬리온.”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헬리온은 순간 흠칫 떨었다. 다행히도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 찾아가려던 참인 백작이었다. 헬리온은 몸을 돌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어디 가는 길이냐.”

“마침 아버지를 뵈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선 어디에···.”

“네 어머니의 상태를 보고 왔다. 할 이야기가 있느냐?”

“아, 예.”


케이슨은 헬리온을 앞질러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검소하지만 백작의 위엄을 드러내는 집무실이었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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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균열 너머의 세계(1) 24.09.09 4 0 9쪽
38 38. 비밀 결사(4) 24.09.06 5 0 10쪽
» 37. 비밀 결사(3) 24.09.04 9 0 9쪽
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8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10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11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10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10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10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12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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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3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1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2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1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2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4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1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4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9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5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8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20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8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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