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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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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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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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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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자

DUMMY

한씨세가는 검류의 본고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온갖 분야의 검객이 모였다. 다수의 검사부를 초청해 검법에 관한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


근래에는 무당제자 현료가 인기의 중심이 되었다. 명현진인과 다른 풋풋하면서도 현묘한 검법. 그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있었다. 헌데 태극승화의 묘리를 깨닫고야 말았다.


사아앗, 쿵.


“굉장하군. 검격이 유유히 밀려나며, 추진 경파가 전부 무소용해졌어. 저게 바로 유능제강의 본산인가!”


굽이치는 태극검이 상대의 검을 흘려내고, 부드럽게 넘어트렸다. 자리에서 머쓱하게 일어난 검객이 감사의 포권례를 보였다.


“소도장. 덕분에 개안하였소이다. 역시 명문구파의 위상은 어디 안 가는구려.”

“아닙니다, 저는 아직 한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 사람의 뒤를 쫓으려면 더욱 정진해야지요.”

“그 사람이라 함은?”


익숙하게 겪는 일이었다. 이런 비슷한 질문이 올 때마다, 현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가 심득을 얻은 비결 말씀하십니까? 전적으로 한소백 도우 덕분입니다. 그는 타인의 잠재력을 이끌어내 주는 진정한 천재입니다.


단순히 치켜세우는 칭찬으로 그치지 않았다. 저번에 있었던 한소백과 현료의 수공 대결. 생생히 관망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노을이 지는 때, 머리 위로 피어오른 태극의 형상. 그것을 목도한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은 검객들이 이미 열을 넘었다.


기어이 큰 소동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걸어 다니는 기연이다, 필히 잡아야 한다!”

“첩정대? 발재간만 날쌘 놈들 아니냐?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래, 인원 개편을 새롭게 해야 해! 없애버리자!”

“첩정대 사냥의 시간이다!”

“정체를 숨긴 첩정대원도 많다고 들었어. 비겁하게 이중 신분이라니. 전부 색출해내야 해. 너냐? 저놈 도망간다!”


야단법석이었다. 소년의 재능이 불러온 파란. 첩정대에도 불티가 튀었다. 첩정대주는 애당초 은둔이 일상인 자였다.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한 희망인 부대주마저 업무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고.


따라서 다음 표적은 몹시도 자명했다.


“독불마검, 네 아들을 당장 내놓아라!”


벽이 부서지며 흉악한 인상의 무인들이 소리쳤다. 한대명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나한테 왜 지랄이냐, 이것들아.”

“능설의 효성이 자자하다고 들었으니, 당연히 이곳에 있겠지!”

“그딴 별호를 지껄이고···.”


그때 누군가가 점잖게 말했다. 다만 어투와 다르게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능설을 나한테 입양보내는 건 어떤가. 비범한 재능은 꽃피워야하는 법. 내가 훌륭하게 키워주지.”

“네놈은 또 뭐라는 거냐.”

“아니면 내가 스승이 되어야겠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이니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아비라고 불릴 수 있겠지.”

“검신대주, 누구 마음대로 헛소리를!”


또 다른 누군가가 검신대주를 만류했다.


“진정하시죠. 지금 예의를 말아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옳거니, 말 한번 잘하는군.”

“개소리하지 마라, 검파대주.”


검파(劍把), 칼자루라는 뜻이다. 칼끝과 칼날을 뒷받침해주는 천검단 최후의 보루. 늘 후방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종사의 자질입니다. 이쪽에서 허리를 굽혀 들어가도 부족할 판국이지요. 그런 야만적인 방식으로는 능설의 호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아들로 삼다니 가당치도 않을! 전 능설을 아버지로 삼을 겁니다.”

“미친놈이?”


검파대주는 고저 없는 진중한 목소리로 슬그머니 말했다.


“조부님, 문안드립니다.”

“검파 선배, 당신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

“몇 달 요양하기 싫으면 적당히 장단을 맞추시죠, 조부님.”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잠시 쉬고 싶어도 호승심에 미친 칼잡이들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잔뜩 열불이 난 검신대주가 발검했다. 무지막지한 기운이 일며, 휘우뚱 대기가 구부러졌다.


“순순히 내놓아라! 내 힘으로 쟁취해야겠다!”

“육시랄 놈이?!”


콰과과광!


파멸적인 검격이 전조 없이 내리쳐졌다. 굉장한 검압이 광풍을 몰며 장내를 휩쓴다. 처소가 완전히 박살 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았다. 칼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한대명의 장남, 한유백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개족보가 따로 없군···.”

“으흠.”


헛기침이 자기 존재를 알렸다. 고개를 돌리니 검극대주가 보였다. 한유백이 소속한 무력대를 책임지는 자였다. 헌데 씨익 웃는 미소가 몹시도 섬뜩했다.


“반갑습니다, 백부님.”

“···대주님? 당신 제 상관이지 않습니까.”



* * *



대연무장.


한씨세가 모든 무인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다. 타 소속의 무사끼리 서로의 무공을 교류한다고. 물론 에둘러 표현해 교류였다. 보통은 합법적인 싸움 장소로 다들 애용했다.


이날도 오순도순 살결과 철을 부딪치던 때였다. 돌연 싸한 정적이 흘렀다.


“능설 현현!”


누군가의 외침. 그 고성이 신호가 되어, 연무장의 무인들이 열광적으로 달려들어 왔다.


“저놈 잡아라!”

“일단 본 대의 지하실에 감금해두면···.”

“흐익, 미친놈이 웬 검기 다발을-”

“경쟁자를 제거해야 한다! 서둘러 움직여라!”


칼을 찬 장정들이 우후죽순 모여든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한소백을 납치하려는 순간이었다. 곁에 있던 망휘대 소속, 임유광이 헛기침하더니 제지했다.


“멈추시오!”


저지가 통할 리 없었다. 반발이 곧장 일었다.


“비켜라, 광인!”

“그냥 밟고 지나버려.”


괜히 질겁할 정도의 집단적 광기였다. 임유광은 서둘러 동여맨 보따리를 폈다. 나무 기둥을 지면에 꽂고, 두루마리를 위에서 아래로 펼쳤다.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검법 가르쳐드립니다.]


임유광이 다시 외쳤다.


“줄을 서시오!”


청선과의 관계는 대외적으로 알려져선 안 된다. 따라서 일공녀에게 부탁해 잠시 임유광을 빌려왔다. 거북했지만 그나마 안면이 있다고. 이내 임유광은 두루마리에다가 추가로 붓질했다.


[진상 사절, 반박 거절.]


정말로 검법을 가르쳐준다는 것일까. 흥미가 일어난 무사들이 다급히 자신의 이름을 알릴 때였다.


“나 먼저! 내가 가장 앞에 왔··· 당신 뭐야.”

“비켜라.”


그 순간 웬 사내가 인파를 비집고 나타났다.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크다. 워낙 비대한 체구 탓에 굳건히 버텨도 소용없었다. 선두를 지키던 무리가 옆으로 밀려났다.


한눈에 보자마자 압도감이 드는 민머리 두상.


궤붕단애검의 엄석궁이다. 일전에 평검주 승단시험 상대였던 강검의 검객. 이젠 승단하여 명실상부한 명검주였다.


“만난 지 꽤 오래됐군.”

“그간 무강하셨습니까.”

“겉치레는 됐다. 내 강검을 알려줘야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진득하게 붙지.”


쏜살같은 쾌검으로 합 하나 나누지 못하고 끝났다. 비록 인정했어도 그날의 비무가 못내 아쉬운 모양인 듯했다. 엄석궁은 묵직한 대검을 세우며 기수식을 펼쳤다.


“가지.”


긴말은 필요 없었다. 지반을 뒤흔드는 발걸음과 함께 대검이 공기를 갈랐다. 묵직한 발경력이 일격 일격마다 응축되어 터졌다.


쿠구궁. 쩌어엉, 쩡!


태산 같은 강격이다. 어기충검으로 칼날 내구를 올려도 정면으로 맞붙어선 안 됐다. 휘늘어진 칼 그림자가 간극을 희롱하며 간신히 충돌을 비껴댔다.


그럼에도 강검의 여파로 바위 쪼개지는 소리가 연거푸 발생했다. 아무리 봐도 한소백이 밀리는 상황. 양자택일의 강요가 몇 번이고 펼쳐진다. 담벼락 근처까지 수세로 몰릴 때였다.


미끄러지는 듯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벌리더니, 이내 번뜩이는 안광이 기회를 포착했다.


스앗!


바람 줄기가 머리칼을 나부끼게 했다. 암반 같은 근육에서 핏물이 새어 나온다. 칼날이 급소를 위태롭게 피하며 엄석궁의 옆구리를 후볐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인정해야겠군. 지난 승리는 단순한 요행이 아니다. 온전한 실력이구나!”


엄석궁이 담담하게 칭찬을 늘어뜨렸다. 한소백은 검을 빼내며 포권례를······ 왜 안 뽑히지.


“한 수 배웠습니다.”

“배우기는, 그토록 자신 있게 덤벼놓고 강검의 약점만 만천하에 공표했을 뿐인데.”


엄석궁은 근육을 이완시키더니, 검을 뽑아 건네주었다. 은근한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서, 보완할 부분이 있었나.”

“음, 양자택일. 수비를 도외시하고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는 건 확실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래도 호신기로 보신을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옳지 않을지.”


엄석궁은 고개를 가로로 휘저었다.


“호신기라. 내가 모를 것 같나. 애당초 문제점을 알고도 고치기 어려운 영역이다.”

“어렵다고 하심은?”


대검이 지면에 꽂혔다. 허심탄회한 고백이 약한 면모를 드러냈다. 불굴의 외관과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


“공격과 방어. 전신을 기막으로 두른 권법가와 다르게 둘 다 신경 쓸 순 없어. 인간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지. 내공운용이 양 갈래로 동시적이어야 하는데, 이는 양의심공 정도는 익혀야 가능하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지.”


한소백은 왜 그런 걸 못 하냐고 묻진 않았다. 그조차도 지금 경지에서는 내공수발력과 사고력이 부족해, 힘에 부쳤다.


대신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선택과 집중. 정답을 이미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호신기가 꼭 전신을 뒤덮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어느 곳에 집중할지를 정하는 건 절세고수들도 하는 건데.”

“잠깐, 설마···.”


한소백은 쉬지 않고 부연했다.


“강검의 투로에서 벗어나는 곳, 치명상이 될 위치. 그곳만 집중하면 되는것 아닙니까. 어차피 강검의 고수들은 외공도 충분히 단련한다고 들었는데요.”

“흐읍···!”


엄석궁이 눈썹을 구부러트렸다.


“좋은 도움이 되었다. 이제 문제점과 타개책을 알아냈으니, 개선법을 짜내야겠군.”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는데, 도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뭐?”


한소백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둔검이 꼭 하수를 기죽이기 위한 묘리는 아닙니다. 어깨 부근 견우혈(肩髃穴)에 공력이 지나갈 때, 잠시 시간 차를 두십시오. 힘을 폭파시키는 적시(適時)의 조절만으로도 상대의 투로를 방비하고 반격하기 용이해집니다.”

“흐음, 적시라. 과연.”


엄석궁이 눈을 크게 떴다.


“지켜보니, 종아리 비복근(腓腹筋)을 무리하게 사용하시더군요. 진각으로 적의 균형을 무너트리고, 자신의 무게 중심을 견고히 하시는 것도 좋지만 항상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없다? 변초를 말하는군.”

“예, 그렇습니다.”


한소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곤거렸다.


“대퇴부에 힘을 느슨하게 주고, 승근혈(承筋穴) 주변 세맥에 진기를 완급 조절하여 내려보내십시오. 탄성이 깃들며 보법의 간합 창출이 더 쉬워질 겁니다. 적재적소에 쓰기만 해도 심리전에서 우위를 가질 테죠.”


강검의 약점 보완을 위한 조언으로 몹시 훌륭했다. 잠시 듣는 것만으로도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엄석궁은 조용히 상념에 빠졌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눈을 뜬 엄석궁은 거대한 애검을 연거푸 휘둘렀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준비 동작과 초식의 반동이 굉장히 줄어들었다.


동시에 강검의 범위 바깥 부근. 그곳을 뒤덮는 호신기는 몹시 견고해졌다. 더 이상 양자택일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일절 손해 없이 장중한 공격을 퍼붓는, 그야말로 양심을 팔아먹은 욕심의 구현이었다.


엄석궁이 매우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검의 대종사로군.”


화기애애한 기류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피어오른다. 그리 칭찬이 끝나기 무서울 때였다. 누군가가 무르익은 분위기에 훼방을 놓았다.


“하아, 대종사?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군. 오만하다, 오만해.”


좌중의 눈길이 발언자에게 쏟아졌다.


“저, 저 염치없는 자가 왜 이 자리에!”

“흠, 저기 쓰레기 같은 한량 놈이 여태껏 능설을 괴롭혔다고?”

“무공도 보잘것없는 놈이 무슨.”


동시적인 야유에 목소리의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부재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원. 두둔하는 자가 수두룩하구나.”


사공자의 외숙부, 은월상단 금휘검객 윤일성.

한소백을 향한 노골적인 견제의 원흉이다. 일전에 한대명이 초식, 운망으로 쓰러진 전적이 있었다.


듣기로는 의식불명에다가 최소 반년은 요양해야 한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회복이 어리둥절했는데, 이유가 곧 밝혀졌다.


“너희 부자 때문에 귀한 제상단(除傷丹)을 먹었다. 몹시 아까워.”


제상단. 의맥(醫脈)에서 내려오는 비전 요상약이다. 삼키는 순간, 내상 회복과 공력 보충의 효력이 즉각 발휘된다고.


과연 상계의 인물답게 막대한 금액을 가뿐히 소비했다.


“그나저나 내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드넓은 강호에 너만이 특별한 줄 알고 나대느냐. 구룡팔봉(九龍八鳳), 격랑칠요(激浪七曜). 네 놈과 비견될 천재들이다. 한씨가문의 삼공자도 포함되지.”


윤일성은 끊임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꽃잎을 떨어트리는 강풍, 수면을 덮치는 파도. 산뜻한 봄날조차 언젠가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고 말지. 네 미래란다,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여.”

“비무를 원하는 거냐.”


존대는 없었다. 한소백은 적의를 한껏 발산하며 노려봤다. 그러자 윤일성이 검신에 아지랑이를 피어올리며 다가왔다.


휘우웅─


“네 아비의 은원을 직접 몸으로 갚아라.”


갑작스러운 결투였다. 순수하게 무학을 견주는 것이 아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목적.


근 사십여 년에 가까운 막대한 내공이 장대하게 너울거렸다. 기예 따위 없이 체급으로 짓누르려는 듯했다. 질풍이 불며 검끝이 곡선으로 다다를 때였다.


“말 한번 잘했군. 강풍, 파도, 겨울···. 하나 같이 잔잔한 수면을 뒤흔드는 거대한 걸음이지.”


스아아···.


검날이 유장하게 물결친다. 연속된 검로는 끊기고, 진기의 파동조차 튕겨 오른다. 벼락 같은 충돌은 하나 같이 무의미했다. 도리어 반탄력에 제 힘만 깎게 한다.


이내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왜 내가 휩쓸린다고 여기지?”

“······흐읍!”


윤일성은 경악했다.


모든 방향에서 대응하고, 상대를 농락하듯 찌른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변초의 가짓수. 기예로써 고작 열다섯의 소년에게 지고 말았다.


벌거숭이가 된 기분. 관중들의 조롱에 윤일성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마저도 곧 섬뜩한 검격으로 종식되었다.


스가각─!


초식, 망운. 한없이 늘어진 환검과 변검 사이로 한줄기 강격이 내리꽂혔다.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피보라가 높이 치솟으며, 산송장이 지면에 쓰러졌다.


빠득, 가죽신이 윤일성의 안면을 즈려밟았다. 토룡마냥 잠시 꿈틀거리다가 멎었다. 직후, 서늘한 음성이 거만스럽게 흘러나왔다.


“내가 바로 강호의 파란이다.”


더 이상 윤일성은 한씨세가 안에서 거들먹거리며 지낼 순 없으리라. 금월상단의 명예도 바닥으로 떨어질 테고.


“하수 주제에 걱정도 과하기는. 염치가 있다면 금분세수나 준비하도록.”


못마땅하게 내리깔며, 검면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냈다. 한소백이 슬슬 자리를 파하려는 순간, 군중 사이에서 한 소년과 마주쳤다.


사공자, 한하진이 눈을 슬쩍 피했다.



* * *



달빛이 휘황하게 떨어지는 한밤중이었다. 한씨세가의 후원에서 웬 목소리가 번졌다.


─깊은 별밤에 잠 못 이루건만.

─들녘의 풀잎마저 소란스럽구나.

─봄날 삭풍이 잔불을 꺼트리니.


“어느새···.”


감미롭게 울리던 노랫가락이 돌연 멈췄다. 사공자는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 노래, 정말 좋아하나 보군.”


한씨세가에서 내려오는 노래다. 누가 지었고, 언제부터 전해져온 건지 그 기원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낭만적인 가사와 아늑한 곡조 탓에 다들 줄곧 부르곤 했다.


“한소백···.”

“전음으로 부르다니, 무슨 용건이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사공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꿈틀대다가 겨우 말문을 뗐다.


“···너한테 사과하기 위해 불렀다.”

“사과라, 무슨 사과?”

“작년 검련성제 이후, 난 패배한 주제에 부끄럽게도···. 가솔들을 동원해 너를 육체적,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정말로 미안하다.”


한소백은 현재 승승장구하고 있다. 가문 내에 입지가 크게 올랐고, 비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반면 사공자는 후계 정쟁에서 완전히 밀린 상황.


그를 도와주던 외숙부조차 이젠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뒤바뀐 처지에 뒤늦게 꼬리를 내미는 걸까. 얄팍하고도 영약한 속셈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소백은 실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주동자가 네 외숙부란 걸 다 안다. 애당초 너한테 선동할 힘조차 없지.”

“···알고 있었나?”

“한 삼십 년은 됐나.”

“뭐?”


안면을 구긴 사공자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내 책임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난 외숙부의 행동을 그저 관망했어. 또한 너한테 열등감을 품었던 만큼, 네가 무너져가는 걸 보면서 희열과 통쾌함도 느꼈어.”

“질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인간의 마음을 어찌 무던하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 넌 어리니까 충분히 실수할 수 있다.”

“네가 나보다 한 살 어리지 않나.”


한소백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거든.”

“성숙은 모르겠고, 맛이 간 것처럼 보이긴 하더라.”


큭큭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 입을 꾸물거리던 사공자가 눈매에 힘을 줬다. 그리고 비장한 음성으로 제안했다.


“지난 축제 이후, 난 불철주야 정진했다. 그럼에도 네 성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설욕전을 치러도 되겠나.”

“환영이다, 애송이.”


스릉.


짧은 칼울림이 고요하게 번졌다.


바람이 선선하게 분다. 기묘한 대치가 옛적의 추억을 슬그머니 떠올리게 한다. 그때도 그랬다. 찬란한 별바다와 무수하게 피어오른 날붙이.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즐겁고 흥겨운 축제의 날.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겪진 못했다. 아직 남은 축제도 다가오기까지 몇 달 정도 남았고.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여기 밤하늘에 별빛이 흐드러지게 피고, 칼잡이가 둘이나 모였다. 잡다한 관중은 불필요하다. 심장의 고동이 북소리를 대신한다. 거창한 허례허식 따위 집어치우자.


오직 둘만을 위한, 별빛과 검의 축제가 개최되었다.


작가의말

좀 전개 호흡을 빨리 가져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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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0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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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가르침 (2) 24.08.23 560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60 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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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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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살생부 (2) 24.08.18 671 1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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