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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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작품등록일 :
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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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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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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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자 (2)

DUMMY

옛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감회가 깊다.


처음 검련성제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설렘이 잔뜩 부풀었다. 다만 사공자와의 일 이후로 구경조차 하지 않았다. 듣기로는 올해 있을 축제가 역대급으로 화려한 구성이라고 하였는데.


“내 무위가 미력하니, 검혼을 써도 되겠는가. 이를 통제하는 것도 엄연한 실력으로 쳐줬으면 좋겠는데.”


사공자가 검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신묘한 기운이 어슴푸레하게 나부꼈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능설을 상대하는데 전력을 다해야지.”


검혼(劍魂).


검신교에서 내려오는 특별한 검이다. 흔히 영성이 깃든 무기를 신병이기라고 부르는데, 그것들과 미묘하게 궤가 달랐다.


짧게 요약하자면 검객의 인생 그 자체.


검혼을 쓴다는 것은 타인이 칼로써 쌓아올린 성취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비슷한 마음을 말미암아, 하나의 검류(劍流)로 동화되어야만 했다.


저벅.


검집을 옆으로 집어 던진다. 사공자는 검에서 새어나오는 기이한 힘을 받아들이며 정숙하게 떠들어댔다.


“내가 지닌 검의 혼은, 검군제(劍君帝)의 무수한 제자 중 하나다. 자질이 부족해 결국 진전을 잇지 못했지.”


우우웅─


검날이 크게 요동친다. 검객이 자신의 검과 마음이 하나 될 때 얻어내는 공명 현상이다. 달리 일컬어 검의(劍意)를 취득했다고 부른다.


“포기를 모르던 그는 스스로 유파를 창시했어. 한평생 나유타(那由他)를 갈망하며 오랜 노력 끝에 그 단초를 잡아냈지.”


사공자가 금색 안광을 터트렸다.


“내가 바로 그의 유진(遺塵)을 이었다!”


옷자락이 너풀거리며, 발걸음이 전방을 빠르게 돌파했다. 땅에 진각이 실리고 몸이 급격히 제동된다. 그 순간 검로가 그어지며, 한 호흡 사이에 스물의 변초로 집약되었다.


무극검휘식(武極劍輝式)

변법(變法)

환화무궁(奐花無窮)


고매한 검객의 초식에 자신만의 재해석을 내놓았다. 칼의 잔상이 간극 안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끊임없는 내공의 진동이 몰아친다.


카앙.


허나 허망하게 튕겨 나갔다. 간결하게 휘두른 일격이 어지러운 검영(劍影)을 단숨에 지워냈다. 한소백은 검파를 쥔 손을 고쳤다. 달라진 기세로 사공자를 도발했다.


“내게로 오라.”


챙, 채앵!


칼울림이 뚜렷이 번진다. 호흡이 가빠진다. 밤하늘에 비해 암연한 지상. 그곳에서 희끗한 선이 명멸하듯 얽힌다.


짙은 고요와 적막을 오직 칼 부딪침만이 깨뜨렸다.


‘시선이 달라지니 그때의 감정을 완전히 재현할 수 없는 건가. 조금은 아쉽군.’


이전에는 치열했던 싸움이다. 열네 살의 한소백은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그래야만 내공과 체급, 시간의 격차를 메울 수 있었다.


카가강, 캉!


지금은 다르다. 여유로운 수비식이 필사적인 연격을 계속 막아댔다. 한소백은 나직이 읊조렸다.


“타인의 검리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라. 훌륭한 태도다. 이미 자질이 보여.”


그 말을 들은 사공자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분한지 공세에 감정이 담겼다. 검력이 극도로 강인해진다.


그마저도 한소백은 손쉽게 맞춰 나갔다. 이내 흥겨웠던 축제에 끝을 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결국 편법에 의지하는 것 아닌가. 역량에 맞지 않는 과분한 힘은 균열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화아─!


칼날에 별빛이 서린다. 머리칼이 잠깐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 질풍과 같은 속도로 빈틈을 별안간 파고든다. 그리고 단조로운 검격이 손목 부근을 쳐냈다.


캉!


갑작스러운 힘에 손이 풀렸다. 무심코 놓친 검이 밤하늘에 잠깐 떠올랐다. 이후 지면 위로 추락했다. 침묵이 오래도록 흘렸다.


이내 사공자가 털썩 주저앉는다.


“하아, 역시 안 되는 건가.”


눈을 감고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소백은 잔인한 위로를 건넸다.


“성취가 늘었다. 그때 축제에서 보인 검공보다 더 발전했어. 이미 동년배 수준은 넘었다.”

“흐하. 넌 나보다 어리다니까.”


귀공자의 체면 따윈 다 버린 걸까. 사공자는 기지개를 길게 켜며 땅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그의 동공 위로 휘황한 별빛이 담겼다.


“원 없이 놀았다. 이젠 미련이 없어.”

“···뭐?”


의미심장한 말에 한소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가문에 내 자리는 없거든. 외숙부도 그리 망신당하셨고, 나도 불똥 튀었고. 그나마 무당파라도 갈까 고민했는데, 영 아니겠더라고. 네가 큰 활약을 보였는데 너무 비교되잖아.”

“너, 설마···.”

“엄마랑 같이 상계에 가서 주판이나 튕길까. 이래 봬도 계산은 잘하거든. 어쩌면 처음부터 이 길이 아니었겠다.”


마음을 다잡은 목소리다. 사공자는 정말로 검객을 그만둘 심산이었다.


칼잡이가 칼을 놓는다니. 서글픈 이야기였다. 문득 누군가와 얼굴이 겹쳤다. 그도 한때는 유망한 검객이었으나, 칼을 놓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오해와 갈등의 시작은, 전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게 원인이리라.


“아쉽지는 않나?”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한때는 이 칼에 별빛을 품길 바랬거든. 만인이 존경하는 지고의 칼잡이가 되고 싶었지.”


감상적인 꿈은 또다른 누군가와 겹쳤다. 괜히 같은 성씨인 게 아닌 걸까. 참 신기한 우연이었다.


사공자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한소백은 땅에 떨어진 검을 집더니 그에게 던졌다.


“···왜?”

“칼을 쥐어라.”

“뭐?”


반문이 당황과 함께 섞여 울렸다. 입을 열어 의문을 제시하려는데, 한소백이 단호하게 잘라냈다. 확고에 찬 음성이었다.


“넌 칼을 쥘 자격이 있다. 내가 보증하마.”


옛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



진목교의 지부에서 겨우 탈출한 뒤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씨세가의 장원으로 도착했다. 코를 찌르는 죽음의 악취. 뭔가 이상하다.


한소백은 벽을 짚으며 비치적거렸다. 밤하늘로 어렴풋하게 상승하는 연기를 바라봤다.


현실감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며 정신없이 다가갈 때였다.


불현듯 애절한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깊은 별밤에 잠 못 이루건만, 들녘의 풀잎마저 소란스럽구나. 봄날 삭풍이 잔불을 꺼트리니. 어느새······


그날도 그랬다.


돌연 말을 멈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는 불룩하게 솟은 무덤이 있었다. 우울하고 불편하게 기댄 모습이었다.


한소백은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장원이 왜 폐허가···.

─왔나. 가출 한번 참 길군. 객사한 줄 알았어.


분명 어색한 사이였다. 하지만 생존자도 몇 안 남은 상황, 오랜만에 본 고향 동년배에게 반가움을 느낀 걸까. 사공자는 녹초가 된 몸으로 한소백을 친근하게 맞이했다.


그러자 한소백은 애꿎은 원망을 질렀다.


─이 개 같은 상황이 대체 뭐냐고!


넘실거리는 기파에 분노가 섞였다. 진정하라는 손짓이 펼쳐졌다. 사공자는 긴 날숨을 내뱉으며 담담히 설명했다.


─보면 모르나. 습격이다. 십이혼이 셋이나 왔어. 진목교, 흉마전, 만귀맹회. 잊지 마라. 우리가 복수할 대상이다.

─십이혼··· 그것도 셋이나···?


잔혹한 현실을 알려주듯, 사공자는 말했다.


─한씨세가는 이제 끝났다. 주력 고수 층 대부분이 몰살됐으니 멸문지화도 조만간이겠군. 네 아비의 무덤은 저기 있다.


아버지. 애증의 호칭이었다. 그때는 오해를 풀지 못했던 시기였으나, 한소백은 마음이 울적해졌다. 다급히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갈 때였다.


돌연 멈춰 섰다. 말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이내 힘겹게 동정의 질문을 건넸다.


─넌, 이곳에서 뭘 하는 거냐? 전부 다 죽었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스륵.


사공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횃불의 은은한 빛이 어둑한 시야를 거둬냈다. 칼이 꽂힌 무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솟아 있었다.


아직 무덤을 짓던 도중일까. 땅이 움푹 파헤쳐진 곳이 많았다. 둘둘 감긴 흰 천에서 시취가 흘러나왔다. 셀 수 없는 수였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관(棺)도 널브러져 있었다.


사공자는 피로에 적셔진 목소리로 말했다.


─관을 새로 맞추고 있었어. 한꺼번에 매장하기에는 좀 그렇잖아. 나라도 해야지.

─그러니까 대체 왜.


순간 흠칫했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핏대를 세운 사공자의 몰골이 몹시도 억세면서도 구슬펐다. 그리고 목청에 힘을 짜낸다. 결연한 음성이 퍼진다.


─최후까지 가솔을 보살피는 것. 직계라면 응당 가져야 할 책임감이다.


한씨세가 사공자 한하진.

홀로 우두커니 남아, 직계의 의무를 다하는 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

···



“하아.”


불편한 회상에서 깨어난다. 한소백은 정면을 쳐다봤다.


“자신이 쓸모가 없다고 여긴다라. 너무 자조적이군. 세상을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어. 필히 부족한 사회 경험 탓이겠지.”

“···나보다 어린 게 연륜을 운운한다고?”


한하진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저벅.


한소백은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가치는 역량과 무관하다. 힘이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세간에 칭송받아도, 정작 위급한 순간이 오면 불의를 외면하는 자가 많지.”


반면 모든 상황이 열악해도 자신의 기치를 관철하는 자도 있다. 마땅히 존경받을 만했다.


시선이 꽂힌다. 그 끝에는 사공자 한하진이 있었다.


“칼질의 시기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칼잡이다.”

“상냥한 위로 고맙다. 하지만 난 무능하고 그런 거창한 신념도 없어. 칼질도 변변찮고.”


한하진은 자책하며 중얼거렸다.


“나이를 떠나서 형제 중에 가장 재능도 뒤처져.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더라고···.”

“널린 게 칼잡이인데 가르쳐줄 사람이야 많지 않나.”

“이미 재능 없다고 욕먹은 지 오래다. 다들 날 꺼리지. 자기 수련 시간만 아깝다고. 내 신분을 악용해 폐만 끼치는 거야.”

“글쎄. 세상을 너무 왜곡해서 보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마음이 정 불편하다면······.”


한소백이 잠시 눈치를 살폈다. 괜히 자존감을 건드릴까 우려되었다. 끝내 말을 이었다.


떠나는 칼잡이를 결연하게 붙잡는다.


“내가 칼을 가르쳐주마.”

“···뭐?”


한하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가 자신감 있게 들려왔다.


“별빛을 담겠다는 그 꿈, 같이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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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공자 (2) 24.08.21 570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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