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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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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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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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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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과 칼의 노래

DUMMY

“여긴···.”


다정한 목소리가 소년을 반겨주었다.


“일어났니?”


한대명은 제 아들을 보며 눈매를 구부렸다. 이해타산적인 면모도, 냉철한 시선도 없이 그저 싱그럽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음을 보낸다. 비몽사몽해서 들을 수 없었다. 굳이 엿듣고 싶지도 않았고.


“···몸은 어떠세요? 분명 옆구리가 찢겼는데.”

“썩 괜찮단다. 제상단을 넉넉히 세 알이나 훔쳐왔다고 말했잖니. 눈치 보면서 몰래 먹으니까 금방 낫더라.”


주먹이 가슴을 두드렸다. 괜한 걱정 말라는 행동이었다. 이내 한대명은 손날을 세우며 수줍게 소곤거렸다.


“아직 한 알 더 남았단다. 가문에서는 그날 다 삼킨 줄 알고 있어. 네가 갖고 있다가 유용히 쓰렴.”

“그거 좋은데요?”


두 부자는 징그러운 미소를 씨익 지었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꽃이 피는데, 얼마 안가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정말, 다행이네요···.”


울먹거림이 낯설게 들려온다. 오래도록 멎었던 눈물이, 한 방울 고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를, 잃는 줄 알았어요. 이번에는 꼭 구할 거라고 맹세했는데. 제 불찰로 허무하게 바스러질 뻔했어요······.”

“약한 소리하지 마렴. 네 아비가 누구냐. 딱 한 번이지만 용봉지회를 제패한 독불마검이다.”


자식 앞에서 부모는 무적이다.

그리 몇 번이고 설명해줘도 터져 나온 죄책감이 전부 위로되진 않았다.


“그래도 화가 나요. 아버지의 중상을 그저 바라만 봐야했던 제 무력함에, 그 상황까지 치닫게 한 어리석은 행동에···.”


한소백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왜 항상 이렇게 끝나는 걸까요. 억울한 처지에 있는 힘껏 발버둥칠수록, 상황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질척한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에요···.”

“소백아, 넌 최선을 다했단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어. 그저 운이 안 따라줬을 뿐이지.”

“아니요. 저는 몹시도 오만했어요.”


자조적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과거로 돌아와 지난 날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 어리석게도 무모한 행동을 일삼은 거죠.”


천하의 중심이자 시대의 주역.

하늘에게 선택받은 자.


청선을 수하로 회유할 때 말했던 건방진 언행은 어느 정도 진심이기도 했다. 은연중에 거만한 성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꺼낸 거다.


“전 검마 시절의 막강한 힘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믿은 거예요. 강함에 심취해 제 역량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거죠.”

“······.”

“결국 그 독불장군과 같은 방식은, 저보다 더 강한 자들한테 막히고 말았어요.”


천흉.


그 빌어먹을 자에게서 받은 굴욕감을 잊을 수 없다. 회귀 후 처음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여실히 체감했다.


“천흉이 지껄였어요. 강호란 강자의 세계이며, 강자의 뜻이 곧 운명이라고. 힘없는 자들은 커다란 물결에 휩쓸려 침몰한다고.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말이 맞았어요.”


인간을 초월한 괴력난신들.

손짓 한번에 평범한 사람을 낙엽처럼 날려보내는 풍랑을 지녔다. 자연재해와 같았다. 느닷없이 찾아와 불행을 뿌리고 다닌다.


대다수의 약자는 그들의 변덕과 충동에 인생을 휘둘리며 살아야 한다. 타개책은 없었다. 그저 또 다른 강자의 아량에 기대어야 할 뿐.


한소백도 그 비참한 운명의 피해자이며.

어느 때에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절망적인 격차였어요. 부끄럽게도 전 저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방자하게 군 주제에, 막상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오자 무력하게 당할 뿐이었어요. 분명히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도 말이에요.”


천흉, 지흉, 인흉.

그리고 흉마전의 주인까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내를 잃고 복수귀가 된 귀월객은, 최후만큼은 잊었던 신념을 지키고자 목숨을 불태웠다. 그의 희생 덕분에 도망치고 전음을 보낼 시간을 얻었다.


첩정대의 무인도 있었다.

그들이 견고하게 지은 전음 연결망 덕분에 제때, 구원 같은 지원을 누릴 수 있었다.


아버지, 한대명.

위치를 어떻게 알아낸 걸까. 아들의 위급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온 그는, 기적을 빚어냈다.


율법당, 천검단의 칼잡이도 빼놓을 수 없었으며.

한씨가주라는 절대자의 호의에 마지막 난관마저 극복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절대 헤쳐나갈 수 없었겠죠. 미약할지라도, 작은 물줄기가 모이고 모여 거대한 물결을 완성한 거예요. 흉마전의 마인들한테도 해당되는 일이에요.”

“그들한테도?”

“예. 제가 강함을 맹신해 더 강한 괴물들에게 짓밟혈듯, 그들 또한 오만불손한 행패를 똑같이 돌려받은 거죠.”


약육강식의 굴레.

누군가한테 강자인 존재도, 언제든 약자로서 입장이 뒤바뀐다. 강호의 잔혹한 법칙이었다.


미력한 개인은 이 고단한 시련을 어찌 이겨낼 수 있는가.

검마, 한소백은 이미 그 답을 알았다.


“별이 홀로 존재해선 어둑한 밤을 밝혀낼 수 없듯,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이 땅에 도달하기까지 아득한 거리를 주파해야 하는 빛은, 관측자한테는 어렴풋하게 와닿을 뿐이다.


희미한 별빛도 삶과 동일했다.


혼자일 때는 그저 미미하게 기억될지라도.

별과 별이 이어져, 별자리가 맺어지고.

무수한 별자리가 밤하늘을 가득 채워, 마침내 별밤이 완성된다.


“전 더 이상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예요.”


늙은 소년이, 미친 칼잡이가 눈을 빛냈다.


“거대한 운명이 나를 맞이한다면, 외롭게 맞서지 않고 함께 무찌를 거예요.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


당당한 선언에 한대명이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따뜻한 말을 보낸다.


“많이 컸구나. 우리 아들.”


따뜻한 포옹이 부자의 체온을 오래도록 느끼게 해주었다. 너무 긴 시간이어서 괜히 낯간지러울 정도였다.


흠흠, 헛기침한 한소백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죠?”


그의 거처가 아니었다. 낯선 침소에 줄곧 누워있었다. 잠든 사이 이사라도 한 걸까.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더 커졌다.


“가주전(家主殿)이란다.”

“가주전이요? 제가 왜.”


한소백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한대명은 의뭉스러운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축하 행사란다. 기억이 나질 않는 거니?”


언뜻 떠오르다가 만다. 지난 생에서 치른 온갖 시련에 비해 한씨세가의 비중은 몹시 적었다. 절세고수로 등극하기 이전이어서 기억은 더욱 희미했다.


“한씨세가에서는 첫 순간을 축하해주는 전통이 있지. 여러 번이란다.”


칼을 쥔 아이에게는 숫돌을 선물한다.

인생의 동반자를 스스로 잘 관리하라는 의미다.


“검기를 처음으로 피어낸다면, 그 예기를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칼집을 선물하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칼날에 별빛을 담아낸 지고의 검객에게는 어떠한 방식으로 축하해줘야 할까.”


한대명이 다가와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이끌림에 따라 한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자, 아들아. 축하한다.”


드르륵, 문이 열린다.

한소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가주. 무림세가라는 울타리에서는 만인지상의 자리와 같았다. 그 격에 맞추듯 가주전은 특별히 높게 지어졌다. 군림하여 굽어살피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확 트인 전경이 눈동자 위로 담겼다. 넓은 터에는 수없는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밤그늘 사이로 언뜻 얼굴이 비친다.


일공녀 한백린이 보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할 때, 낭랑한 노랫말이 동시적으로 합창되었다.


─깊은 별밤에 잠 못 이루건만[深星夜不眠].


형 한유백, 숙부 한적영. 그리고 청선과 첩정대 무사들. 사공자와 교관 백무영도 보였다.

또한 좋은 인연만이 모인 게 아니다.


─들녘의 풀잎마저 소란스럽구나[野草枼騷亂].


대공자와 삼공자, 이공녀는 물론.

심지어 수모를 당한 이공자와 둘째 부인, 검사부 남궁묵경, 금휘검객 같이 나쁜 관계도 있었다.


─봄날 삭풍이 잔불을 꺼트리니[春朔風熄滅].


그 밖에도 무수했다.


첫째 부인, 셋째 부인. 명현진인과 현료, 그 외 무당파 제자들. 임유광과 엄석궁. 검극대주, 검신대주, 검파대주를 비롯한 천검단 칼잡이. 그리고 성위단이나 율법당, 연삭전의 수습검주들부터.


방계와 식객의 아이들과 하인, 식모까지.

한씨 성을 달든, 달지 않든. 한씨세가를 보금자리로 삼은 모든 이들이 모였다.


대총관 위지연도 뒤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칼날에 별빛이 담겼네[劍身含星光].


화아아─!


칼날이 아스라이 발광한다.


검광과 검기의 발현이었다. 쓸 줄 모르는 이들도 수수한 칼날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아이들이 환하게 웃듯, 한데 합쳐진 빛무리는 눈부시게 커져만 갔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구름을 잠시 빌려와, 지상에 찬연히 장식한 모양새였다.


“아직 끝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계단 위로 두 명의 남녀가 천천히 걸어왔다.


천검단주와 성위단주.

한씨세가의 초고수들이었다. 그들이 고아한 몸가짐으로 도달해, 칼날에 별을 주입했다.


화아앗!


검강이 오색찬란하게 피어오른다. 의전(儀典)의 마무리와도 같은 모습. 허나 선조의 노랫가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구름에 가려 달은 보이지 않고[遮雲月不見].


대부분 일절(一節)로 끝나지만.

오래도록 내려오던 노랫말에 누군가 첨언했다.


─밤이 지나면 빛은 스러지겠지만[夜過光減弱].


화자의 사연에 안타까워하기라도 한 걸까.

암울한 이야기의 완결을 거부한다. 대신 빛나는 미래를 노래해, 전해들을 후손들을 고무해준다.


다음과 같은 낭랑한 구절로.


─그 검에 새긴 순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刻劍上瞬間 永遠抹不掉].


별빛과 칼의 노래가 끝맺어졌다.


천하가 몹시 길다. 한때의 영예도 오랜 세월로 사토에 묻힌다. 칼잡이의 시간은 턱없이 짧겠지만, 남겨진 일생은 밤하늘에 걸려, 불멸의 기록으로써 새겨지리라.


“······.”


고즈넉한 침묵이 오래도록 돈다. 땅에 도래한 사람의 별구름마저 그쳤다. 불현듯 인기척도 없이, 어느새 한씨가주가 코앞에 나타났다.


“사 년만에 별빛을 품은 검객이 나타났다.”


한씨가주와 한소백이 눈을 마주쳤다.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현실감 없게 다가왔다. 가주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니.


“칼의 아이여, 넌 어떤 별빛을 품었지?”


그 물음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때의 포부가 떠오른다.


아버지와 거하게 싸우고 가출한 날이었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아도, 붙잡는 손길이 없어 원망만 더욱 커져만 갔다. 한없이 달음질했다.


그러다가 드넓은 들판 위에 맨발로 누워, 광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꽃잎처럼 흐드러지게 피며, 뚜렷이 한소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질문에 답했다.


“지키겠습니다.”

“무엇을?”


반문에 무심코 고개를 들자 별이 생동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씨세가가 눈에 띄었다. 허허롭지 않고 그득하다.


한때 진절머리가 났던 가문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애틋한 감정이 싹 텄다.


“소중한 광경을 기필코 지키겠습니다.”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자신 있나.”

“예.”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올곧은 칼끝이 밤하늘 아래, 천하를 가리켰다.


그날, 별을 관중 삼아 분명히 선언했다.

천하 모든 칼잡이가 선망하는 지고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칼날에 별하늘을 담겠습니다.”


우우웅─


검날에 묻은 빛이 밤그늘 아래에서 부끄럼 없이 물결쳤다. 미숙한 복수심에 매몰되지 않는다. 별빛을 담겠다던 포부는 여전히 확고했다.


검마란 오명도 더 이상 없다. 수치심으로 점철된 회한을 품에서 내려놓는다.

어린 날의 꿈을, 진정으로 원했던 별호를 내뱉는다.


“저는 검성(劍星)으로 기억될 겁니다.”


망상도 허언도 아닌, 증명할 자신이 있는 확고한 장담. 무려 삼십여 년의 방황을 거쳐, 마침내 칼잡이의 품위를 깨달은 검마(劍魔)가 그리 선언했다.


기나긴 소년기의 끝이 저문다.

별밤이 지나면 다시 밝은 아침이 찾아오겠지.


별빛의 칼잡이는 검에 어떠한 순간을 새길 것인가. 별은 늘 그랬듯, 응원을 보내며 유난스럽게 반짝거렸다.


검마회귀(劍魔回歸).


작가의말

노래 후반부를 대신 작성해주신 의문의 작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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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격전 24.08.31 467 6 16쪽
32 집결 24.08.30 453 6 16쪽
31 그래도··· 24.08.29 448 9 16쪽
30 강호는 잔혹하다 24.08.29 446 6 12쪽
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66 7 17쪽
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5 9 16쪽
26 혈령탄 24.08.24 499 8 13쪽
25 가르침 (2) 24.08.23 560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61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69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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