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유휘.
작품등록일 :
2024.07.11 11:26
최근연재일 :
2024.09.16 13:20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31,654
추천수 :
520
글자수 :
291,945

작성
24.08.26 23:58
조회
510
추천
10
글자
18쪽

복수는 미숙하고

DUMMY

후웅.


도끼가 바람을 찢었다. 어깨를 노리는 일격은 허초였다. 돌연 궤적이 훅 꺾이며 허벅지로 내리꽂힌다. 동시에 무형의 발경력이 격렬한 울림을 터트렸다.


콰콰콱!


여파만으로도 대지가 갈라졌다. 고열의 내공력 탓에 아지랑이마저 피어올랐다. 간발의 차이로 피한 순간, 귀월객이 도깨비처럼 소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카앙!


검에서 움튼 경파가 도끼를 튕겨냈다. 허나 상대는 쌍수를 도끼로 무장한 자였다. 박자를 엇나가는 연격이 곡선을 그리며 뻗쳤다.


‘쌍수호박(雙手互搏)의 경지라. 고된 숙련으로 습득하거나, 혹은 천부적으로 사고 분리에 능해야지. 특히나 도끼를 사용한다면 말이야.’


강호에 쌍검을 연마하는 자가 드문 이유기도 했다.


한평생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다. 두 자루의 병기를 동시에 다루는 자는 투로가 엉키며 스스로 옭아매는 일이 흔했다. 어설픈 이해와 숙련도는 한 자루의 무기만도 못한 것이다.


‘허나 그 약점을 극복하고 무공에 능통하게 된다면···.’


단신으로 수 명분의 역할을 해내리라.


쩌정!


칼과 도끼가 부딪치는 소리는 단발적이었다. 오롯이 전력을 다할 수가 없다. 검력의 배분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생기는 순간, 회수는 늦어지고 반대 손에서 벼락같은 도끼질이 이어질 것이다.


캉, 카캉, 캉!


흰 궤적이 어슴푸레하게 연속된다. 굵고 짧은 충격파가 대기를 수 차례 가격하고, 선명한 불티가 튀어 오른다.


오직 공격 일변도.


삶을 다 포기한 야수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살점을 내주면서도 거칠게 달려오며 간합을 좁혔다. 신체 전반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후웅.


손아귀에 힘을 풀어 도끼를 던지고, 그 틈을 타 각법을 펼친다. 하체를 둔탁하게 치는 발길질. 도끼를 튕겨내고 반격의 검격을 내뻗고자 하는 순간, 또 다른 도끼가 매섭게 짓쳐 왔다.


‘과연 탐나는 재능이야. 아직 성장할 수 있어.’


챙, 스앙!


부격이 가로막히자 귀월객의 상체가 쓰러질 듯 기울어졌다. 의도한 노림수였다. 하늘에 잠시 체공한 도끼를 낚아채고 횡으로 긋는다.


모든 공세가 그야말로 예측불허, 까다로운 난전이었다.


월법요령기(鉞法搖鈴技)


귀월객의 독문무공. 혼자만 익숙한 전투 방식으로 교전을 통제한다. 도끼를 잠시간 버려 근접 박투를 벌인 뒤, 다시 회수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손끝을 미세하게 움직여, 찰나에 간합을 늘리는 초절기예까지 선보인다.


‘몹시 대단해. 하지만···.’


한소백의 눈빛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겨울바람을 담은 듯한 안광이다.


“결국 상대의 당황을 바라는 요행이지 않나.”

“···네놈.”


너저분한 전투는 지고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귀월객은 고작해야 상승고수. 한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기에 충분하지만, 펼치는 무예의 규모 자체가 협소했다.


지형지물을 파괴하고 상리에서 벗어나는 이적을 선보이진 못한다. 그 말인즉슨, 불규칙적인 투로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


우웅, 우우웅!!


기감이 동작을 탐지하고, 뇌리가 빠르게 요동친다. 그렇게 새겨지는 건 한 편의 그림. 한소백이 심중에 품은 검흔도였다.


모든 투로가 상정 내에 진입하고, 규칙성을 파악한 지 오래다. 그야말로 예지의 영역.


“복수귀여, 편히 잠들어라.”


칼날이 두 도끼를 동시에 쳐내고, 귀신 같은 금나수가 손목을 제압한다. 이내 정방으로 내디딘 보법이 간극의 핵심을 점했다.


그리고 호흡이 끊기며 순간의 절초가 준비를 끝마쳤다. 시퍼런 칼 궤적이 혜성의 꼬리처럼 잔상을 남긴다.


스아아앙!


직격이었다. 귀월객의 상체를 크게 베었다. 근육은 파열되고 진한 피보라가 뜨겁게 솟구친다.


저벅.


발걸음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진다. 어둑한 음영이 처량하게 쓰러진 복수귀를 내려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귀월객이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피를 울컥 토하며 한이 서린 듯 한소백을 바라봤다.


“나를 왜 살린 거냐, 대체 왜!”


몸은 움직일 수 없으나 치명상은 면했다. 제때 치료만 해도 얼마 안 가 회복을 끝마칠 테다.


삶을 내려놓은 탓일까. 귀월객은 연명했어도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복수귀의 면모가 퇴색되었다.


“전에 약조하지 않았나. 복수에 걸림돌이 된다면 망설임 없이 베겠다고.”


탁, 납검과 함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그저 지나치는 길이야.”

“하, 하.”


귀월객은 상흔 부위를 왼손으로 압박한 채, 오른손으로는 이마를 짚었다. 자괴감 가득한 표정이 그려지며 짧은 한탄이 이루어졌다.


“내 평생의 각오가 이토록 얄팍했던 건가···.”

“그럴 리가. 단지 부딪힐 필요가 없었을 뿐.”

“광오한 포용력을 지녔군. 나 같은 인간에게마저 동정심을 품다니.”


짧은 적막이 끝나고, 말문이 힘겹게 열렸다. 귀월객은 노곤한 목소리로 인생사를 읊었다.


“서른 살이었지. 혼기가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쯤 그녀를 만났어. 개울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는데, 그 모습조차도 아주 아름다웠지.”


정파 협객과 흉마전 사마외도의 만남이었다.


“서둘러 치료해주고 몇날 며칠을 곁에서 간병했어. 자신의 신분이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부상에 대해 늘 어물쩍거렸지. 그녀가 마인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정파 무림인들이 근방까지 거리를 좁혀왔어.”

“신고할 생각은 없었나.”

“그럴 리가. 부부의 연은 운명으로써 정해진 게 틀림없다. 난 이미 그녀에게 사로잡힌 뒤였어. 처음에는 같은 정파 동도들을 설득하다가, 결국 무림공적으로 싸잡혀 함께 도주했지.”


때마침 귀월객도 낭인 출신 협객으로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환요마녀(幻妖魔女)는 십이혼의 유망한 후기지수. 두 사람의 금지된 사랑은 세간을 들썩이게 했다.


“도피 생활은 꿈결만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어. 언제 추격자가 올지 전전긍긍하면서도, 오순도순 사랑을 속삭였지. 그래, 그 빌어먹을 한군악만 아니었어도···!”


한씨가주가 환요마녀를 척살했다.

어째서인지 강호에는 그리 알려졌다.


“그 뒤, 난 그녀의 무덤 앞에서 맹세했다.”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적빛 광기를 표출하였다. 뜨거운 열기가 선명하게 와닿는다.


“내 혼과 육이 바스러질지라도. 그녀의 밝은 미소를 앗아간 한씨가주를, 갈기갈기 찢어 수백 송이 꽃 대신에 바치겠노라고.”


복수는 맹세를 불렀다.

일평생을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했다.

결국 저 복수귀는 그 맹세조차 지키지 못한 채, 끝없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복수심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것도 잔혹한 일이지. 어찌해야 할지···.’


비슷한 처지에, 그의 진심을 두 번이나 목도한 탓인지 한소백은 심경이 어수선해졌다. 무엇이 옳은 선택일지 고민하는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버지가 환요마녀를 죽였다고? 그딴 헛소리를 믿기는. 넌 속은 거다, 멍청한 복수귀야.”

“···너, 한군악의 혈육이었나. 그래, 얼굴에 그 흔적이 설핏 보이는군.”


귀월객이 으르렁거리자 사공자가 물었다.


“너, 우리 아버지와 대화해본 적은 있나. 제대로 알고 복수심을 품은 거냐고.”

“무슨 대화.”


섬뜩한 음성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몹시도 공포스럽다. 상승고수란 한 지역의 문주로서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수준. 살의가 묻은 기백은 한낱 소년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공자는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유감이지만, 아버지는 사람 안 죽여.”

“헛소리를.”

“맹세컨대 사실이야.”

“뭐?”


귀월객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자 불현듯 목에 칼날이 겨누어졌다. 잠시나마 얻은 대화의 시간.


사공자는 다부지게 말했다.


“아버지는 검신교주와 내기를 했어. 활검(活劍)이 과연 존재하는지, 누가 먼저 도달할지 말이야. 그것을 위해 우선 살생을 관두는 식으로 접근했지.”

“활검···? 살생을 관둬?”


검은 비정하다. 살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구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가. 살린다고 한들, 결국 누군가를 베어 얻어낸 구명(救命)이 아닌가.


사람을 살리는 칼질.

지난 수천 년 무(武)의 역사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 존재부터가 불분명한 형이상학적 개념이자 기예였다.


‘검신교주와 한씨가주가 내기를 벌였다고?’


흥미로운 정보에 한소백이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그를 증빙하듯 어떤 기억도 떠올랐다. 그 전에 앞에서 사공자가 부연했다.


“환요마녀가 죽은 게 벌써 오 년이 지났나. 그때는 이미 불살의 수행에 들어가신 지 오래야. 대체 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된 미명으로 날 속이지 마라! 소림의 무승조차 완전한 불살을 행할 수가 없다. 무림세가의 가주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물론 위급한 순간에, 동등한 실력의 절세고수를 만난다면 아버지께서는 불살을 깨실 수도 있지.”


확고한 장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네 아내는 아버지의 기준에서는 하수야. 죽일 가치도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지.”


귀월객이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


“넌 그놈의 혈육이니까 두둔하는 거겠지.”

“아니, 그렇지 않다.”


한소백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증거는 지난 생에 이미 존재했다. 한씨가주와 대면하고 이루어졌던 수많은 문답 중에 말이다.


─활검을 포기한 건, 그날 이후다. 생사결조차 없었지. 잡스러운 일에 얽힐 필요도 없다.


비유인 줄 알았다. 허나 활검이라는 정확한 단어가 그의 입에서 언급되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지. 한씨가주가 활검을 연마한 건 사실이다.”

“무슨··· 그럴 리가.”

“귀월객, 몹시 잔인한 말이지만··· 그동안 넌 길을 단단히 잘못 들었다. 애꿎은 복수 대상을 정했어.”


곧장 받아들이리라 여기진 않았다.

평생의 숙원과 목표를 순간에 부정당한 기분은 형언할 수 없으리라.


헌데 무슨 영문일까. 의외로 귀월객은 순순하게 믿는 듯했다.


“내 복수는, 그동안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은··· 이 손에 묻힌 피는 어떻게 되는 거지?”


펼쳐진 손바닥이 부들부들 떨렸다. 귀월객은 서글픈 눈동자로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부정은 뒤늦게 일어났다.


“아니야, 아니다.”


귀월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방, 하오문, 패걸방. 강호 모든 정보집단이 분명 한씨가주가 흉수라고 가리켰어. 여화의 몸에 난 검흔이 한씨가주의 것이라고.”

“정말로 그리 말하던가? 네 좋을 대로 걸러들은 건 아니고?”

“그 입 다물어!”


현실을 일깨워주듯 사공자가 말했다.


“설령 아버지가 살생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해도, 월등한 수준 차이가 나면 단칼에 베였겠지. 상흔을 몇 번이고 새기며 고전할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한소백이 다시금 개입하며 외쳤다.


“누군가가 널 속인 거다.”

“나를 속여?”

“곰곰이 되짚어봐라. 위화감이나 의문점이 든 부분이 있을 거다. 누가 네 복수를 부추겼지? 정보를 알려준 이는? 도움을 빌미로 너를 이용해 이득을 챙긴 자들은 누구냔 말이다!”


회귀자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진정한 원흉은 누구인지, 중간에 조작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귀월객을 흔들었다.


다행히도 통한 듯했다.


“난 , 난···.”


귀월객이 안면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얼마나 무의미한 살행을···.”


복수는 실로 미숙했다.

진정한 원수조차 모르며, 신념을 접고 오랜 기간 방황하던 자가 여기 있다.


“어쩌면 은연중에 짐작했던 것 같기도 해··· 뭔가 이상하다고. 헌데도 난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어.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봐 두려워서.”


복수의 대상조차 제대로 몰랐던 병신.

마냥 그리 책망할 순 없었다.


“삶의 원동력을 잃으니 더럽게 허망하군. 아내를 위한 행동이라며 악행을 합리화하며 살았어. 이젠 그조차 무가치하구나···.”


진실을 깨달은 자는 몹시도 피로해 보였다.


“난 불확실한 허상 대신, 확실한 복수 대상을 원했던 거야. 눈이 멀고 만 거지.”

“귀월객.”

“뒤늦게 염치를 깨달았으니, 이제 무의미한 시간과 기나긴 죄의 끝을 맞이해야겠다.”


죽은 눈동자였다.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 귀월객은 축 늘어진 채로 앉아있다가, 도끼를 목에 걸쳤다. 그 충동적인 자결을 한소백은 바로 제지했다.


“조장,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청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백은 천천히 귀월객의 손에 쥔 도끼를 빼앗고, 일대에 기막을 펼쳤다. 여기서 나눈 대화는 밖으로 퍼지지 않으리라.


“말리지 마라. 내 억지로 인해 죽은 자가 너무 많다. 수치스러울 뿐이야.”

“부끄러움에 자결하는 건, 그저 죄에서 도망치는 거다. 숱하게 죽어 나간 영혼을 고작 목 하나로 대신하지 마라.”


흠칫.


귀월객이 몸을 떨었다.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거냐···.”

“아직 할 일 남았잖아. 복수가 인생의 전부인 것마냥 굴던 놈이 왜 그러지? 원수가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거다.”

“이제 와서 진실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적은 교활했어.”

“한씨가주를 죽이겠다는 건 승산이 있었고?”


한소백은 질타하듯 말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어. 타인의 손을 빌려 복수를 행하려고 하다니. 그것도 하필 지독한 마인놈들을 믿나? 그들에게 이용당해 손에 피를 묻히니 완전히 망가지고 만 거다.”

“나 혼자서 해낼 수 없었어! 정파 무림에서 버림받은 와중에 선택지도 그것밖에 없었다!”


귀월객이 울컥하며 소리칠 때였다. 불현듯 나직하고 엄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목교, 흉마전, 만귀맹회.”

“···뭐?”

“내 복수 대상이다. 그리고 저게 끝이 아니지. 그 외에도 무수한 악연이 있다.”


귀월객은 놀라며 물었다.


“십이혼을 셋이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말로 그들 전부를 감당하려고?”

“그래, 승산은 없어 보이지.”


맑은 눈동자가 확고한 선언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번은 필승이다. 꼭 그리 만들 거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한소백은 외쳤다.


“지켜야 하니까.”

“······.”


귀월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열광적인 목소리가 고조되어 터져 나왔다.


“원수를 찾고 싶다? 내가 같이 찾아주지. 복수할 힘이 없다? 내가 강하게 만들어주지. 난 충분히 그럴 힘과 능력이 된다.”


도움의 손길이 귀월객에게 뻗어졌다.


“하다못해 살아갈 의지조차 없다면, 차라리 나의 복수를 도와라.”


검마는 더 이상 복수에 매몰되지 않았다.

귀월객과 달리 지켜야 할 이들이 있기에, 눈앞에 과분한 행복이 있어서 눈이 멀 이유가 없다.


허나 멸문지화의 날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한소백은 나름대로 최선의 대비를 다했다.


한대명과 오해를 풀고, 회귀라는 거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적대했던 자들을 아군으로 만들고, 삼류 문파를 흡수하며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운명을 바꾸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럼에도 확신은 없어.’


삼 년 후 한씨세가의 존속 여부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운명은 아직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귀월객이 좋은 질문을 던졌다.


“나를 이렇게까지 설득하는 이유가 뭐지···?”


첫 복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귀월객을 떠나보낸다면, 빌어먹을 옛 운명에 수긍하고, 답습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운명은 차근차근 바꿔나가는 거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당신이다.’


복수귀로 생을 마감한 귀월객.

이 사람의 삶을 바꿔낸다면,

막막하고 답 없는 운명에서 첫 번째 승리를 따냈다며 축배를 들 수 있으리라.


“후회로 점철된 지난 삶을 청산하는 거다. 복수도 새롭게 꿈꾸자. 혼자만 끙끙 앓으며 지치지 말고, 함께 달리는 거다.”

“정녕, 내가 그래도 될까.”


죄책감을 완전히 버리란 얘기는 아니다. 잠시 떼어놓고, 충실한 삶을 보내며 속죄의 방법을 궁리하는 거다. 그렇게 훗날 떳떳하게 마주하는 거다. 미친 칼잡이 역시 그리 다짐했다.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에, 당신도 나를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다. 자, 이 손을 잡아.”


귀월객은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손이, 잡힌다.


────푸콱!


느려진 시간 속에서 붉고 축축한 꽃잎이 흩날렸다. 삿된 복수를 내려놓은 사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안 돼!”


한소백이 손을 잡으려고 했다. 살짝 닿는다.

그 순간 귀월객은 있는 힘껏 밀어냈다. 당황한 한소백은 그대로 밀려났다.


─오지마.


입술만이 움직였다.


파앙, 팡, 푸캉!


신체가 폭파하는 소리다. 잔인한 소음은 연속된다. 한 번의 바람 줄기가 관통할 때마다 귀월객의 몸이 격렬하게 휘청거렸다.


“귀월객!”


탄지신공은 아니다. 공기만 터졌다. 다음은 한소백을 노린다.


후웅, 쿠아앙!


검을 뽑고 공기의 탄알을 튕겨내었다. 그럼에도 팔다리를 비롯한 신체 말단 부위가 찢겨나갔다.


[본좌의 징치를 막아내다니. 어린놈이 예사롭지 않구나.]


육합전성의 울림이었다.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기 전에, 고압감이 먼저 들었다.


사박.


사뿐한 착지가 이루어지고, 흑백 장포가 나풀거렸다. 사십 줄 정도의 외관이었다. 피부는 깨끗한 편인데, 유독 이마에 주름이 깊었다.


[아, 구슬프도다. 사랑스러운 제자의 죽음에 가슴이 찢어질 듯해.]


과장스럽고 요악한 목소리였다.

슬픔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장난 같기만 했다. 그리고 저 괴물의 정체가 짐작이 갔다.


[죗값은 마땅히 필요하겠지.]


고강한 지법(指法)의 고수.

흉측한 사고방식의 마인.

언행마저 오만스러웠다. 이내 그는 잔혹한 선고를 내렸다.


[천벌은, 이 손끝에 있노라.]


우웅.


손가락 끝으로 빛무리가 집약되었다.


퍼엉, 펑. 퍼펑!


지풍(指風)이 연속적으로 쏘아졌다. 막강한 파괴력이었다. 몸을 벌집마냥 꿰뚫는다. 첫 번째 희생자는 청선. 옆구리가 터지며 살 파편이 휘날렸다. 그다음은 사공자. 갈비뼈가 부러지며 무력하게 쓰러졌다.


뒤늦은 도망마저 불가능했다. 퍼펑, 십여 명의 첩정대원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즉사. 그나마 멀리서 대기하던 인원만이 겨우 자리를 벗어났다.


흉마전 서열 삼 위의 초고수, 혈령탄의 스승.

이자의 정체는 바로, 천흉(天凶).


강호를 덮치는 거대한 물결의 출현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마회귀(劍魔回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오늘은 휴재입니다 24.09.02 38 0 -
공지 오전 중으로 두 편이 동시에 올라옵니다 24.08.29 347 0 -
45 원영신 NEW 22시간 전 222 4 20쪽
44 수련동 (2) 24.09.15 311 5 21쪽
43 수련동 24.09.13 336 4 17쪽
42 초감각 24.09.11 378 3 16쪽
41 한씨가주 (2) +1 24.09.10 407 6 12쪽
40 한씨가주 24.09.08 407 5 13쪽
39 삼공자 (2) 24.09.07 377 4 14쪽
38 삼공자 24.09.07 391 6 16쪽
37 명검주 승단 (2) +1 24.09.06 398 6 14쪽
36 명검주 승단 +2 24.09.04 421 6 13쪽
35 벌과 나비 24.09.03 445 4 14쪽
34 별빛과 칼의 노래 24.09.01 467 7 12쪽
33 격전 24.08.31 467 6 16쪽
32 집결 24.08.30 452 6 16쪽
31 그래도··· 24.08.29 448 9 16쪽
30 강호는 잔혹하다 24.08.29 445 6 12쪽
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65 7 17쪽
»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0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5 9 16쪽
26 혈령탄 24.08.24 499 8 13쪽
25 가르침 (2) 24.08.23 560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60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69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21 깨달음 24.08.19 651 11 14쪽
20 살생부 (2) 24.08.18 671 12 12쪽
19 살생부 24.08.17 662 13 13쪽
18 대공자 24.08.16 673 1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