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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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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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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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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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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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자

DUMMY

얼어붙은 듯한 시간. 강렬하게 쏘여오는 침중의 눈빛. 너무나 압권인 광경에 대공자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힘겹게 독백한다.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한 접근, 대담하게 밝힌 정체. 그리고 압도적인 무력과 단도직입적인 요구······. 실로 가관이군.”


누구라도 일단 주도권을 뺏길 수밖에 없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눈앞의 폭력과 기백이 매우 굉장했다.


“좋아, 나와 협상하려는 자네의 뜻은 알겠어. 그런데 참 의리가 없군. 백린이의 심복인 줄로 아는데 배신해오다니. 아니, 그 아이가 짠 계획인가?”

“제 독단이긴 한데, 공녀도 눈감아줄 거예요. 어차피 제가 당신을 도와도 손해볼 게 없거든요.”

“뭐?”


의자에 앉은 한소백은 다리를 꼬았다. 불량한 태도와 함께 담대한 계획이 술술 흘러나왔다.


“남궁세가를 등에 업은 이공자. 그리고 한씨세가 제일의 천재 삼공자. 둘만 없어져도 후계 구도가 상당히 유리해지죠.”

“······그렇군. 아린과 내가 손을 잡아, 타 후보를 먼저 떨어뜨린 뒤에 경쟁하자는 건가.”


대공자는 무심결에 애칭까지 꺼내며 중얼거렸다. 곧 의문을 제시했다.


“계획은 그렇다 치지. 하지만 네 호감을 얻는다고 다른 경쟁자를 견제할 수 있다고? 설득력 없는 궤변일 뿐이다. 장남으로서 쌓은 무수한 공을 뛰어넘을 만한 장점이 없어.”

“그건 차차 증명해 나가도록 하죠. 또 대공자나 일공녀나 둘 다 모친이 같지 않나요. 배다른 형제보다 둘이서 경쟁하는 게 낫지요. 첫째 부인도 좋아하실 테고요.”


잠자코 듣던 대공자가 고개를 저었다. 사뭇 서늘해진 눈길을 보냈다. 꽤나 용감했다.


“참으로 오만불손하구나. 힘으로 날 겁박하는데 그 제안을 순순히 응할 것 같나. 나쁜 인상이 단단히 박혔는데 말이지.”

“선의의 경쟁 중에 잠시 과격해질 수도 있는 법이죠. 전 살수도 맞이했는걸요. 대공자께서도 낮에 협박하셨으니 서로 주고받은 셈 치죠.”

“···그건 네가 먼저!”


아래로 펼쳐진 손이 대공자의 반발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리기까지 한다.


“싫다면야 이공자나 삼공자를 찾아가죠, 뭐. 그럼 대공자만 손해 보지 않나요.”

“미칠 대로 미쳤어. 그런 황당무계한 제안을 내가-”

“참 답답하게 구는군.”


말을 돌연 끊는다.


한소백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내 차가운 음성이 대공자의 열불을 압제했다.


“진짜 협박이 뭔지 보여줄 수 있는데.”


싹 바뀐 안색에 대공자는 굳었다. 거절하기엔 차마 두려운 기백. 한소백은 뚜렷하고 힘 있는 논리로 설파했다.


“난 가주직에 욕심 없어. 단, 명심해. 내 제안을 따르면 이공자와 삼공자보다는 우위에 설 수 있다는걸.”

“······.”

“손해 볼 거 없잖아? 일단 둘을 제치고, 그 뒤에 너랑 일공녀가 협상하든, 주사위를 굴리든 알아서 소가주 직을 정하든가 해.”


강압 때문에 말문이 막힌 대공자였다. 그는 공포를 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결정을 재촉하듯 유혹적인 입담이 귓전을 두들긴다.


“그리고 대국적으로 바라봐. 네가 가주가 된다면 날 등용할 수 있잖아. 그때쯤엔 한씨세가의 부흥에 내가 가장 크게 공로를 할 거다. 미리 호감을 산다고 생각해.”

“···참 대단한 자신감이군.”


한소백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강건한 목소리가 일대를 지배하듯 터져 나왔다.


“나를 적으로 삼을 건가, 아군으로 품을 건가. 설령 위험해 보이는 제안이어도 이용해라. 한씨가주의 뒤를 이을 자라면, 파도에 직접 몸을 던질 배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퍼졌다. 대공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몇 번의 고뇌가 거듭되다가 겨우 말했다.


“네 제안을 승낙하는 건··· 그저 괜찮은 거래이기 때문이다. 난 너한테 굴한 게 아니다.”

“예, 예.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상체를 살짝 숙이며 이루어지는 짧은 포권례. 저 과장스러운 언행에 기분이 언짢아진다. 대공자는 표정을 조금 구겼다.


“영약이 필요하다고 했나. 금명단급은 제조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거다. 당장은 요상용이나 보급용 영단 정도는 지원해줄 수 있어.”

“그건 알겠고, 뭐 더 없나요.”


뻔뻔한 요구에 대공자가 인상을 썼다. 그러자 한소백도 똑같이, 오히려 더 위하적으로 째려봤다. 꽁무니가 곧장 빼진다.


“···내가 검혼을 계승 받기 전에 쓰던 여분의 검이 있다. 능히 명검이라고 불릴 만하지.”

“또요.”

“허, 욕심도 많기는.”


한소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아직 몸이 연약한 편입니다. 언제나 다칠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아까 낮에 보니 귀한 걸 입으셨던데.”

“설마 천잠사(天蠶絲)로 지은 보의(寶衣)를 원하는 건가?! 그건 안 돼! 나 말고 아린이한테 부탁하거라!”

“이미 받았고요. 아시다시피 천잠사가 귀하잖아요. 열두 가닥밖에 없더라고요. 좀 더 모은 뒤에 새로 제작하고 싶거든요.”

“쯧! 그래 가져가라, 가져가!”


대공자는 벌떡 일어나서 수납장 쪽으로 향했다. 회백색 장포를 한소백에게 집어던진다. 못마땅한 투정이 이어질 때였다.


“혹시 더···.”

“으으아아악!”


차분한 모습은 어디 가고, 흥분에 찬 청년만이 있었다. 두려움 따위 잊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얼굴. 한소백은 낯짝에 철면피를 두를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불현듯 침소 안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이 열리며 발랄한 목소리가 터졌다.


“아부지!”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팔다리 짧은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대공자의 딸, 한유월이었다. 중원에서 스물여섯은 진작에 가정을 이룰 나이니, 아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계 한번 대단하군. 일부러 아이를 데려와 협상을 뒤덮으려고 하다니. 격분은 이를 위한 눈속임. 참 만만찮은 놈이다.’


전음도청으로 오가는 이야기는 진작에 꿰뚫었다. 한소백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였다.


“유월아, 무슨 일이니. 으차.”


대공자는 제 딸을 따스하게 안아 올렸다.


“저 잘생기신 분은 누구예요.”

“잔혹한 사마외도야. 멀리하는 게 좋단다. 정서적으로 타격을 입을 거야.”

“히이익. 무서워요!”


이미 속내는 읽혔다. 다만 훈훈하게 담소하는 부녀를 보자면, 괜스레 가슴이 충만해졌다.


“단란해 보이십니다.”

“내 둘뿐인 행복이지. 다른 행복은 용봉지회에서 만났던 아내고.”


피식 터지는 웃음. 대공자가 애처가이며, 가족에게 헌신하는 걸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조금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켜야 할 게 많은 자는 겁도 많거든. 자네가 최후의 선을 넘진 않았으면 좋겠네.”

“그럴 리가요.”


대공자는 딸의 등을 연신 토닥여댔다. 발걸음이 바깥을 향한다. 잠깐 멈칫하며 갑작스러운 덕담을 남겼다.


“네 아비도 그랬지. 자네 역시 조급해 보이고. 자꾸 무리한 수를 두는 건 그런 이유겠지.”


한소백은 흠칫했다. 난폭했던 지난 행적을 유심히 되짚었다. 그때 대공자가 작게 웃었다.


“그럼 난 이제 가보겠네. 딸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시간이거든.”

“편히 쉬십시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래, 나도 참 좋은 만남, 이었군.”

“별말씀을요.”


중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어투였다. 이쯤에서 헤어지려는 찰나, 대공자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머뭇거리다가 이내 말한다.


“잠깐, 기다려라.”

“뭡니까.”


볼 장 다 봤다고, 한소백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대공자의 가슴에 다시금 타오르는 열불. 젊은 나이건만 벌써 뒷골도 당겼다.


이런 놈을 믿어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대공자는 말문을 조심스레 뗐다.


“대총관, 그 불여우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아버님께서도 유일하게 건드리기 어려운 여자이니.”



* * *



여러모로 바쁜 나날이었다. 대공자와 일공녀, 둘을 만나는 것 외에도 많은 가솔과 인맥을 나눴다. 저번의 협상으로 영약도 추가로 섭취하여 체내에 적응시키고, 몸에 맞는 새로운 검법과 심법도 짜기 바빴다.


연무장으로 이동하는 와중, 웬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근래 네 방종이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다. 내 조카가 네 탓에 곤란한 일을 겪었다고.”


우람한 풍채의 미중년이었다. 턱선은 굵었고 목소리는 장엄했다. 전체적으로 묵직한 외관이었는데, 첨예한 기세를 칼끝처럼 무장했다.


은은하게 흐르는 공력 파장이 몹시 익숙했다. 결정적으로 직접 정체를 밝히기도 했고.


“대(大)남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응당한 책임을 질 각오는 되었는가.”


창검존(蒼劍尊) 남궁묵경(南宮默鏡)


남궁가주와 둘째 부인의 동생이며, 이공자의 외숙부 되는 자다. 초고수로 이름이 높았는데, 최근 이공자의 후계 싸움을 돕기 위해 한씨세가의 검사부로 왔다.


“본인이 자초한 일입니다. 그래도 패륜을 담은 언행은 아니지 않나요.”

“네 행보가 무례를 빚었기 때문이지. 백번 양보해서 조카가 잘못할 순 있다. 헌데 미천한 잡것이 박박 대드는 건 또 다른 문제지.”


넘실거리는 기파만으로도 강한 압박이 드리운다. 한소백은 식은땀을 흘리며 지껄였다.


“우선순위를 따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조카 교육이 제일 시급해 보이네요.”

“능멸의 혓바닥이라. 과연 시답잖은 것이 입은 살아있구나.”


남궁묵경은 중얼거리며 검파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하늘을 열어젖히는 듯 강맹한 발검이다. 개세적인 검압(劍壓)이 허공을 짓뭉갠다. 일검에 제왕의 위엄을 실은 자, 한때 가주 자리를 논했던 남궁세가의 직계혈족이다.


“무모한 객기는 대가를 치를 것이며, 불경한 날개는 철저히 짓밟히리라. 창천(蒼天)의 자유란 본디 그렇다. 제왕의 윤허가 필요하지.”


무수한 진동이 일대를 헤집어댔다. 전신마저 강하게 짓누른다. 천근만근의 무게를 감당하는 착각이 들었다. 아직 미흡한 경지를 지닌 자에겐, 몹시도 버거운 압박이었다.


단순히 기예로 떨칠 수 없다. 저것과 맞붙을 최소한의 체급이 필요했다.


으그극···


한소백은 이를 악물며 주변 진기를 통제했다. 그렇게 부담감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순간, 남궁묵경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제왕을 본 적이 있나. 경외하라.”


짙은 굴욕감이 찾아온다. 한소백이 눈을 부릅떴다. 파지직, 천겁흑뢰도의 묵빛 공력을 꺼낼지 망설일 때였다.


“내 아들한테서 꺼져.”


분노에 찬 목소리가 천공에 울려 퍼졌다.


남궁묵경이 고개를 돌렸다. 어슴푸레한 신형이 긴 거리를 답파하며 순간에 도착했다. 우레와 같은 검격까지 터트렸다.


쩌저저정!


두 자루의 검이 충돌하며, 대기가 급격하게 철렁였다. 불티가 수십 차례 명멸하고, 주변 지면이 거칠게 파헤쳐졌다. 그렇게 격렬히 한바탕하다가, 그을린 고랑이 길게 생겨났다.


먼지바람이 걷히고 드러난 낯익은 얼굴. 한대명은 못마땅해하며 중얼거렸다.


“제왕이라고 부르기엔 격이 다소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가주직도 못 단 패배자가 남의 집에서 웬 행패냐.”


이해타산의 고삐가 풀렸다. 거침없는 입담은 그야말로 아들과 판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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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66 8 17쪽
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6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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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르침 +1 24.08.22 561 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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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21 깨달음 24.08.19 652 1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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