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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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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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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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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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한씨가주

DUMMY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야심한 시각이었다. 일공녀 한백린이 남몰래 침소로 찾아왔다. 홍색 경장(輕裝) 밑으로 가녀린 몸선이 두드러졌다.


“단둘이 야밤에 밀회라. 이러면 설레는데.”

“헛소리할 거면 잠이나 자던가.”


가벼운 농담이었다. 한소백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눈매는 얼음처럼 차분했다.


찾아온 목적은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큰 오라버니까지는 괜찮았어. 어차피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으니. 하진이도 후계자 후보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고. 하지만 삼공자까지? 이건 아니야.”


삼공자와의 동맹. 직접적으로 설명하진 않았지만 모종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명목상으로는 일공녀의 편인 만큼, 그녀에게는 몹시 불쾌할 일이었다.


“한세형은 남궁세가를 뒷배로 뒀지만 순전히 무능하고 우둔해서 신경 쓸 바 없어. 반면에 삼공자는 큰 오라버니보다 유력한, 가장 소가주에 가까운 후보지. 전부 동맹으로 만들면 뭐 어쩌겠다는 거야?”

“처음부터 그런 거래긴 했지. 대공자와 힘을 합쳐서 우선적으로 이공자와 삼공자를 배척하겠다고. 하지만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번 무너진 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다. 괜히 둘러대면서 신뢰를 깎기보다는 솔직히 말하는 편이 좋았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삼공자 백혼은 한씨세가의 직계가 아니야.”

“사생아? 그거 당연한 소리를. 걔 처음 본 것도 여덟 살 때부터였는데.”

“아니. 그는 양아들이야. 피 하나 안 섞인.”

“뭐?”


일공녀가 신경질적으로 반문했다. 와락 미간을 구긴 모습조차 수려했다.


“차기 한씨가주로 내정된 검신교의 인물. 그게 삼공자의 진정한 정체야. 너도 대충 위화감은 느꼈잖아.”

“···역시 그랬었나.”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일공녀는 수긍했다. 이내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이미 소가주 정쟁은 끝났으니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라는 거야? 괜히 무의미한 짓거리 하지 말고?”

“아니 아직 안 끝났어.”


한소백은 고개를 천천히 휘저었다. 무채색 안광이 장엄하게 일렁거렸다.


“한씨가주, 그러니까 네 아버지는 검신교에 반기를 품고 있어.”

“아버지가 검신교에 반란? 진짜야?”


일공녀가 놀라며 탁상을 짚고 일어섰다.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네 인생을 송두리째 조종하는 암중세력이 있다고 할 때, 넌 기분이 안 나쁘겠어? 충분히 뿌리칠 능력도 갖추었는데?”

“···아버지라면 거부하시겠지.”


긍정이 빨랐다. 일공녀는 무안한 듯 슬며시 다시 착석했다.


“뭐 가주께서 사실은 검신교주였다, 그런 반전이 있지 않은 이상 당연한 수순이지.”


이미 검신교주의 정체를 확인했기에 절대 있을 리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 꺼림칙한 부분이 있긴 한데.’


지금은 제쳐 둘 의혹이었다. 한소백은 턱을 만진 채 조용히 상념에 빠졌다.


‘멸문까지 남은 시간은 삼 년. 그때는 검신교가 방관을 결정한 직후겠지. 말이 방관이지 사실상 한씨세가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뜻. 그것도 유일한 양지의 자금줄을 말이야. 어쩌면 차도살인지계의 일환으로 일부러 십이혼의 습격을 부추겼을 수도.’


바꿔 말해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은 한씨세가의 처분을 결정 내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최대한 검신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혹은 미묘한 줄타기를 타던가.


“너무 비관하지는 마. 너네 아버지는 순순히 가주직을 삼공자에게 줄 리 없으니까. 삼공자도 별로 원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그 사람들 속내를 왜 확신하는 거야.”

“넌 고작 한씨가주라는 직위로 만족할 거야? 전에도 말했듯 그저 수많은 강호의 직함 중 하나야.”

“직계 혈족의 면전에서 당돌하게 도발하네······. 뭐 가주직이 아니어도 비슷한 권력을 얻으면 나야 좋지만.”


일공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소백을 빤히 바라봤다. 돌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그래서 넌 무슨 목적이야? 가주직을 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랑 편 먹었으면서 다른 직계랑 계속 동맹하고, 그러면서 나한테 헛바람도 불어넣고. 이거 순 분탕 종자 아니야?”


반박이 목 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지난 행적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분탕이라니. 조금 예리한데···.’


한소백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십이혼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건 한씨세가에 영향력을 넓히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견고한 파벌 구도에 균열을 일으켜야 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검성. 그게 꿈이지.”


한소백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십이혼을 비롯한 온갖 암중세력······. 타인의 인생을 농락하는 무뢰배에게 휘둘리지 않는 힘을 구축한다. 요약하자면 대충 그런 목표겠네.”


하나 더 있었다.


‘가족과 소중한 인연들도 지키고.’


뒷말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짧은 적막이 흐른다. 거창한 포부를 밝혀서인지 다소 민망해졌다. 이번에는 한소백이 일공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야말로 가주가 될 생각은 확실히 있어?”

“···어?”


일공녀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새하얀 손으로 턱을 감싸고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이내 천천히 말문을 뗀다.


“분했어.”


우수에 젖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처연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삼공자 때문이네. 그 녀석이 타인을 기만하고 가식적인 행동을 일삼는 게 나를 날 서게 한 것 같아······. 당장 옛날만 해도 그래. 별거 아닌 일화가 부풀어져서 내가 걔를 괴롭힌 게 됐어. 물론 어린 시절에 배다른 형제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언짢은 마음은 품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까 어느새 못된 악녀가 되어있더라.”

“그러고 보니 너, 성격 안 좋은 걸로 유명했지. 좀 살갑게 굴지 그랬어. 나한테도 막 쾌검으로 협박하고 그랬잖아.”

“아직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네, 아가씨.”


일공녀는 화내는 목소리이면서도 눈꼬리는 부드럽게 내렸다.


“천재에다가 서자 출신으로 성공한 삼공자. 한창 예민한 시기에 걔랑 비교당했어. 그래서 독기를 더 가지고 가주직에 집착한 듯해······. 설령 내가 가주가 못 되더라도 남들이 쉽게 가주가 되는 건 막을 거라고. 나만의 울타리를 지어 내 목숨을 건사하겠다고.”


다시 감성에 젖어 든 모습이다. 자조적인 조소가 느릿하게 뱉어졌다.


“하지만 삼공자도 줄곧 이용당한 처지라니. 참 웃기네. 이게 뭐야···.”

“그래서, 앞으로 네 생각은 어떤데?”


고개를 들어 올리니 한소백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보인 지난 행적이 주마등처럼 삽시간에 지나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자였다. 언행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자. 스스로 옳다고 확고히 믿으며 무모한 모험을 성공적으로 해내어 왔다.


‘타인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 강압적이면서도 따르게 되는 건 어쩌면···.’


저자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자각하지 못했던 선망의 감정이다.

혹은 다른 애틋한 마음일 수도 있고.


“그래, 정했어.”


피식 웃는다. 어수선한 마음이 정돈된다. 당당한 눈빛이 부끄럼 없이 한소백과 마주했다.


“아버지를 도와 검신교한테서 가문을 해방할 거야. 그게 내 목표야.”

“좋은 포부야.”


흡족한 목소리가 그녀의 선택을 반겨준다.


타인의 뜻에 휘둘리지 않는 인생. 한소백과 일공녀는 공통된 꿈을 품었다.


‘어느새 한씨세가 주요 구성원과 전부 접한 건가. 그들의 속내도 어느 정도 알게 됐고.’


대공자는 가정의 평화를 원했다.


딸을 지키고자 하면서도 정작 딸까지 이용하는, 언뜻 보기엔 교활하고 비인간적인 잔꾀. 허나 영악하다기보다는 절실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미 삼공자한테 입지를 빼앗겼고, 이공자의 세력에게 쭉 견제당해왔어. 그래서 적극적으로 근엄한 후계자 후보를 연기했던 거야.’


반면 이공자는 제 모친한테 휘둘리는 어리석은 자였다. 뒷배만 강할 뿐 순수한 역량이 없었다.


‘그래서 둘째 부인은 이공자한테 아무런 기대도 안 하고 있어. 그녀의 천성은 여장부. 오히려 자신이 남궁세가의 실권을 장악할 순 없을지 호시탐탐 노리는 게 분명해.’


짧은 만남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당장 동생인 남궁묵경을 작당모의 하기 위해 검사부를 부른 듯했으니.


그 밖에도 사공자는 후계 경쟁을 관둔 채 고명한 칼잡이가 되는 꿈을 지녔고, 이공녀는 판에서 한발 물러선 채 뜻 모를 관조를 해댔다.


서로의 욕망과 원하는 바를 알아내어 그들의 행동 원리를 파악했다. 어려울 거로 생각했던 길에 서서히 윤곽이 보인다.


하나로 규합된 한씨세가가 점점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반드시 멸문지화라는 운명을 극복해낼 것이다.


변수가 있다면 검신교의 향후 향방.


그리고.


‘결국에는 한씨가주의 진심에 닿아야 해. 무슨 속내를 품었는지, 검신교를 어떻게 여기는지. 아직도 그는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으니.’


때마침 기회는 얼마 안 가 찾아왔다. 첨예한 몸가짐으로 무장한 일련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엄숙하게 전언했다.


“가주님께서 공자님을 정중히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 * *



‘만만찮은 자들이군. 잘 훈련되었어.’


검객들은 한소백을 점잖은 태도로 안내했다. 그들의 뒤를 따르며 몰래 기도를 살폈다.


검야(劍夜).


가주의 직속 친위대다. 전원 상승고수로 구성되었다. 수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천검단 무력대보다 최소 한 수 위였다.


본디 정예 무력대는 초고수 하나를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두는 법. 고작 열 명만 모였음에도 대적하기 까다로워 보였다. 전원이 집결한다면 필패가 분명했다.


“저곳입니다.”


검야의 수장이 웬 쪽문을 가리켰다. 담벼락 없이 벌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도 줄곧 한씨세가에서 지내면서 처음 봤다.


진법이었다. 방향 감각을 사라지게 하는 건 물론이고 지형지물까지 뒤바뀐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벅.


그것은 쪽문을 넘어선 뒤, 더 괴상망측한 형태로 이어졌다.


‘아직 내 경지로는 감각의 혼선을 극복하기 조금 버겁군. 굳이 이 광경을 놓치고 싶진 않기도 하고.’


아름다웠다.


장인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미려하게 가꾸어진 수목. 꽃밭과 연못, 조형물의 배치 하나하나까지 심사숙고를 다 한 듯 유심했다.


들새들의 지저귐이 환청으로써 기분 좋게 귓가를 두들기는 때, 한소백은 중앙의 정자로 향했다.


“가주를 뵙습니다.”


한씨가주는 등을 진 채 앉아 있었다. 중후한 목소리가 근엄하면서도 초월적으로 들려왔다.


“오는데 고생이 많았을 거네.”


간단히 요기할 주안상이 차려 있었다. 맞은편으로 조심스럽게 앉았다. 숫제 분위기가 말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그런 압박감이 여실했다.


“일단 한 잔 들지.”


쪼르르.


술을 따르는 것조차 고매한 수공의 묘리가 깃들었다. 자연체처럼 흐릿하면서도 동시에 고아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삼공자한테 들었네.”

“예?”

“명목상으로는 내 아들이네.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나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러 왔지.”


한씨가주와 삼공자가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을 삼공자가 먼저 가주에게 밝힌 듯했다.


“나조차 삼공자··· 혼이의 진정한 속내는 모르네. 검신교 출신이기에 어쩌면 약해 보이는 면모조차 계략과 연기일 수도 있지.”


한씨가주는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진심도 염두에 둬야 한다네. 가주란 그런 직위지. 가솔의 문제에도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되네.”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삼공자와 대화를 마친 뒤, 미뤄뒀던 일을 결정해야겠다고 판단 내렸네.”

“무슨 말씀이신지···.”


불안한 예감이 괜히 들었다. 이렇게 마련된 자리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말문이 불편하게 떼어졌다.


“넌 자질을 증명했다. 전에도 말했듯 직계보다 더 뛰어난, 가장 후계자에 근접한 성정이지.”

“···그거 진심이셨습니까.”


도망칠 수 없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와중에, 설마 했던 본론이 들려왔다.


“내 양아들이 되지 않겠나.”


망설일 것도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로 즉각 대답했다.


“거절하겠-”

“신중히.”


무거운 어조였다. 괴력난신과 같은 안광이 섬뜩한 기질을 드러냈다. 장내가 시간이 멈춘 듯 정숙히 얼어붙는다.


“바로 답하지 말고.”


위압적인 파동과 함께 스산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어둡게 응시했다. 심장의 맥동이 고요히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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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씨가주 24.09.08 408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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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삼공자 24.09.07 391 6 16쪽
37 명검주 승단 (2) +1 24.09.06 399 6 14쪽
36 명검주 승단 +2 24.09.04 421 6 13쪽
35 벌과 나비 24.09.03 445 4 14쪽
34 별빛과 칼의 노래 24.09.01 467 7 12쪽
33 격전 24.08.31 467 6 16쪽
32 집결 24.08.30 453 6 16쪽
31 그래도··· 24.08.29 448 9 16쪽
30 강호는 잔혹하다 24.08.29 445 6 12쪽
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65 7 17쪽
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5 9 16쪽
26 혈령탄 24.08.24 499 8 13쪽
25 가르침 (2) 24.08.23 560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61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69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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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살생부 24.08.17 662 13 13쪽
18 대공자 24.08.16 673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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