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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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작품등록일 :
2024.07.11 11:26
최근연재일 :
2024.09.1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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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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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원영신

DUMMY

쿠웅.


마혈이 짚인 채로 무릎을 꿇은 사내.

성위단 부단주였다. 제압 과정에서 약간의 불가피한 구타로 인해 처량한 외관이 되었다.


목 위는 혈도가 짚이지 않아 멀쩡했다.

그가 비굴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으음, 우리 지성을 갖춘 강호인답게 현명하고 상식적인 대화를 해보는 건 어때.”

“일단 지껄여보시지.”


더 이상 존중은 없었다.

한소백이 냉담하게 내리깔아보자, 부단주는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자, 난 성위단 부단주라는 고위직에 앉아있으면서 동시에 검신교의 인물이야. 이런 내가 불의의 사고로 검로향에서 요절한다면 문제의 소지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 살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자질구레한 말의 나열이었다.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에 점차 자신감이 사라져갔다. 뻣뻣하게 굴 입장이 아니었다.


“그건 됐고.”


한소백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검신교에서 얼마나 중책이지.”

“좋은 질문이야. 나도 몰라. 괜히 암중세력이겠어?”

“으흠···.”


미간이 구겨지며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단주는 부랴부랴 말을 정정했다.


“검신교는 육십여 년 전, 궤멸 직전까지 간 뒤로 뿔뿔이 흩어졌어. 양지의 구심점으로써 남은 잔당을 규합한 게 바로 한씨세가. 각 유파나 지부에서 패잔병으로 찾아온 거지. 그 이후로 세월이 지나 세대 교체도 이루어졌고. 한씨 성을 달지 않았는데 특히나 고강한 애들은 다 그렇게 유입되었다고 보면 돼. 검신교의 내밀한 사정까지는 모르지. 나도 딱히 검신교의 내정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내 능력이 뛰어나서 출세한 사례고.”


청선이 들려준 정보와 어느 정도 일치했다. 당장 엄석궁처럼 검신교 유파 출신이지만, 한씨세가에 소속감을 더 느끼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검신교는 맞는데 지령 같은 걸 받진 않는다는 건가? 근데 왜 날 공격했고.”

“아니, 네가 먼저 날 적대하지 않았나···? 내가 과민하게 군 건 맞는데, 솔직히 누가 봐도 싸울 만한 분위기였잖아. 억울해!”


성대의 떨림, 안면 근육의 변화, 미미한 땀방울. 거기다가 상단전의 직감까지.


한소백은 부단주를 뚫어져라 살피며 거짓을 탐색했다.


“숨기는 건 있지만 지금 내뱉는 말은 진실되군. 심문은 나중에 천천히 하지.”


성위단 부단주라는 직위가 문제였다. 죽이기에는 위치와 행방이 너무나 뚜렷하고 목격자도 많았다. 굳이 피를 묻히면서까지 입막음할 필요도 없었고.


“혹시 이 중에 검신교가 더 있나.”

“내가 아는 건 쟤밖에 없어.”


고민없는 즉답이었다. 부단주와 눈이 마주친 자가 황급히 헛기침했다.


“흠, 흠!”


상단전의 직감도 만능은 아니다. 부단주는 예전에 나눈 대화를 통해 성향 파악이 끝났기에 적발하기 수월했다. 허나 한대명을 제외하고 남은 여섯 명의 검객 중 검신교를 솎아내긴 어려웠다.


‘전부 죽여야 하나?’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그 살의는 삽시간에 일대로 퍼져, 검객들의 살갗을 오싹하게 어루만졌다.


그때 누군가 제안했다.


“정 불안하다면 전부 점혈을 하는 건 어떤가.”

“좋은 생각이네요. 동의하십니까.”

“제길, 암중세력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란담. 난 정말로 결백한데.”


점혈은 속전속결로 끝났다. 밧줄도 없는 환경이었기에 어중간한 자세로 맨땅에 누워 있어야 했다. 한대명을 제외하곤 전부 몸의 자유를 잃었다.


‘완벽한 비밀 엄수는 불가능하겠지. 한씨가주한테만 언질을 주면 알아서 처리하려나.’


뒤처리는 나중에 고려할 일이었다. 우선적으로는 검로향의 기연을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그럼 아버지. 감시 잘 부탁드립니다.”

“나만 믿고 다녀오거라.”


저벅.


한소백은 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무거웠던 공기가 다소 풀렸다. 하나둘씩 떠들기 시작했다.


“참 신기한 일이군. 검로향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것보단 난 저 소년이 더 믿을 수 없어. 검강지경이라니, 우리가 여기 갇힌 동안 무슨 일이 있었대?”

“흠, 내가 아들 자랑에 익숙하지 않아서···.”


한대명이 낯부끄러워하자, 유일하게 바깥 사정을 아는 이가 입을 놀렸다.


“그게 저 꼬맹이가 무려 천흉의 팔을······.”


거짓말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가만히 듣던 부단주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종사의 자질만 지닌 게 아니었네. 괜히 반항했다가 황천길로 갈 뻔 했어.’


태세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한대명에게 슬쩍 운을 뗐다.


“아들을 잘 키우셨군요, 선배님.”

“내 아들이 뛰어나긴 하지. 하지만 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네.”

“아닙니다, 선배님.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 아닙니까. 소백 공자는 직간접적으로든 선배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난 정말로 제대로 해준 게 없지만 말이라도 고맙네.”

“저도 예전부터 독불마검의 명성을 흠모해왔습···.”


한소백의 부친인 한대명, 그에게 잘 보이고자 다들 필사적으로 입바른 소리를 했다. 빈말일지라도 칭찬은 상대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법.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였다. 누군가 산통을 깨듯 중얼거렸다.


“유서 깊은 한씨세가에서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절세의 검학. 이 소식을 접한 검신교가 어떤 반응을 보일련지···.”


살인멸구도 타개책이 될 수 없었다. 검로향에서 일어난 변화는 조사하면 금방 밝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거 그냥 검신교에게 넘겨주면··· 역시 안 되겠지? 딱 봐도 광세절학이 분명한데. 가주부터 용납하지 않을 테고.”

“에이 검신교, 그거 망한 암중 세력 아닌가. 다들 끈 떨어진데 집착하지 말고, 본가에 충정을 바치자고. 그런 멍청이들 여기 없지?”


불신은 경계심을 불러냈다.

한번 일어난 내부 분열은 봉합되기가 쉽지 않다. 삭막한 분위기가 장내에 감돌 때.


구구궁··· 쿵.


돌연 바깥에서 번잡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소란의 장본인은 용의자라고 할 것도 없이 자명했다.


“슬슬 검로향의 관리인이 방문할 때가 되긴 했지. 하물며 상당한 굉음이 울렸으니 이상함을 감지했을 수도 있고.”


기관장치의 작동음과 석문이 개방되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때 누군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원로원의 노괴들이라면 검신교가 강호 진출을 꾀할 적부터 활동했겠지?”


본의 아닌 지적은 몹시도 예리했다. 기류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길게 번졌다.


저벅.


별 뜻 없음에도 음산한 발걸음으로 느껴진다. 긴장감이 고조된다. 노회한 목소리가 넓은 공동에 메아리치며 퍼졌다.


“웬 야단인가 하고 빠르게 왔건만, 눈앞에 저 계단은 무엇이지? 자네들은 왜 바닥 청소를 하고 있고.”


숨길 수 없었다.


오래된 기관진식의 작동으로 인해 광장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천장에서 나온 낙석이 바닥을 부쉈다. 결정적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너무나 거창해 보였다.


“내 아들이 수백 년간 감춰졌던 기연을 들췄소. 혹시 모르니 접근 통제를 부탁하오.”


한대명은 천연스럽게 넘어가고자 했다. 허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더니, 예리한 물음이 이어졌다.


“설마 열 가지 검류의 통합에 성공한 건가?”

“노인장께서는 꽤 많은 걸 아신가 보오.”

“이전 관리자들한테 비사를 인계받았지.”


짦은 대화를 끝으로 재차 적막이 흘렀다. 한대명은 관리인을 차분하게 노려봤다.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한 시선이 쏘아졌다.


스윽.


한대명은 검을 겨누며 경고했다.


“제 아들 실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굳이 싸워야 합니까.”

“잘 알지. 인질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고.”

“이봐.”


존칭은 관뒀다. 역시나 적대였다.


“너, 천흉보다 강해? 별 같잖은 실력을 지닌 주제에 우리 아들내미의 분노는 어찌 감당하려고? 한씨가주의 비호는 또 어떻고? 좋은 말로 할 때 그 칼 놔라.”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협박에도 관리인은 물러섬이 없었다.


“저 밑에 존재하는 건 아마도 선대의 망령일 거라네. 네 아들의 현 수준으로는 결코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지.”

“무슨 헛소리를··· 혹시 아는 게 있나?”

“한씨세가 최초 최후의 절학.”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본교가 몹시 탐내고 있던 것이지. 완성만 해낸다면 천하에서 능히 손꼽힐 만한 검법이야. 그만한 가치가 있지.”


늙수그레한 손가락이 칼자루를 파지했다. 한대명도 긴장한 채 기수식을 취했다.


“너무 걱정하진 말게나. 자네 부자는 아직 필요하니 일단 살려는 둘걸세.”



* * *



지하는 기존 검로향보다 훨씬 광활한 넓이를 지녔다. 당장 길만 해도 갈래갈래 나뉜, 거미줄과 같은 미로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길을 잃을 수 있었다.


스앙!


네 번째 관문에서 봤던 환영. 그것들보다 다소 약소해진 그림자가, 길 중간에 드문드문 뛰쳐나와 한소백을 공격했다.


‘차륜전이 따로 없군. 기술만 놓고 봤을 때는 하나하나가 상승고수에 준해.’


대신 진법 바깥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내부로 입장한 자들을 철저히 가두는 역할에 불과했다. 한소백은 환영을 베어내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약 이각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쯤, 큼지막한 통로로 이어졌다. 진기 탐지의 수법을 썼기에 길을 찾는데 수월했다.


그리고.


우웅.


녹슨 검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 검은 마치 이정표처럼 한소백을 천천히 안내했다. 돌연 어느 공간으로 들어가게 됐다.


광막한 석실.


한 켠에는 희미하고 빛바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연자여, 그대가 나의 후손일지 혹은 원수이거나 전혀 연고 없는 외인일지 모르겠으나 어떠한 형태로든 나와 인연이 닿았겠지.]


그는 옛 선조 중 한 명이었다.


[난 한씨가문의 오대가주, 한유진이라고 하네. 세간에는 부끄럽게도 검월귀(劍月鬼)란 유명세를 얻었지.]


석면에 적힌 글귀가 자신을 소개하자, 한소백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월귀, 한유진!


‘처음 들어. 별로 강호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아니군.’


조상에게도 냉혹하고 객관적인 평가였다.


[내 부친께서도 천병검군(踐兵劍君)이라는 별호로 저명하신 분이셨으며, 타의 귀감이 될 정도로 온후한 인품을 지니셨지. 난 그분의 밑에서 엄밀한 가르침을 유순하게 들으며······.]


미간이 반사적으로 구겨졌다.


‘이 인간. 잡설이 길군.’


쓸데없는 부분은 빠르게 넘겼다.


[······내 유년기 성장에 대해서는 이쯤 각설하고. 나는 열세살 적, 모친께서 아끼시는 도자기를 던져서 깬 죄로 창고에 하룻밤 갇혔었네. 그때 진각 수련에 몰두하던 도중, 낡은 나무 바닥이 부서졌고 그곳에서 소박한 명검과 함께 비급서를 발견했네. 천애비탄검(天涯悲嘆劍). 무당의 검학에도 비견될 정도로 광오한 무공이었다네.]


낯익은 이름이다. 검로향 내 열 가지 통로 중 하나의 검법이었다. 사무친 살검(殺劍)의 초식이 인상적이었는데, 어찌나 살의가 짙은지 혈향마저 느껴졌었다.


[허나 섬뜩한 검의와 다르게 함께 비치된 검 자체에서는 어떠한 악의도 담기지 않았었네. 난 천애비탄검을 대성하면서도 짙은 증오심을 극복하며, 강호에서 협의 기치를 퍼트렸다네.]


[그렇게 평탄한 일생을 마치던 도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네. 이 검법을 창안하신 선조께서는 어떠한 삶을 보내셨을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난 명교(明敎)를 찾아가 기이한 대법을 통해 검에 깃든 기억을 읽었다네.]


[······다음 진법에서 연자는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동일하게 경험할 테니, 따로 적진 않겠네. 아무튼 선조의 구슬픈 삶을 체험한 나는 내 대에서부터 유업을 시작하기로 했네. 그것은 바로 천애비탄검과, 본디 가문에서 전해지던 두 가지 상승검법. 그리고 추가로 발견한 세 가지 검흔과 내가 창안한 검법까지 합하여, 총 일곱 가지 검학을 하나로 엮는 것!]


[연자여, 그대가 한씨의 후손이었으면 좋겠구나. 이 대업을 완성하여, 부디 가엾은 선조의 넋을 기려주게나!]


쿠구구궁──!


지축이 천둥처럼 흔들리더니, 마찰음과 함께 양쪽 문짝이 서서히 닫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거대한 석문이 존재했던 것이다.


완전히 커다란 석실 내에 고립되자, 야릇한 기류가 안개처럼 몰려왔다. 대규모 환영진법의 발동. 환상이 꿈결처럼 공간을 잠식해 온다.


‘여긴 어디지···?’


눈을 감았다가 뜬 한소백은 뒤바뀐 풍광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별빛이 무수했다.


찬란한 보석이 충만하게 박힌 것마냥 반짝거린다. 고즈넉하면서도 정겨운 밤하늘에 시선이 뺏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불청객이 감상을 방해했다.


[저기다!]


사나운 고함이었다.


[도망치는 놈들을 추포하여 죽여라! 결코 한 명도 살려둬선 안 된다!]


의복에 시뻘건 피를 묻힌 무사들. 그들이 칼을 살벌하게 치킨 채 한소백 쪽으로 달려왔다.


‘이것도 시험인가?’


검격으로 대응하려다가, 이내 관뒀다.

독살스러운 무사들은 한소백의 몸을 사뿐히 통과하였다.


이곳에서 한소백은 그저 허상이자 관조자에 불과했다. 진법의 환영은 그를 인지하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을 베어내고 죽이는데 혈한이 되어 있었다.


그 눈 찌푸려지는 광경을 보며, 한소백은 이 신비한 공간을 분석하였다.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멀쩡히 작동하다니. 진법 자체의 영성이 짙어졌나 보군. 아무래도 그간 위층의 진법에 소모되었던 자연지기보다 축적된 게 많았을 테고.’


비명과 고함이 잔혹하게 섞여든다.


[생존자를 남기지 마라!]


거친 발걸음이 들판을 단호히 밟는다. 습격자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질주에, 풀잎은 어수선하게 흔들렸다. 칼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챙챙.


별반 저항도 못 한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간다. 항복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때 약관 정도의 한 청년이 외쳤다.


[안 돼!]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앞으로 뛰쳐나온 그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습격자들을 막아냈다. 청년의 아군도 한없이 밀리는 쪽수였으나 곁에서 도왔다.


그리고 하나둘씩 쓰러진다. 도울 여력이 없다. 청년의 사정도 애처로웠다. 날붙이에 피부가 뚫리고, 팔뚝의 살점이 고기처럼 썰렸다.


난전 속에서 다리를 다쳤는지, 핏물이 바지를 진하게 적셨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연거푸 칼질했다.


[같잖은 저항을 그만두지 못할까!]

[제길, 저 애송이부터 죽여라!]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무사들은 청년을 몰아세웠다. 어느새 청년의 동료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반면 습격자들의 증원이 몰려왔다. 그 방향에는 커다란 장원이 지어져 있었다. 붉게 물든 밤하늘과 점차 비대해져 가는 열기. 피 냄새가 지독했다. 간간이 들리던 비명도 멎었다.


삼엄한 포위의 한가운데에 청년이 있었다.


[아, 아···!]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입이 벙긋거린다. 무의미한 음성이 그저 속에서부터 끓어 나와, 참혹한 현실을 원망하듯 뱉어졌다.


도무지 살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기적은 스스로 불러냈다.


스각!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특별히 빠르지도, 고매하지도 않은 검격이 돌연 목을 떨궜다.


눈이 뒤집혔다. 청년은 적군의 무리로 몸을 내던졌다. 길은 듬성듬성 열렸다.


사각, 스앗!


광채가 휘감긴 칼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흩뿌려진 핏줄기와 함께 발이 땅을 박찼다. 쏜살 같은 움직임이 적을 지나자, 그들의 팔다리가 손쉽게 떨어졌다.


쿠웅!


시체를 발판 삼는다. 거침없는 진격이 군집을 어지럽게 헤쳤다. 소맷자락이 폭풍처럼 흔들렸다. 칼바람이 한차례 지나자, 살점 꽃잎처럼 휘날렸다.


쓰러져 가는 인영이 들판을 이불마냥 덮는다. 병장기가 달그락 추락하고, 피 웅덩이가 고인다. 칼춤이 한바탕이 지날 때쯤 습격자 무리는 전의를 상실했다.


도망친다. 그러자 섬뜩한 안광이 빛났다.

한 놈도 남기지 않는다, 그런 뚜렷한 의지.


스가각!


칼질에 점점 힘이 북돋는다. 같잖은 저항은 무가치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너덜너덜한 몸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저력을 품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습격자들이 반격하듯 달려들었다. 역시나 무의미했다. 베여도 쓰러지지 않는다. 한 번의 유효타를 위해 서너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저자는 죽지 않는다. 계속해서 일어나 끊임없이 적의 목숨을 수거한다.


별빛이 구붓하게 내리쬔다. 음영이 걷힌 얼굴은 악귀처럼 흉측했다. 누군가 절망하며 비명 질렀다.


[저자는, 검의 귀신이다···!]


일방적인 학살은 점점 끝나갔다. 한소백은 유심히 관조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초대가주의 기억인가? 그의 영성이 담긴 기물이 진법의 매개체가 되어 이런 환상을 빚은 거로군.’


불현듯 익숙한 노랫가락이 떠올랐다. 가사 속 단어들과 눈앞의 잔인한 광경이 겹쳐진다.


‘깊은 별밤, 들녘의 풀잎. 봄날 삭풍과 잔불. 그리고 이다음은···.’


저벅.


격전지의 한복판. 이젠 시체 밭으로 변한 그 위에서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장원을 태운 화마가 어느덧 들판까지 한바탕 휩쓸었다. 수북하게 쌓인 잿더미 위로 가득한 시체. 오직 한 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찬 바람이 야속하게 분다.

잔불마저 꺼졌다.


[아무도, 남지 않았어.]


청년이 멍하니 자책했다. 그는 은은하게 발광하는 검을 품은 채로 하염없이 주변을 바라봤다.


그때.


초대가주와 눈이 마주쳤다.

명백한 인지의 순간.


[너도, 한패야···?]


갈라진 음성은 굉장히 섬뜩했다.

그가 비치적거리며 일어섰다.


끔찍한 참사에 이성을 잃고, 시산혈해 위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리니.


우웅─


어느새 칼날에 별빛이 담겼네.


“한패는 아니지만, 원한다면 칼을 나눠주지.”


스릉.


한소백이 선조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자 선조 역시 은하수가 물결치는 검을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연배에 맞지 않은, 그저 터무니없는 기예가 한소백을 맞이했다.


검강(劍罡).


두 번의 인생을 겪지도 않은 자가 빚어낸 검공기예의 최극점.


‘어차피 환영에 불과해. 내상을 입지 않도록 상단전 방어에 중점을···.’


돌연 검이 눈앞에 당도했다.


──스앗!


겨우 반응했다. 아주 살짝 스치기만 한 정도. 그럼에도 팔의 살점이 싹둑 썰렸다. 가짜도 환상도 아닌, 실재하는 부상이었다.


무시무시한 절삭력.


“···잠깐 이건?”


진법이 빚은 허상이 아니다.

저자의 검강은 정말로 존재했다.


후웅!


급속의 움직임에 검격이 잇따랐다. 위태로운 차이로 피해냈다.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한소백은 공력으로 전신을 활성화시키며, 정면의 괴물을 바라봤다.


[전부 죽어버려. 내 가족을 죽인 자들, 지시 내린 배후, 간접적으로 가담한 모든 인간까지. 절대 용서하지 않아.]


처연한 피눈물. 몹시도 섬뜩한 기질이 느껴졌다. 초대가주가 휘청거리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백 년간 잠들었던 망령을 상대할 줄은 몰랐는데···.”


정체는 짐작되었다.


원영신(元嬰神).


진기의 육신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 절세경지의 영성이 짙게 담겼기에 저 고도의 진기 응집체는 훨씬 강인하고 영험해진 상태.


일반적인 환영과 동일시 여겨서는 안 된다. 단순히 내상을 입히는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닌, 실체와 물리력을 갖추었다.


‘검로향 근방의 자연지기와 영맥을 힘의 원천으로 삼는 게 분명하군.’


이곳으로 보충되는 기운이 전부 소진되기 전까지 원영신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구우우─!


막대한 진기 보급에 의해, 검기성강이 거대한 파도처럼 격렬하게 일렁거렸다. 그에 맞대응하듯 한소백도 슬며시 검을 쥐었다.


“조상님. 대충 딱한 사정은 알겠는데···.”


우웅.


별빛의 밀도가 환하게 짙었다.

이쪽도 검강이다.


“후손한테 성불 당해도 너무 원망하진 마십시오. 살 사람은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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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85 9 17쪽
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3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504 9 16쪽
26 혈령탄 24.08.24 517 8 13쪽
25 가르침 (2) 24.08.23 576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79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87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29 10 18쪽
21 깨달음 24.08.19 677 11 14쪽
20 살생부 (2) 24.08.18 699 12 12쪽
19 살생부 24.08.17 687 1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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