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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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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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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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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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는 잔혹하다

DUMMY

위압적인 존재감이 근방까지 다가왔다. 초고수의 발걸음이다. 마음먹고 내달리면 수십 리는 순식간이리라. 경공의 잔여 경파를 추적하는 것도 손쉬울 테다.


반면 한소백의 몸은 넝마가 되었다. 처음부터 도망치기 역부족이었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발치 부근을 휘감은 공력 파동을 거두었다. 무의미한 낭비였다.


“주군, 제가 시간을 끌겠습니··· 으윽!”


천흉의 접근을 눈치챈 청선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엄청난 통증과 함께 한소백이 혈도를 짚었다.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한 눈빛이 쏘아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야, 어떻게 할 거냐.”


사공자가 물었다. 분명 체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소백과 눈이 마주친 순간, 당혹감이 깃들었다.


“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봐야지.”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폭음이 들리고 고작 여섯 호흡도 안 된 시간이었다.


한소백은 눈을 감고 집중하였다. 주변 시간이 기이하게 느려지고, 사고 속도는 수십 배 가속되었다. 강제로 재현해낸 절세고수의 감각이었다.


‘떠올려라, 그자의 모든 행동을. 구현해내라, 그날의 궤적을.’


사아아─


미세한 진동이 검날 위로 물결쳤다. 온 신경이 신체를 벗어나며 손끝 너머 물체로 쏠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의념을 진기에 섞는다.


세상을 도려내라. 균열 속으로 존재를 묻어, 타인의 인지에서 벗어나라.


구체적인 형상으로써, 극한의 상상력이 현실로 빚어지기 시작했다. 한소백은 어렴풋하면서도 너무나 무거운 칼날을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줄기가 허공에 그어졌다.


─────스각!


일대 풍광이 사선으로 나뉘었다. 두 동강 난 과일의 단면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하늘과 땅이 어긋났다.


“인지를 베는 검···! 어떻게.”


사공자가 경악하자 한소백이 쉿, 하고 주의를 줬다. 직후 섬뜩한 울림이 땅을 즈려밟았다.


사박.


흑백 옷자락이 잔잔히 나부끼며, 야윈 체구의 마인이 나타났다. 고개가 기울어지며 이마에 난 골이 심히 깊어졌다.


[이상하군. 분명 여기 있어야 하는데.]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졌을 시간이 아니었다. 반경 수백여 장을 아우르는 기감의 영역은 한소백의 위치를 틀림없이 잡아냈다. 그런데 처음으로 구멍이 난 것이다.


두근, 두근.


사뭇한 긴장감에 심장이 요란히 박동한다. 이 정도 소음까지는 문제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호흡을 멎히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지나가라, 지나가.’


사공자가 눈물까지 흘리며 빌 때, 천만다행히도 천흉이 혼잣말했다.


[저쪽으로 갔나. 뭐, 그 몸으로 멀리 도망치진 못했겠지.]


발에 살짝 힘을 주자 지반이 거미줄처럼 쪼개졌다. 용오름과 같은 강맹한 도약이 일며, 흉마전의 초고수는 사라졌다.


───허어, 허억······ 허···.


세 사람의 숨소리가 뒤늦게 요동쳤다. 흉부는 크게 들썩이고,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적셔졌다.


살아남았다. 저 괴력난신과 같은 마인을 속인 것이다. 안도의 한숨이 몇 번이고 흘러나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은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우리, 산 거 맞지? 그렇지?”


경공의 속도를 고려해봤을 때, 이미 이 근방을 한참이나 벗어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한소백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현듯 굉음이 터졌다.


쿠쿠쿵──!


웬 물체가 하늘에서부터 고속으로 내리꽂혔다. 막대한 충격에 땅이 산산조각 났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역시 느낌이 이상했어.]


소수마공을 익힌 듯 가느다란 손이 먼지바람을 장막처럼 거둬냈다. 천흉은 갸웃거리며 정확히 한소백이 있는 위치를 응시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인지를 베는 효능도 여전히 존재해. 동요하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면 돼.’


희망은 덧없이 무너져 내렸다.


콰각, 콱.


손이.


────콰가가각!


공간을 찢어낸다.


[진법인 줄 알았는데, 참으로 불가해한 이적이로군. 무슨 원리인지 도통 모르겠어.]


마귀처럼 섬뜩한 눈동자. 어색하게 싱그러운 눈웃음을 짓는다. 저것과 직시한 순간, 빙공에 당한 것마냥 온몸이 굳어버렸다.


[어쨌든 쥐새끼 같은 놈들. 결국 잡혀버렸네? 본좌의 눈을 피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마라.]


모든 게 끝났다.


극속기동, 저 쾌속의 보신경 앞에서 일개 하수의 발걸음은 무용해진다. 하물며 양팔에는 두 부상자를 낀 상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흉이 손에 쥔 끔찍한 무언가를 본 순간, 분노가 치밀어올라 떠날 수 없었다.


[아, 혹여나 기대하지 마라.]


우우웅.


허공섭물에 따라 무언가가 떠오른다. 엄지 두 개만 한 크기의 생체였다. 비릿한 냄새가 난다.


혈령탄의 스승이자 지공(指功)의 고수인만큼, 천흉은 당연히 탄지신공에도 능했다.


[간혹 어설프게 후환을 남겨두는 머저리들이 있지만.]


파앗─!


눈알이 쏘아졌다.


애당초 맞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웬 바람 줄기에 머리칼이 나부꼈다. 한소백의 귓전을 위태롭게 스치고 지났다.


눈알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우친다.


“천흉···!”


이를 악문 한소백이 흉마전의 마인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 원망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천흉은 선언했다.


[본좌는 확실히 처리한단다. 너희의 죽음은 명확하다. 산짐승에게 요긴할 양식(糧食)이 바로 네 장례로다.]


우웅.


손가락 끝으로 저주의 빛이 모였다.


[다시 말하지. 천벌은, 이 손끝에 있노라.]


스아앙, 콰악!


수비초에 유능제강의 묘리를 담았다. 물줄기처럼 유장하게 구부려진 검격이 연속적인 지풍의 궤적을 겨우 비틀었다.


[갈수록 반응이 빨라지는군. 설마 움직임에 적응이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천흉이 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뇌까렸다. 안일한 태도에서 주어진 잠깐의 시간 동안, 한소백은 필사적으로 승기를 짜냈다.


‘그나마 귀월객이 우리를 위해 선전한 건가.’


무당파 초고수 흑송진인.

그리고 선천진기를 격발한 귀월객.


그 탓인지 천흉은 만전 상태가 아니었다.


특히나 다리 부근이 너덜너덜했다. 귀월객이 집중적으로 공략한 부분이었다. 어떻게든 기동력을 떨어트려, 도주의 시간을 벌고자 한 결사의 노력.


‘그럼에도 만만찮은 강적이다. 내가 십전의 상태였어도 죽일 수 없었겠지.’


온몸에 난 구멍과 심각한 출혈. 세맥과 경혈 일부가 찢겼는데 근육으로 겨우 붙들었다. 그마저도 무리한 경공 사용으로 신체에 한계가 왔다.


[잡스러운 것에게 시간을 너무 썼군. 더 꺼낼 힘이 없다면 슬슬 끝을 내볼까.]


정말로 살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꽈악.


칼을 쥐고 어금니를 무는 소리는 동시적이었다. 절망적인 판단만이 자꾸 내려졌다.


‘승기를 얻으려면 결국 저 녀석의 호신강기를 뚫어야 해. 그게 최소 조건이야. 하다못해 검강(劍罡)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기회를 노려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한소백은 칼날에 별빛을 담아낼 수 없었다.


부족한 경지의 문제일 수도, 어쩌면 아직 해소되지 못한 심적 문제일 수도 있었다.


우웅.


[천벌을 내리노라.]


손가락 위로 응집된 진기가 발사되고, 천흉의 신형도 별안간 흐릿해졌다. 동체시력이 따라잡을 새도 없이 지척에서 손가락이 뻗쳐 왔다.


콰아앙!


화약이 폭파하는 듯한 충격이었다. 검면으로 막아냈음에도 그렇다.


이것이 이십 년을 연성한 마혼단명결의 위력. 세월을 소모하는 패도무공이 고작 지법과 합쳐졌다. 그럼에도 매우 파멸적이었다.


쾅, 콰강! 쾅!


본능적인 후퇴 보법으로 천흉의 연격에 겨우 반응했다. 그조차 조만간 끝이었다. 간결한 공격뿐인데도 격산타우마냥 한소백의 내장을 계속 진탕시켰다.


“우욱··· 읍!”


구역질과 함께 신물이 올라온다. 기예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자꾸만 밀려 나간다.


······이길 수 없다.

포기해야 한다.


나약함을 인정하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어떠한 강렬한 신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른해진 마음 탓에 곧 잊히고 말았다. 그렇게 죽음을 체념하는 순간이었다.


──내 아들한테서 꺼져라!


한줄기 검로가 거칠게 그어졌다.


콰가가강!


열댓 번이 넘는 발경력의 중첩이다.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천흉조차 물러났다. 완전히 피하지 못한듯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아버지···?”


기억이 떠오른다. 지켜야 할 소중한 것.

어렴풋이 중얼거릴 때, 한대명이 무언가를 던졌다.


“받아라!”


한소백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낚아챘다. 무엇을 던졌는지 즉각 알아챘다.


주머니에서 환단 하나를 꺼내 곧장 입에 삼켰다. 씹을 필요도 없었다는 듯, 식도를 지나자마자 녹아내린다.


그리고 빛이 전신에 퍼진다. 출혈이 멎고 벌써 상흔이 아물기 시작했다. 비어졌던 단전으로 진기가 충만하게 차오른다.


제상단(除傷丹). 먹는 순간 내상과 공력을 회복시킨다는 의맥의 비전영단이었다.


일전에 금휘검객 윤일성이 초식 운망을 맞고도, 이 영단을 먹어 빠르게 회복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이것을.”


쩌정, 쩌어어엉──!


강렬한 충격과 함께 광풍이 일대에 흩날린다. 거듭 쌓인 부상이 초고수와 최소한의 싸움을 성립시켰다. 그 정신없는 격전 속에서 한대명이 대답했다.


“훔쳐 왔다.”

“예?”

“넉넉하게 세 개 정도. 율법당에서 날 추격하고 있을 거다. 훌륭한 지원군이지.”


치아까지 보이는 헌앙한 미소였다.

한평생 모질게 대하다가, 드디어 아버지다운 일을 해냈다는 기쁨 탓일까.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한대명은 웃었다.


저 모습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승기는 존재한다.

한대명이 이곳에 도착할 정도라면, 조만간 한씨세가의 지원도 올 테다.


‘다 회복됐어. 어서 도와야 해!’


쩌저저정─! 쿠궁, 쿵!


열 호흡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사이 한대명의 몸으로 잔상처가 새겨졌다. 한소백은 서둘러 전장에 참전하고자 했다.


그때 사공자가 외쳤다.


“내 것도 받아!”


탁.


한소백은 검을 낚아챘다.

사공자가 지닌 검혼이었다. 마침 칼날의 내구도 다 나간 상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병장기였다.


“처음 검혼을 받아들인다면 고통스러워할 거야. 그래도 너라면 충분히 극복할 거라고 믿는데···.”


화아앗─


미증유의 힘이 신체에 깃들기 시작했다. 내공과 전혀 다른 영성. 그것에서 빚어진, 근원조차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힘.


그리고 그 이전에, 뇌리로 웬 기억이 들어왔다.


[나유타!]


한 검객의 일생이었다. 그가 겪은 전투의 편린이, 무수하게 그린 검의 궤적이 파도처럼 몰려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곧 그쳤다.


“검혼이란 결국 타인의 검흔도를 일컫는 거 아닌가. 딱히 큰 도움은 안 되는군.”


혼잣말에 사공자가 경악했다.


“이건 너무 빠른 적응력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 한소백은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지상을 질주했다.


카캉!


벼락 같은 검격이 휘둘러졌다. 천흉이 손가락으로 막아냈다. 좌측으로 한대명이 똑같은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가소로운 것들이. 감히 통할 듯싶으냐.]


한소백은 거만하게 대꾸했다.


“네 목이나 걱정해라, 사마외도.”


뼈가 일부 부러졌지만 짙은 흥분감에 잊혔다. 날아오를 것만 같다. 동작을 펼치는데 자유롭다. 그야말로 최고의 몸 상태였다.


반면 천흉은 꽤 지쳐있었다.

어쩌면 한씨세가의 지원이 없어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자신감이 솟구쳤다. 때마침 한대명이 부추기기까지 했다.


“우리 아들 실력 좀 볼까. 부자 간에 오붓한 합공을 펼쳐보자고.”

“좋습니다, 아버지.”


검풍의 줄기가 일대를 어수선하게 헤집어댔다. 정밀한 변초가 서리서리 휘어지며, 칼 그림자가 구름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동시에 비슷한 의념이 길게 메아리쳤다.


망운(望雲)

운망(雲望)


오직 두 부자만을 위한 초식.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굳은 의지였다. 그것이 두 자루의 칼로써 구름을 가르며 휘둘러졌다.



* * *



────푸콰아악!


비릿한 핏물이 천천히 너울진다. 장난스럽게 구무럭거리는 건 저승차사의 손가락. 죽음이 선고된다. 한대명의 가슴팍을 찢으며 말이다.


아아, 강호는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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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는 잔혹하다 24.08.29 446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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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5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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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가르침 +1 24.08.22 561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69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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