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 귀가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손돌
작품등록일 :
2024.07.15 16:39
최근연재일 :
2024.09.02 21:15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3,137
추천수 :
0
글자수 :
119,146

작성
24.07.15 18:10
조회
459
추천
0
글자
11쪽

항주 (1)

DUMMY

항주 제일 기루로 유명한 시화루는 때아닌 한가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기루의 주인인 왕삼의 얼굴에는 무료함이 아닌 긴장이 가득했다. 기루를 빌려 간 이들의 정체를 생각하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루주님.”


자신을 찾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왕삼은 문가를 쳐다봤다. 기루에서 허드렛일하는 점소이 하나가 안절부절 못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냐, 혹시 손님들이 불편하시다더냐? 설마 무슨 사고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게 아니고 1층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손님!? 이놈아, 오늘은 아무도 안 받는다고 했잖느냐! 지금 3층이 계신 분 심기라도 건드리는 날에는 우리 전부 죽은 목숨이란 말이다! 당장 나가라고 해라. 얼른!”


“그게요. 왕팔 형님들이 끌어내려고 했는데 옷깃에 스치지도 못 했습니다요. 덩치는 곰인데 미꾸라지가 따로 없다니까요. 나가시라고 말도 해봤는데 루주님을 불러오라고 하셔서...”


점소이의 말을 듣던 왕삼은 머리를 싸매면서 주저앉았다. 또 무림인이다. 무림인! 밥 먹고 칼만 휘두르는 무뢰배들! 왕삼은 다급하게 일어서면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지금은 전문가의 자세를 보일 때다.


1층에서 소란이라도 났다간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 십수년간 루주로 살아오면서 갈고닦아온 기술을 펼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나서는 왕삼을 본 점소이는 경애의 눈빛을 보이면서 뒤를 따라왔다. 나도 언젠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왕삼이 1층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곰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거구의 사내였다. 머릿수건으로 둘러맨 남자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으나 제멋대로 자라난 하얀 수염과 머리칼이 도드라져 칠십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농부의 기품이 느껴졌다.


그러나 소매가 없는 낡은 상의 덕에 드러난 팔의 우락부락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도저히 농부라고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결정적으로 허리춤에 둘러놓은 무슨 재질인지 시뻘건 적색 쇠사슬은 이 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심지어 쇠사슬의 고리 두께가 엄지손가락만 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으리라. 왕삼은 자기 생각보다 더 폭력적인 모습의 불청객을 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루주요?”


우렁우렁한 사내의 목소리는 사람을 주눅이 들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왕삼은 저절로 자라목이 되려는 자세를 바로잡고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항주 제일루 시화루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다만 오늘은 장사를 하고 있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왕삼은 이마가 땅바닥에 닿을세라 크게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이제 저 황소 같은 놈이 화를 낼 차례였다. 왕삼의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가며 어떻게 저놈을 살살 녹여 내쫓아낼 것인지 계산을 시작했다.


“무림인인가?”


그러나 그의 뒤통수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으니 왕삼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위층으로 가는 계단 입구에 두 명의 인영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씨팔...”


왕삼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을 흘리니 계단 입구에 있던 치들의 표정이 대번 험악해진다. 그제야 자신이 뭔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왕삼이 다급하게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씨팔? 씨팔이라고 했냐?”


“항주 제일루의 루주쯤 되면 모가지에 철심이 박혀있다더니 진짜야?”


양흠은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안 그래도 애새끼 유람길에 끌려나온 것도 짜증 나는데 술 처먹는 자리를 호위하고 있으려니 없던 부아도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거 윗대가리답게 아랫놈 챙긴다고 먹을 거라도 주면 모를까.


상전 없이 살아와 버릇없기로는 교 제일이라는 대공자 아닌가? 당연히 밖에서 웃음소리, 술 마시고 고기 뜯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호위들의 고충은 안중에도 없었다. 거기에 쓸데없이 기감은 좋아서 1층에 누가 들어왔다고 패악질을 부리니 이만저만 기분이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겁대가리 없이 기어들어 온 개새끼를 손 봐주겠노라고 동료와 함께 내려와 보니 기다리고 있었던 건 뭔 개기름이 줄줄 흘러나오게 생긴 돼지 같은 루주 놈의 씨팔이라는 환영 인사였다.


“어이, 저 돼지 새끼 좀 잡아봐. 비명이 돼지 비명일지 사람 비명일지 들어봐야겠어.”


동료는 두말없이 루주에게 걸어갔다. 그 또한 양흠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왕삼은 덜덜 떨면서 뒷걸음질 쳤으나 도저히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망이라도 치지 않아야 저들이 곱게 죽여줄 게 아닌가?


아득해져가는 정신 너머로 왕삼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무림인이냐고 물었건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끼어든 목소리는 눈치 없이 루주에 들어와 이 상황을 일으킨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일을 떠올린 양흠과 동료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자, 둘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앉아 있을 때도 덩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일어서고 나니 이건 커도 너무 컸다. 양흠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큰 것 같았다. 양흠은 놀란 가슴을 달래면서 사내를 뜯어보았다. 나이를 초월한 저 근육을 보라. 저놈은 분명 외공만 단련한 허정개비다.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 양흠은 검을 뽑아 들었다.


“어이, 영감. 죽어서 원망은 하지 마. 우리도 원해서 하는 건 아니니까. 종교가 뭐야. 절이야? 도관이야? 아니다. 두 군데 다 향불 피워 드릴 테니 극락왕생하셔.”


그 말을 끝으로 양흠의 검이 멋들어지게 빛나며 사내의 배때지를 갈라버리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양흠은 칼을 내지르지도 못한 채 거대한 검은 벽이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을 보았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거구의 사내가 장저로 양흠의 턱을 올려 친 것이다. 그리고 양흠의 머리가 그대로 뽑혀 나가며 루주의 천장을 뚫고 승천했다. 왕삼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사태를 보며 생각했다.


‘천상 구경이라도 갔나 보다. 돌아오면 어땠는지 물어봐야 하나?’


그러나 왕삼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으며 떨어져 내린 것은 머리라고 보기 힘든 고기 반죽 덩어리였다.


“아, 미안하네. 사람을 상대로 힘을 쓴 것이 워낙 오랜만이라서.”


양흠의 동료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사내를 보면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 친구가 실수한 겁니다. 사, 사,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칼을 뽑으면 안 됐지요. 선생님께서 잘못 하신 건 하, 하나도 없습니다.”


***


장요령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식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주 제일루를 통째로 빌려서 풍류를 즐긴다는 그의 계획은 지금까지 완벽했다. 방금 식탁에서 돋아난 저 새까만 털 뭉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장요령은 손을 뻗어서 그 털 뭉치를 만져보았다. 뭔가 좀 떡진 머리카락을 만지는 기분이다. 머리카락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아예 내친김에 식탁에서 털뭉치를 잡아 뽑았다.


털 뭉치 아래로는 새하얗고 새빨간 액체에 축축하게 젖은 딱딱한 반구형의 물체가 달려있었다. 장요령은 난생처음 보는 물체에 호기심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게 항주 제일루가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인가? 실로 오묘하구나.’


장요령은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것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때 객실 문을 열고 이량흔이 들어왔다. 신교 제일검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들어온 초로의 노인 이량흔은 식탁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 사람을 해치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사람을 해치다니.”


“그러면 저 머리통 조각은 어디서 구해오신 겁니까?”


그 말에 장요령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그의 곁에 있던 기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식탁에서 멀어졌다.


“식탁에서 돋아났소.”


“식탁이요? 대공자 혹시 약에 손을 대시고 계신 건 아니시겠지요?”


“아니오! 그건 결단코 아니오! 식탁 가운데를 보란 말이오!”


이량흔은 대공자가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단단한 나무 식탁에 큰 구멍이 뚫려있는 것 아닌가? 내친김에 식탁 아래도 살펴보았다. 바닥은 단단한 무언가가 뚫고 올라온 것처럼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대공자 말이 맞습니다. 진짜 뭐가 올라왔군요. 거기 너. 다른 자들은 어디로 갔느냐?”


이량흔은 대공자의 호위로 남겨둔 이에게 물었다.


“1층에 불청객이 왔다는 대공자의 말에 내려갔습니다.”


“불청객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로군.”


“그게 무슨 소리요. 1장로?”


“1층에 온 자가 사람 머리를 쳐서 날려보낸 겁니다. 살수도 아니고 이런 황당한 사고가 일어난 이유는 그거밖에 없겠지요.”


장요령은 이량흔의 말에 실소를 지었다. 여기는 3층이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를 3층까지 단단한 나무바닥과 집기들을 뚫어버리고 위로 올려보낸다? 말이 되겠는가?


“1장로, 아무래도 그건 억측인 거 같소. 사람 머리를 뽑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올려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소? 올라오다가 산산조각 날 것인데.”


“강호에는 별 괴인이 많습니다. 대공자.”


그때 다른 이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양흠과 함께 내려간 자였다.


“대공자님, 어떤 고인(高人)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날? 누군데 감히 신교의 대공자에게 오라고 하는 것이냐.”


그 말과 함께 장요령의 몸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말을 전하러 온 양흠의 동료는 그런 건 안색에도 없는지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그 말에 이량흔은 눈쌀을 찌푸렸다. 대공자의 개차반 같은 성깔은 다른 이들도 충분히 겪었을진대 그런 위협에도 겁을 먹지 않는다니. 이량흔은 머릿속으로 일대의 위험한 고수들을 꼽아보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람 머리를 3층까지 쳐서 올려보낼 무공을 지닌 자는 없었다.


“내가 왜 그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냐?”


장요령은 품에서 두둑한 은자 주머니를 내던졌다.


“가서 전해주어라. 내 호위를 해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기 전에 서둘러 사라지라고.”


“내려가시지요.”


“1장로? 무슨 소리요. 내가 왜 내려가야 한다는 거요?”


“평범한 이가 아닙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려가서 얼굴이라도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시라도 포섭이라도 할 수 있다면 신교에 큰 흥복이요, 교주님께도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량흔의 말을 듣던 장요령은 턱을 매만지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량흔이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상당한 고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에 1층에 들어서는 것 만으로 자신의 기감을 어지럽히는 자라면 분명 뭔가 있어도 단단히 있을 것이다.


“좋소, 다만 별 볼 일 없는 자라면 내가 마음대로 해도 괜찮겠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천하제일인 귀가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죄송한 말씀을 전합니다. 24.09.03 53 0 -
공지 연재 시간 안내 24.08.21 37 0 -
24 호북 (13) 24.09.02 50 0 12쪽
23 호북 (12) 24.08.30 56 0 9쪽
22 호북 (11) 24.08.29 72 0 11쪽
21 호북 (10) 24.08.28 72 0 8쪽
20 호북 (9) 24.08.27 69 0 11쪽
19 호북 (8) 24.08.26 72 0 11쪽
18 호북 (7) 24.08.26 73 0 11쪽
17 호북 (6) 24.08.21 75 0 11쪽
16 호북 (5) 24.08.20 75 0 11쪽
15 호북 (4) 24.08.19 82 0 11쪽
14 호북 (3) 24.08.16 88 0 11쪽
13 호북 (2) 24.08.14 80 0 11쪽
12 호북 (1) 24.08.13 87 0 11쪽
11 안휘 (8) 24.08.12 92 0 11쪽
10 안휘 (7) 24.08.08 104 0 11쪽
9 안휘 (6) 24.08.07 105 0 11쪽
8 안휘 (5) 24.08.06 114 0 11쪽
7 안휘 (4) 24.08.06 120 0 11쪽
6 안휘 (3) 24.07.17 150 0 11쪽
5 안휘 (2) 24.07.17 170 0 12쪽
4 안휘 (1) 24.07.16 232 0 11쪽
3 항주 (3) 24.07.16 296 0 12쪽
2 항주 (2) 24.07.15 321 0 11쪽
» 항주 (1) 24.07.15 460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