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 귀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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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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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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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 (6)

DUMMY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무극천은 입으로 가져갔다. 한참을 이야기했더니 목이 제법 탔다.


“낄낄낄, 20년이나 그랬으면 인간 말종이지. 암 그렇고말고.”


“듣고 싶은 이야기는 충분했는가?”


“그래, 대충 어떤 사정인지는 다 알겠군.”


무극천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묻고 싶은 말은 있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극천이가 첫날밤 새색시처럼 다소곳하니 앉아 있으니 이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래서 내가 못 죽었다니까. 어디 보자 뭘 물어보고 싶으려나? 그래, 콩가루가 된 우리 문파 이야기겠구먼.”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본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네. 무당파는 그래도 반듯한 문파가 아니었나? 자네도 아랫사람 관리를 못 하진 않았고.”


“두려움이란 참 곤란한 것이야. 물과 같단 말이지. 없으면 곤란한데 너무 많으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어. 현 무당파의 문제는 모두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지.”


“두려움이라니?”


범여는 잠깐 멈추라는 듯 손을 내밀더니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에 얽힌 회한과 슬픔, 분노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 한데 모아서 설명하려니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북쪽 오랑캐 놈한테 옴팡지게 깨진 건 잘 알고 있지?”


무극천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마쳤다.


“그래, 끝내주는 경험이었어. 자네도 살려달라고 상대한테 무릎 꿇고 고개를 처박은 채 빌어본 적 있나? 아마도 없겠지. 한 번쯤은 해볼 만한 경험이라네.”


빠르고 경쾌하게 말하는 범여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눈은 한치의 웃음기도 없이 무미건조한 빛만을 발할 뿐이었다.


“음, 나는 그때 너무 무서웠다네. 내가 죽으면 어쩌지? 그간 쌓아온 것들이 있는데. 이렇게 죽는 건 너무나도 억울해. 그게 내 심정이었네. 문파의 체면? 그딴 건 개나 주라니. 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난 너무도 좋다네. 그래서 아직도 잘 살아있거든.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어.”


범여의 어깨가 한번 크게 솟아올랐다가 내려갔다. 그는 초조한 듯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내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고 나니 세상 모든 게 무서웠네.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했지. 아래에 있는 애들은 무당이 살아남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고 했어. 그런데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저 죽어가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고목처럼 멈춰있었지. 웃기지 않은가? 살아남기 위해 체면도 버린 자가 결국 맞이한 게 죽어가는 것이라니.”


범여는 대답을 기대하는 듯 무극천을 바라보았으나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대답을 들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을 범여는 알았다. 애초에 자신도 원하는 답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정답을 들을 수 있을쏜가.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이 되어버린 장문을 놔두고 다른 놈들은 앞으로 튀어 나갔지.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소경이 된 채로 말이야. 그게 당금의 무당일세. 겁에 질린 달구 새끼처럼 정신없게 푸닥거리는 게야.”


“강호의 태산북두인 무당이 무엇을 무서워서 그런단 말인가.”


“세월이지.”


범여는 손으로 무극천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하얗게 세어버린 거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비벼본 무극천은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봤다. 주름 가득한 얼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범여의 모습에서 그는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답을 찾은 것 같구먼.”


“아직은 잘 모르겠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게 되는 법이지. 답도 그런 거야.”


“되먹지도 않은 도사 노릇은 그만 하게나. 잘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도사가 아니니 도사인걸.”


킬킬거리는 범여는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아무래도 그에겐 상처를 다독일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무극천은 축객령에 순순히 따라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장요령이 무료하다 못해 피곤했는지 쭈그려 앉아 작게 코를 골면서 기둥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알아서 깨어난 후 오겠거니 싶어 무극천은 기척을 죽인 채 지나쳤다.


“무 선배님, 일은 잘되셨나요?”


“그렇네, 자네도 피곤했을 텐데 좀 쉬지 그러나.”


“오시는 것만 보고 들어가려고 했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심윤영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객사로 향했다. 무극천은 느릿하게 걸으면서 무당의 전각들을 지나쳤다. 한때 수많은 제자들이 관리하던 건물들은 이젠 떠나버린 손길들을 그리워하며 천천히 시간에 굴복하고 있었다.


흠 하나 없었을 기왓장들은 군데군데 깨지거나 빠진 것들이 보였고, 처마 밑에 걸린 거미줄은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 회색빛 먼지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이런 게 무상함인가, 무당은 이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무극천은 답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외인이었으니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으니 무당도 과거의 성세를 되찾겠거니 기대가 될 뿐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무당의 산문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남궁현이 앉아서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무극천이 오거나 말거나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날도 추운데 이런 곳에 있으면 뼈 상하네.”


그는 남궁현을 일으켜 세운 후에 데리고 객사로 돌아갔다. 내일이 되면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현성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원하던 것이 손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는데. 못내 분한 마음이 그의 잠을 앗아간 것이었다. 시간은 사경에 가까웠기에 그가 걷는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익숙한 거리, 한평생을 살아온 무당산과 균현의 그리운 모습은 그의 마음을 젖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눈에는 낡아가는 것들이 보인다. 저 집 담벼락의 흙들이 언제 저렇게 갈라져 떨어졌던가.


무당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그의 인생 그 자체가 서서히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동안 장문을 설득하기 위해 조르고 또 졸랐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10년 동안 산을 떠났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성과였다.


“이렇게는 안 된다.”


무당의 제자가 후기지수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기 시작하자 현성은 마음 속 아래에서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발목에 불과했다. 그러나 1년이 가고, 2년이 가고 무당이 강호에 이름을 울리는 일이 멀어질수록 두려움은 허리를 넘어 목전까지 차올랐다.


장강의 윗물이 아랫물을 밀어낸다 했던가. 그것이 강호의 숙명이라. 그러나 이는 무당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태산북두라는 말처럼 무당은 오롯이 시간 따윈 비웃어주며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현성의 무당이었다.


“내일이 오면 모조리 달라질 것이다.”


장문인은 이틀 후에 오라고 했지만 그 사이 무극천 일행을 빼돌릴 것임을 현성은 짐작하고 있었다. 장문령패도 다시 우유부단한 그의 손으로 들어가겠지. 그렇게 두어선 안 되었다. 이미 다른 장로들과는 이야기를 끝내놓았다.


각자의 방법에 대한 차이로 분란이 있었으나 장문령패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을 다시 뭉치게 만들었다. 내일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지리라. 그는 그런 다짐을 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장요령은 뼛골이 시리다 못해 삐걱거리는 몸을 이리저리 풀어주었다. 인정머리도 없는 인간들 같으니 밖에서 자고 있으면 들어와서 자라고 말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속으로 연신 투덜거리는 그는 객사를 향해서 걸어갔다.


이미 일행들은 전부 잠에서 깨어난지 오래였다. 장요령을 본 심윤영이 세모눈이 되었다.


“잘한다. 늦잠이나 자고.”


“저년은 아침부터 지랄이야.”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안녕이었다. 장요령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니 좀 참아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숙부님, 일은 다 보셨습니까?”


“그래, 잘 끝났으니 이만 가자꾸나.”


“잘 됐군요. 누구랑 몇 일간 같이 있으니 잠자리가 영 흉흉해서요.”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장요령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마차를 살펴보기 위해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등 뒤에서 뭐라고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그렇게 산문에 가까워져 오자 그는 검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산 아래서부터 기척을 대놓고 풍겨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감지한 것이었다. 장요령은 밖에 매어둔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저들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든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바로 걸음을 붙잡을 것이 뻔했다.


그가 마차를 산문 안으로 들여놓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을 때 무극천 또한 달려왔다. 양손으로 마차를 번쩍 들어 올려 산문 위로 훌쩍 집어 던진 무극천은 앞으로 내달려 부드럽게 마차를 받아냈다.


장요령은 그간에 말을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갑작스런 소란에 심윤영이 달려나왔다. 그 뒤를 범여가 따랐다.


“아무래도 못 참고 달려왔나 보구먼.”


백색 득라의를 걸치고 상투를 튼 세 명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내일이나 오라고 했거늘. 이젠 장문의 말을 아주 개코로 아는구나.”


“상황이 상황이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흥, 말이나 안 하면 밉지나 않지.”


고개를 조아리는 현성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던 범여는 시선을 현성의 뒤로 향했다.


“너희는 이제 아예 현성이 아래에 들어가기로 했냐?”


“아닙니다. 장문, 그저 지금은 뜻이 맞기에 함께한 것뿐입니다.”


성마르고 깐깐한 인상의 도사가 앞으로 나섰다.


“뜻이 맞는다라. 현각, 너도 장문령패가 그리 탐나느냐?”


“제가 어떻게 할 깜냥은 못 되지만 무릇 사문의 신물이 남의 손에 있는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말에 범여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가 아래로 쳐졌다.


“무 대협, 장문령패를 내어주시지요. 저희가 마땅히 장문께 전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건장한 체격의 텁석부리 도사가 나섰다. 그는 무극천을 바라보면서 말했는데 공손한 어투와는 다르게 꼿꼿한 목하며 눈빛에는 은근한 경멸을 비췄다.


- 여보게, 극천이. 내가 하자는 대로 좀 해주게.


갑작스레 들려온 범여의 전음에도 무극천은 얼굴에 미동도 하지 않으며 들려오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침묵으로 일관하신다고 하여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순 없소이다.”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성마른 도사의 어투에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그것은 마땅히 장문에게 돌아가야 할 물건이거늘. 현웅, 네 놈이 감히 내놓으라고 떠드느냐.”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순리에 맞는 말을 했을 뿐이오.”


현웅의 대답에 무극천은 고개를 돌려 범여를 보았다.


“순리라, 너희가 순리를 주장하니 내 기회를 주지. 어떠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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