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 귀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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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
작품등록일 :
2024.07.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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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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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 (7)

DUMMY

기회를 주겠다는 범여의 말에 현성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뭘 꼬나보냐는 듯 한쪽 눈을 치뜬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범여가 퇴색한 건 맞지만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으니.


그러나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지 않다던가. 현성은 범여의 수에 넘어 가주기로 마음먹었다.


“기회를 주신다니 잡아야겠지요.”


“별일이구먼, 너구리 같은 네 놈이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다른 걸 말할 걸 그랬어.”


말을 마친 범여는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두 무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는 무당의 무리는 가는 곳마다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는데 세월에 낡아가는 전각들의 모습에 절로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다 왔다.”


그곳은 무당의 다른 곳과는 다르게 말끔하게 치워진 연무장이었다. 바닥에는 흔한 낙엽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고 청석이 깔린 바닥은 깨어진 돌 하나, 잡초 한 포기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성은 중앙에 놓여진 비무단에 다가가더니 손으로 한번 쓸어보았다.


과거 사형제들과 수련하던 시절이 떠오르는 광경을 잠시 만끽했던 현성은 이내 범여를 돌아봤다.


“여기는....?”


“본산 온 지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해? 연무장이다.”


“제 말은 왜 여기로 왔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설마 겨뤄서 결판을 내자는 말씀이신지요?”


“그래, 다 같은 무림인끼리 이리저리 재볼 것이 있나? 그냥 시원하게 한판 뜨고 끝내자고.”


“저희보고 차라리 자살하라고 하십시오.”


거친 말투에 눈살을 찌푸린 범여는 현성의 시선이 무극천에게 맺혀있는 것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내가 설마 너희가 멸야차를 싸워서 이기라고 할 만큼 정신이 흐려진 줄 아느냐? 내가 지목할 건 저놈이다.”


범여의 손가락을 따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장요령은 자신을 똑바로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더니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저요?”


---


현웅은 산을 내려가는 내내 씨근덕 거렸다. 아무리 상대가 무극천의 조카라곤 하나 강호에 이름 하나 알려진 적 없는 무명소졸 따위를 무당의 제자와 붙이겠다니. 거기에 항의하니 돌아오는 답은 얼마나 밉상인가.


‘왜? 질까봐 쫄려?’


예전부터 불만이었지만 범여의 말투나 행실은 장문인이라 부르기 너무 가벼웠다. 거기다가 이번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고 현웅은 생각했다.


“화 좀 참으시오.”


“내가 지금 그러게 생겼소! 어딜 굴러다니는 시정잡배 따위와 무당의 이름을 붙여놓겠다니 화를 안 내고 어떻게 배기란 말이오!”


현각의 퉁박에 현웅이 폭발했다.


“이건 장문에게만 유리한 것 아니오? 우리는 이겨봐야 강호에 처음 나온 초출, 무명소졸을 꺾은 것이지만 상대는 무당의 제자를 이겼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똥간에 뒹구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냔 말이오! 그것도 우리가 제자를 잘못 길렀다고 욕까지 들어먹을 빌미가 되겠지!”


현웅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러나 낙장불입(落張不入). 이미 기회를 잡기로 한 순간 범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은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일대일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한명에게 세명이 연거푸 도전한다니, 아무리 장문인이 책임감이 없다지만 이건 너무해도 너무한 것이오!”


그 말에는 현각도 동의했다. 범여가 제안한 것은 무당의 제자와 장요령 간의 비무, 거기에 무당은 각 장로마다 세 명을 뽑아서 도전한다는 것이었다. 지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이겨도 남겨 먹을 것이 없는 장사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주 확실하게 이기는 수 밖에 없겠소.”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현성의 입이 열렸다.


“아주 압도적으로 말이오.”


---


어두운 밤 중에 검광이 번뜩인다. 한 줄기로 뻗어나간 빛살은 이내 세네가닥으로 갈라지더니 다시 하나로 모였다. 그렇게 모인 빛살은 마치 쏘아지는 화살처럼 앞을 점하더니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사방을 수놓았다.


연거푸 초식을 쏘아내던 장요령은 인상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검의 끝이 지나치게 흔들렸다. 범여의 생각을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믿고 자신에게 이런 중책을 맡겼는지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생로의 곡절이 중심에 머물기보다는 밖으로 겉도는 것이 익숙한 처지였다. 그런 장요령이 강제로 끌려나 온 셈이니 심사가 복잡한 것이었다.


“연습은 잘 돼냐?”


어둠 속에서 범여가 걸어나왔다. 장요령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석아, 네 손에 대 무당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가문의 영광 아니겠느냐?”


“가문의 영광이고 자시고 칼 맞아 죽지나 않으면 좋겠습니다.”


“생사결을 할 생각은 없다.”


“비무에서는 종종 사고가 벌어지곤 하지요.”


범여는 한쪽 눈을 삐뚜름하게 뜨더니 비무대로 천천히 올라왔다.


“사내놈이 주눅 들어서는. 어깨 좀 펴거라.”


“생긴 것이 이러니 신경 쓰지 마십쇼.”


생각보다 더 날선 반응에 범여는 고민했다. 이 배배 꼬인 놈을 어떻게 풀어야 내일 사고가 안 터질런지 말이다. 잠깐이나마 검술을 견식했을 때 장요령의 공부는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슷한 나이대엔 그와 맞수를 찾아보기 힘들 수준은 되었다.


특히 한 번씩 초식과 초식 사이에서 번뜩이는 기격은 그의 검술이 단순 훈련으로 다져진 것이 아닌 제법 많은 실전을 경험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자신감이라.


“듣자하니 무극천한테 코뚜레가 뚫린 몸이라면서?”


“숙부님 입이 그렇게 가벼울 줄은 몰랐네요.”


“입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이 몸의 심안이 뛰어난 것이지.”


장요령은 범여를 삐딱하니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거였지만 정말 뻔뻔한 노인네였다.


“지금 뻔뻔한 노인네라고 생각했지?”


“아.... 아니요.”


“내 눈엔 다 보인다. 그래, 대체 뭐가 문제인 것 같으냐? 갑자기 비무에 끌려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러느냐?”


“비무야 뭐 열심히 하면 될 일이지만 맡은 소임이 너무 무겁지 않습니까. 제가 무당의 문인도 아닌데 한 문파의 운명을 결정지을 일에 내보내시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범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정석적인 이유라서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더 비겁한 놈일 줄 알았는데 말이다. 책임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키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 놈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책임감은 있구나.”


“절 어떻게 보셨길래.”


“크흠,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듣자하니 투신의 검술을 배웠다면서?”


“그것도 들으셨습니까?”


“뭐, 그렇게 되었지. 네가 비무에 이긴다면 그걸 다룰 만한 기술을 하나 전수해주마. 딱 보니 쓰는 검술 자체가 달라서 소화를 못 시키고 있을 것 같은데.”


장요령은 곰곰히 생각했다.


“혹시 져도 가르쳐 주시면 안됩니까?”


“그러지 뭐.”


“예?”


“솔직히 말하자면 비무는 그냥 요식행위야. 네가 이기면 그림이 더 예뻐질 뿐이지. 져도 다 생각해둔 게 있거든. 그러니 부담가지지 말고 열심히 해봐. 그래도 남자인데 나가면 이기는게 더 좋지 않겠느냐?”


장요령은 이제 범여의 생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비무로 장로들을 무릎 꿇리려는 속셈이 아닌 것인가? 아니라면 왜 굳이 자신을 비무에 내보내려는 것일까? 그런 상념에 빠져있는 장요령의 귀로 범여의 말이 날아 들어왔다.


“다만 지면 나랑 꽤 오래오래 봐야 할거란 것만 알아두거라. 속성이 아니라 제대로 가르쳐 줄 거거든. 근데 그건 너한테 꽤 곤란하겠지? 그러니 이기면 된다. 자, 그럼 어디 실력이나 봐볼까?”


---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무당의 연무대는 오래간만에 북적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각 장로들이 이끌고 온 제자와 더불어서 범여가 연락해 도착한 속가의 수장들이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저 치들은 우리를 그렇게나 백안시하더니, 장문이 부른다니 쪼르르 달려왔군!”


현웅이 치가 떨린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간의 세월 동안 속가의 인원들은 유달리 장로들에게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청하면 마지못해 지원을 해줄 뿐 대놓고 나선 적이 한 번도 없던 자들이 장문이 불렀다고 기어 나와서 얼굴을 비추다니.


불철주야 무당을 재건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입장에선 그야말로 배알이 꼬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성과 현각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것 참, 눈깔로 사람 잡아먹겠네.”


태평무관의 관주 위상보가 세 장로들을 살펴보더니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뚝을 문질렀다.


“기사멸조의 호로자식들이 어딜 가겠소. 지들이 무당을 살리겠다며 뛰어다녀 봐야 하는 짓이라곤 어이없는 도적질이나 쓰잘데기없는 시정잡배들하고 어울렸으니.”


“심 방주의 말씀을 들으니 눈은 사람의 마음을 비춰주는 창이라는 고언(古言)이 참으로 옳습니다.”


거문표국의 황마승이 염정방의 심이원이 한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나저나 장문께서 이렇게 나서실 줄은 몰랐소. 그렇다면 이제 무당도 웅지(雄志)를 펼 때가 되었다는 소린가.”


“웅지를 펼치고 말고는 오늘 나오는 친구가 이겨야 뭐가 나오겠지.”


사실 그들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엉덩이 진득하게 붙이고 있지 못하고 제자들까지 끌고 뛰쳐나온 장로들이 아니꼬운 것은 사실이었기에 범여가 그들을 골탕 먹이겠답시고 벌인 일에 한 손 거드려고 나온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 중요한 비무에 나서는 자가 지금까지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강호초출이라니. 그들로선 불안한 마음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저기 나오는구먼.”


때마침 장요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걸치고 있었던 치렁치렁한 장포는 벗어버리고 움직이기 좋은 무복을 걸친 모습에 속가의 수장들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태가 꽤 나는 것 같소이다.”


“걸음걸이가 균일한 게 어디서 아무렇게나 배우진 않은 모양이로군.”


“듣기론 그 멸야차의 조카라고 하던데 직접 가르친 게 아닐까요?”


“아니오. 무극천의 무공은 신체적 조건을 많이 따지는데 저 청년의 몸으론 그런 걸 감당할 수 없을 것이외다. 더불어 허리춤에 찬 검을 보시오. 복주 출신이라고 하니 묘가검문에서 배웠을지도 모를 일이오.”


그러나 이내 그들의 말이 잦아들었다. 장요령을 따라 무극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세상에 돌아왔더니 정말이었군!”


“체격이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었지?”


“종심(從心)는 충분히 넘었을 것이오.”


“종심이라니 그러면 일흔이 넘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런데도 저런 모습이라니.”


관중들이 서로 놀라움을 표하며 장중을 소란스럽게 만들 때 범여가 느긋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모든 관중들은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반목하는 관계인 장로들 조차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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