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 귀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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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돌
작품등록일 :
2024.07.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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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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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 (5)

DUMMY

“장로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


진궁은 무료했다. 융중산에서 균현으로 통하는 길을 지킨 지도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짐승 새끼 하나 지나가는 것 없는 하루가 되겠다며 뭔가 시간을 죽일 것을 고민하던 찰나, 저 너머에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진궁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마차에 다가갔다.


“멈추시오!”


마차에 탄 이는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심윤영은 무림맹 의각에 소속된 의원이었고 과거에 몇 번 무림맹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던 진궁은 심윤영와 안면이 있는 사이었다.


“심 여관, 여기엔 어쩐 일입니까?”


“균현에 약초를 사러 왔지요.”


“약초요? 왜 의창으로 가시지 않곤.”


“요새 의창 약재상들이 예전 같지 않아요. 무림맹에서 사천 수복을 천명한 이후엔 그쪽으로 물자가 대거 흘러가는 바람에 가격도, 품질도 다 떨어지거든요. 무당산의 영기를 머금은 약초라면 좀 나을까 싶어서 나왔죠.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별일은 아닙니다. 다만 저도 장로님께 명을 받은 것이 있어서 말이죠. 마차를 한번 조사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라는 듯 심윤영이 뒤를 가리키자 진궁은 마차 짐칸을 보기 위해서 걸어갔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뭐 조사하고 말 것도 없었으니 진궁은 통과를 허락했다. 그렇게 길을 가는 마차에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저놈은 붕어 대가린가. 별일은 아니라면서 장로의 명을 받았다는 건 뭐야.”


-조용히 해. 들리면 어쩌려고 그래.


제갈흠이 준 주머니에는 환영진을 담은 돌멩이가 담겨 있었는데 그 덕에 빈 마차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멩이에 담긴 기문둔갑의 힘은 하루를 채 넘길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까진 진궁 같은 자들만 만났기에 환영진을 꿰뚫어 보지 못했지만 균현에 가까워진 지금은 달랐다. 자연스레 긴장이 되는 상황에서 장요령이 쓸데없이 투덜거리니 심윤영이 전음까지 동원해 핀잔을 준 것이다.


“무 선배님, 혹시 뭔가 걸리는 게 있으신가요?”


“아니, 아직까진 없다.”


그사이 주의할 만한 고수의 접근을 감지하기 위해 무극천은 내공을 아주 옅게 퍼뜨려서 30장에 달하는 범위를 살피고 있었다. 이쪽으로 접근하는 자들은 없었으나 경계 부분에선 제법 심후한 내공을 지닌 자들이 감지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으니 준비하거라.”


심윤영은 무극천의 말에 손톱을 뜯고 싶은 욕망을 꾹 눌렀다. 이제 남은 것은 소홍기에게 달려있었다. 전날 융중산으로 향하겠다는 결정에 놀란 소홍기는 장요령의 설명에 수긍하며 마지막 감시망을 돌파할 방법을 마련해 오겠다며 떠났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서둘러줬으면 좋겠다고 심윤영은 생각했다. 어느새 저 멀리서 균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그들을 막고 있는 무당파의 도사 중에는 가장 피하고 싶은 얼굴이 함께 있었다. 현성 장로였다.


“멈춰라.”


그 말에 마차는 순순히 멈춰 섰다.


“뒤에 타고 계신 분들도 나오시지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속여봐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던 장요령과 무극천은 마차에서 내렸다.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습니다. 무 대협.”


“현성이냐? 20대의 홍안(紅顔)이 이젠 백발이 나기 시작하는 어른이 다 되었구나.”


“세월이란 참 무섭지요. 무 대협도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래, 네 말이 맞는구나. 예전 같지 않아. 청정도량을 추구하던 무당이 도적질까지 하고 다니니 말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무극천의 말에 현성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모든 것은 무당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례를 범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지요.”


“무엇을 원하느냐?”


“장문령패, 그것을 돌려 주십시오.”


“네가 감당할 깜냥이 아니다.”


그 말에 현성의 얼굴이 삽시간 무너지더니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


“그것은 무당의 것입니다! 무극천, 그대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비켜라. 네 말대로 무당의 것, 무당의 장문이 결자해지할 일이니 말이다.”


“아니, 장문령패를 내줄 때까진 비켜주지 않을 것이오.”


강짜를 부리는 현성을 보면서 무극천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당의 일원이 장문령패를 내어달라는 것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일이었다. 그러나 현성에겐 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무당이란 이름을 내세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더불어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닌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장문령패를 가져가서 무슨 짓을 벌일진 뭘 상상했든 그 이상을 보여줄 것이 뻔했다.


“자리를 지킬 자신은 있느냐?”


무극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고 절제되지 않은 내공이 넘실넘실 몸에서 피어 오른다.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은 본능이 울리는 경종에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호랑이 앞에 놓인 사슴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성은 그 상황에서도 어렵사리 입을 비틀며 비웃음 지었다.


“자신이 있냐고? 설마 내가 그런 것도 없이 막아 선거라 생각한 거요?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겠지. 여기 있는 누구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시오?”


무극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매인 천을 뜯어내곤 쇠사슬을 풀어내어 오른팔에 감기 시작했을 뿐이다.


“나는 그대의 비밀을 잘 알고 있소. 천하를 오시하며 강호의 협사와 악당들을 가리지 않고 때려죽이던 그 멸야차가 왜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마냥 꼬리를 말며 지금까지 도망 다녔는지 말이지.”


“입조심해라. 애송아.”


“조심해야 할 건 그대요. 무극천, 그대가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던....”


“그만하시지요. 현성 장로님.”


일촉즉발의 상황을 막아낸 것은 소홍기였다. 그의 방해가 못마땅했던건지 현성은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감히 개방 따위가 무당의 일에 관여하겠다는 것인가?”


“개방 따위가 아닙니다. 장로님, 저는 무당의 사자로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사자? 사자라니, 네놈 따위가 감히 무당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냐!”


소홍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매둔 검 하나를 뽑아 높게 치켜들었다. 그걸 본 현성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무극검을...”


“무당의 장문께서 무 대협 일행을 정식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니 장로님께선 길을 비켜주시지요.”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장문께서 그러실 리가 없어!”


현성의 부정을 들은 소홍기의 얼굴에 진중한 빛이 돌더니 추상처럼 외쳤다.


“감히 장문인의 명을 거부하시는 것이오! 이 소홍기, 비록 무당의 제자는 아니나 장문께서 검을 믿고 맡기신 바 장문령을 거부하는 이를 좌시하지 않겠소!”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장문령을 거부한 역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성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장문께선 장로님도 이틀 후에 본산으로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소홍기의 말에 현성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장문령패를 거머쥘 기회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바깥의 난리에도 불구하고 균현은 매우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제각기 생업에 종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늙어서 할 일 없는 노인들은 볕이 잘 드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이리저리 우우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그때 마을로 들어오는 마차를 본 아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몰려들었다. 일행의 모습이 제법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도사, 촌부, 노검객, 거지, 한량까지 어쩌다가 저렇게 몰려다니게 됐는지 모를 모습에 아이들은 가까이 가진 못하고 곁눈질로 살펴봤다.


아이들이 그렇거나 말거나 무극천 일행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정신이 풀려나며 노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됐든 들어오긴 했네요.”


“내가 방법을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소? 개방은 약속을 천금처럼 여기지.”


“그렇게 천금처럼 여기면 사달이 나기 전에 와서 데려가면 어디가 덧나냐.”


“도와줬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말본새하고는.”


“보태준 거 없으면 조용히 해라.”


“심 여관, 저 형장하고 그렇게 친해진 줄은 몰랐소.”


“누가 누구랑 친해졌다고 그래요!”


소홍기와 심윤영이 옥신각신하거나 말거나 장요령은 신경을 껐다. 대신 무극천을 살펴봤는데 현성이 한 말이 심기를 영 불편하게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까처럼 살기를 줄줄 흘리진 않았으나 폭풍전야를 방불케 하는 고요함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말을 붙여 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만뒀다.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것은 무극천만이 아니었다. 또 심사가 불편할 때 괜히 나서봐야 돌 맞는 수가 있는 법이니. 그 즈음에 소홍기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장문의 명을 다른 장로들에게도 전하러 가봐야겠소.”


“조심해서 가세요.”


소홍기는 포권 하더니 가볍게 달려서 모습을 감췄다. 심윤영은 마차를 무당산을 향해서 몰았다. 그렇게 가다보니 무당산의 초입에 접어들었는데 길 한가운데에 한 노인이 주저앉아 한숨을 푹푹 몰아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심윤영이 마차에서 내려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어디 불편하세요? 제가 의술을 좀 아는데 한번 봐 드릴까요?”


“아니, 불편한 건 아니고 내가 무당산에 올라가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


“잘 됐네요. 저희도 지금 무당산에 올라가야 하거든요. 같이 가시겠어요?”


“아휴, 그러면 고맙겠네, 젊은 처자가 맘씨가 아주 고와.”


노인은 심윤영의 부축을 받으면서 마차 뒤 칸에 올라탔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무극천은 뭔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는 건가?”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답했다.


“아니, 자네는 패사(稗史)도 안 읽어보는가? 완전 초쳤구만!”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장요령과 심윤영은 대관절이게 무슨 일이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노인과 무극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근데 남궁현 이 노인네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칼 맞고 오락가락하네.”


“흐흐흐, 이거 우리 무당이 남궁세가보다 잘났다는 증거로군.”


우리 무당이라니, 그제야 둘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불쌍한 노인네 행세를 하고 있던 이가 설마...


“혹시 범여 장문?”


“응, 내가 무당의 장문이야. 소설처럼 방문객들을 시험하고 멋지게 정체를 드러내려 했더니만 저 친구가 완전히 망쳤어.”


“그 나이가 되고 나서도 주책이라니 나잇값이나 하게.”


“쯧쯧, 무극천 이 친구야. 완전 재미가 없어졌구먼. 나이가 들어 할 게 뭐가 있는가.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기엔 도사라서 못하고, 무공을 닦기엔 힘도 숨도 딸리지. 재미 보는 것 말곤 남은 것이 없는 게 늙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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