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 (3)
동굴에 찾아온 정적. 하지만 그 침묵은 단순히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의 안도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맙소사.”
“지, 지금 내가 뭘 본거지?”
들려오는 말들. 트롤이 일으킨 난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용병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공동의 중앙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쓰러진 트롤의 시체와 깔끔히 떨어진 머리. 그리고 그 옆에서 차분한 동작으로 검을 갈무리하고 있는 나.
물론 안타깝게도, 살아남은 용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도슨을 비롯한 몇몇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어쩐지 평범한 신참은 아닐 것 같더라니.”
허. 작게 탄식을 내뱉은 도슨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론. 자네 설마 기사 나으리는 아니겠지? 좀 전에 그건 분명 마나를 사용하는 자의 움직임이었는데.”
“에이, 그럴 리가. 일주일간 못 봤나? 우리랑 같이 엿 같은 음식도 나눠 먹고 노숙도 했는데. 잘나신 귀족 나으리면 그런 몸에 밴 습관들은 절대 못 따라 하지.”
한 명의 용병이 도슨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조금은 설마 했는지, 말을 잠깐 멈췄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시죠?”
갑자기 공손해진 말.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귀한 인물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말에 헛기침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용병. 물론 내 말이 아무런 이유 없이 뱉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나를 다루는 건 재능을 타고난 극소수만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게 반드시 귀족이란 법은 없었으니까.
물론 주로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덕에 마나 사용자의 대부분은 귀족이었지만, 용병과 같은 평민 중에서도 약하게나마 해당 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이들이 있었다.
규모 있는 용병단의 단장이나, 혹은 금패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소수와 같은.
“용병들이 나름의 한 수를 숨기고 있는 게 드문 건 아니지만 이건...”
깔끔하게 잘린 트롤의 머리를 본 도슨이 새삼 어이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뭐, 일단은.”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투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들을 챙길 시간이었다.
“피부터 담자고.”
***
이내 시작된 작업.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용병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가장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트롤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빛. 처음 보았던 기사의 시체를 제외하면 가장 밝았다.
나는 작업을 돕는 척하며 허리를 굽혀 시체 위의 빛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흘러들어오는 빛.
-시전자와의 종족이 달라 완벽한 흡수가 불가능합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이전에 오크 시체에 사용했을 때와 같은 문장. 물론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트롤이 가진 특성의 일부라 할지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나는 눈앞의 시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화악. 그러자 흘러들어오는 빛.
-트롤의 재생력(중급)을 흡수하였습니다.
-단단한 피부(중급)을 흡수하였습니다.
-약간의 체력을 흡수하였습니다.
동시에 느껴지는 새로운 감각. 나는 고개를 내려 팔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트롤이 마구잡이로 내던진, 날카로운 바위 조각에 스쳐 생긴 생채기들이 저절로 스르르 아무는 것이 보였다.
‘...상당한데.’
꽤나 신기하게 보이는 광경.
이 정도면 어지간한 회복 포션보다도 뛰어난 수준의 재생력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인 단단한 피부 역시 매우 유용한 능력이었다.
나는 날카로운 단검으로 팔뚝 근처를 슬쩍 찔러보았다.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단검은 이전과 전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내 피부에 별다른 상처를 남기지 못했다.
나름의 압력을 주자 그제야 생기는 생채기. 내 힘을 생각해본다면 상당한 수준의 강도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가벼운 공격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터.
아주 많은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두 가지 능력.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단번에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벌의 목숨을 얻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휴우. 더럽게 크군.”
그 사이 트롤의 피를 추출하는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녀석의 피를 담는 데에 일반적인 가죽 주머니가 사용되지는 않았다.
어림잡아도 백 년 이상 묵은 트롤의 덩치는 매우 컸고, 채취할 수 있는 피의 양만 해도 상당했으니까.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멀찍이 떨어진 구석으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진 공방의 도제, 라일이 가져온 압축 주머니에 담기는 트롤의 붉은 피.
콸콸거리며 쏟아지는 양을 본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상당하군요. 하하.”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그는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설마 다 차지는 않겠지? 수통이라도 미리 준비해야 하나.”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트롤의 피를 보고 있던 한 용병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피는 트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비싼 부산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채취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일이 안심해도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카루스 공방의 압축 주머니가 담을 수 있는 양은 상상 이상이거든요.”
나름의 뿌듯함이 섞인 말. 작게 헛기침을 한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공방에는 이것보다 더 신기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연구하고 있는 호신용 아티팩트와 같은. 언제 한 번 방문하시면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전과는 달라진 시선과 라일의 말투.
당연했다. 단번에 트롤의 목을 날려버리는 인물이 평범한 용병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까.
“뭐, 여유가 생긴다면 한번 들르지.”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굳이 달라진 태도를 지적하거나 무안을 주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프고 멋모르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도 선을 넘는 건방짐을 보이지도 않았고, 쉽지 않은 추적을 헥헥거리면서도 나름 잘 따라왔으니까.
게다가 알카루스 공방은 대도시 카블락에서도 꽤 이름난 곳.
그런 단체와 끈을 만들어두는 것은 분명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였다.
“자, 그럼 나머지 것들도 챙기자고.”
도슨이 박수를 짝, 하고 치며 모두에게 말했다.
트롤의 부산물 중 가장 값진 것은 피였지만, 다른 것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질긴 힘줄이나 뼈의 일부와 같은 것들.
거기에 더해, 나를 비롯한 용병들은 동굴 곳곳에 쌓여 있는 잔해들도 놓치지 않고 수색했다.
트롤이 오랜 세월 동안 먹어 치우고 남은 몬스터들의 부산물의 양 역시 상당했으니까.
코볼트의 송곳니나 붉은 늑대의 갈기, 혹은 깊은 숲을 헤매다 당한 인간이 지니고 있던 은화 등과 같은.
양이 상당했기에 이것만으로도 나름의 값을 받을 수 있을 터.
이곳까지 몇 주간 이동하며 대부분의 식량과 짐을 소모했음에도 처음보다 몇 배는 무거워진 짐.
하지만 용병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깃들었다.
그사이 피 추출도 모두 끝난 상황. 겉으로는 별반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압축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확인한 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걸로 모두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용병들의 입에 동화 한 닢씩을 물린 우리는 짧은 묵념과 함께 시체에 불을 질렀다.
야생동물에게 뜯어먹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끝난 모든 절차. 모두가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어느새 반나절은 훌쩍 지나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트롤의 동굴을 나온 우리는 묵직해진 배낭을 메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카블락으로의 복귀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처를 빙빙 돌며 수색을 이어나갔던 전과는 달리, 빠르게 직선으로 숲을 돌파했기 때문.
“휴. 드디어 돌아왔군요.”
해가 느리게 저물어가는 시간. 성문을 지키는 병사에게 공방의 문양이 찍힌 자신의 신분증을 내민 라일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리고 도착한 공방 근처. 짐을 내려놓은 라일이 용병들을 보며 말했다.
“저는 곧바로 용병 길드로 가서 확인과 공증을 받겠습니다. 원래의 의뢰금, 그리고 트롤의 피나 다른 부산물에 대한 수익은 약속대로 저희 공방에서 매입 후 공평하게 분배해 드리겠습니다.”
책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실제 추적과 전투를 치른 덕인지, 용병들에게 건네는 라일의 말은 출발할 때와 전혀 딴판이었다.
물론 반쯤은 나와의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이겠지만.
“...”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한 그는 나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후 곧바로 용병 길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블락의 용병 길드와 알카루스 공방이 교차하여 보증하는 의뢰였던 만큼, 의뢰금과 판매 대금은 내일 곧바로 확실하게 전달될 터.
용병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기지개를 켜며 각자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휴, 끝났군. 우리도 이제 좀 쉬자고. 술이나 거하게 한잔 어떤가?”
“나는 술보다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야. 밍밍한 수프 말고 고소한 빵에 기름진 고기나 뜯고 싶군.”
“빌어먹을. 나는 씻는 게 먼저다. 더럽게 찝찝한데.”
“...하암. 나는 좀 자야겠어.”
제각기 마음이 맞는 인원들끼리 흩어지는 용병들. 물론 나는 조금 달랐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숲을 오갔음에도 땀 한 방울도 나지 않은 것은 물론,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으니까.
배가 조금 고프기는 했지만 급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의뢰금과 판매 대금이 준비될 내일까지는 여유 시간이 생긴 상황. 그사이에 몇 군데 들를 곳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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