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카블락
오크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몬스터의 힘도 흡수가 가능하다는 건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기야. 다시 살아난 뒤로는 몬스터를 마주친 적이 없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부분일 수도 있었다.
몬스터는 짐승과 다르다. 어둠을 틈타 야영지를 급습한 이 오크 무리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리고 숲의 웨어울프나 바다의 사이렌을 비롯한 수많은 아인종 몬스터. 혹은 뱀파이어와 같은 고위 등급의 마물들은 실제로 인간과의 경계가 모호하기까지 하지 않던가.
나는 새롭게 깨달은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지금은 한가하게 시체에 손을 댄 채 특전 능력을 사용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씨발, 이 빌어먹을 오크 새끼들!”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용병들을 도와야 했으니까.
타닥. 나는 곧바로 검을 움켜잡은 채 걸음을 내디뎠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와는 별개로, 내 동작은 간결했다.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대검. 오크 한 마리의 머리통을 그대로 날려버린 나는 그 회전력을 그대로 유지시킨 채 몸을 반 바퀴 돌려 검을 사선으로 올려 쳤다.
퍼억.
막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뻗던 오크의 도끼 자루를 그대로 박살 낸 검이 또 한 마리의 오크를 그대로 절명 시켰다.
성인 남성을 상회하는 힘을 가진 오크는 경험 많은 용병에게도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는 최소로 잡아도 중급 용병 이상.
쓸데없는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마나와 기사에게서 얻은 검법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도적들을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동작만으로 충분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전부 죽여!”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오크들은 대부분 쓰러진 상황.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나에 의해 기습이라는 계획이 망가진 순간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
얼마 후 완전히 종료된 전투.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로 드문드문 자리 잡은 용병들이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제길. 십년감수했군.”
오크들의 피가 묻은 검을 지팡이 삼아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용병 한 명이 거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크로딘 역시 무사했다. 자신이 전투에 방해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각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차의 안쪽으로 피신한 덕분.
물론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두 명 당했군.”
천천히 남은 이의 수를 센 용병 한 명이 조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다가 머리에 도끼를 맞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크 스무 마리는 여전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여덟 명 중 두 명이라면, 급하게 일어나 전투를 벌인 것 치고는 양호한 편에 속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피해가 더욱 커졌겠지.
용병들이 주변을 수습하는 사이,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오크의 시체 쪽에 다가갔다.
희미하게 스며 나오는 빛. 특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증거.
“...”
나는 주변을 훑었다.
이 근방에 흩어진 시체들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세기는 모두 비슷했다. 특별히 강력한 이는 없는 모양.
그렇다는 건 뭐 하나를 고른다고 해서 딱히 손해를 보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시전자와의 종족이 달라 완벽한 흡수가 불가능합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이번 사용은 특전 활용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얻는다는 데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얹었다.
스으으. 그리고 흘러들어오는 빛.
-‘테르쉬 부족의 힘찬 전투 함성 내지르기’를 흡수하였습니다.
-‘오크의 꺾이지 않는 투지’를 흡수하였습니다.
-약간의 체력과 근력을 흡수하였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들. 동시에 새로운 지식과 힘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직관적으로 체감된 것은 역시 힘. 새로운 활기가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은 다시 겪어도 신선한 감각이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폈다하며 강해진 힘을 느꼈다.
‘나쁘지 않은데.’
처음 흡수한 기사의 힘 일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몬스터의 능력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지만.
짧은 볼일을 마친 나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대충 정리했다.
“실력이 상당하더군, 카론.”
옆쪽에서 들려온 말. 다른 용병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혼자서 산적 무리를 박살 냈다는 게 과장이 아니었어.”
“오크의 두꺼운 목을 그냥 단칼에 날려버리던데.”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내 전투 장면을 본 용병들이 저마다의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짧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주변 정리가 대충 끝나자.
“저, 밤중이라도 곧바로 다시 이동을 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크로딘이 나를 포함한 용병들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리고 문득 느껴지는 시선들.
고개를 들자 상인 크로딘을 포함한 모두의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내 의견에 당연히 따르겠다는 것처럼.
물론 별다른 부담감이 들지는 않았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은 용병의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몬스터들은 오크들의 피 냄새를 싫어하지. 오늘은 더 이상의 소란은 없을 거야. 체력을 회복하고, 내일부터는 속도를 두 배로 높이는 게 좋겠군.”
끄덕여지는 고개들. 내 말에 결론이 내려진 듯, 크로딘을 비롯한 인원들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야영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날이 밝음과 동시에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전보다 훨씬 높인 속도.
인원은 둘이 줄었지만 스무 마리의 오크에게서 뽑아낸 피를 간간이 뿌리면서 이동한 덕인지, 추가적인 습격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게 만능은 아니었기에, 기본적으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직 그리 경험이 많지 않은 크로딘은 어제의 일이 제법 충격적이었던지, 나에게 몬스터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물론 나는 별달리 개의치 않고 그의 질문 모두를 능숙하게 받아주었다. 기본적으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인물인데다, 미래의 거상이 될 상인이었으니까.
그렇게 며칠간의 강행군을 이어간 끝에.
“저, 저기!”
가장 선두에서 걸어가던 한 명의 용병이 확 밝아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시가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언덕 너머로 서서히 드러나는 앞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슬금슬금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펼쳐진 드넓은 평야에 위치한 커다란 성과 마을.
돌로 이루어진 높은 성벽, 그를 감싸고 있는 해자가 보인다.
“도착했군.”
중부와 남부를 잇는 교두보이자 수많은 길드와 단체들이 중심을 두고 활동하는 곳.
목적지였던 대도시, 카블락이었다.
***
마땅한 신분증이 없는 나였지만 성문 통과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상인 크로딘의 신분은 확실했고, 자유도시인 카블락의 성문을 오가는 사람이 워낙 많았기에 그가 마차를 호위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들까지 모두 꼼꼼히 확인하지는 않은 덕이었다.
“자, 여기 잔금입니다.”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물건들을 처분한 크로딘이 나를 비롯한 용병들에게 은화를 차례차례 건네주었다.
밀과 보리가 가득 실려 있던 마차는 텅 비어있었다.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거래가 잘 성사된 듯했다.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것과는 달리 흥정에도 꽤 재능이 있는 모양.
하기야. 어련히 알아서 잘 처분했겠지. 미래에는 남부를 주름잡는 상회를 세울 사람인데.
작은 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안에 들어있는 금액은 40실버.
원래 받기로 했던 금액인 30실버보다 많은 액수였다.
사망한 두 명에게 지급될 금액인 60실버를 남은 여섯 명에게 공평하게 나눈 모양.
“뭐, 어차피 썼어야 했던 돈이니까요.”
크로딘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리 흔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 푼이라도 덜 주려는 상인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저도 이번 상행으로 많이 배웠거든요. 특히 카론 당신에게.”
멋쩍은 웃음과 함께 건네진 말.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나중에 또 볼 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크로딘의 마지막 말.
“저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
또다시 바쁘게 도시를 떠난 크로딘과의 인사를 마친 나는 곧바로 근처의 용병 길드로 향했다.
새롭게 용병패를 발급받기 위함이었다.
물론 처음 흡수한 것은 기사의 힘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용병이었다.
애초에 기사는 확실한 출생 신분을 가진 자들만이 사관학교에서의 오랜 시간을 걸쳐 몇 가지 공을 세운 뒤 임명되는 방식. 함부로 기사를 사칭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기에는 오히려 용병 쪽이 더 편하고 익숙하기도 했고.
“어서 오시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무슨 볼일이신가?”
입구에 들어서자 들려오는 말.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새로 용병 등록을 하려고 하는데.”
“아, 저쪽으로 나가면 되오. 대략적인 절차는 알고 왔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낮은 등급인 동패는 그리 어렵지 않게 습득이 가능했다.
애초에 돈 되는 거라면 가리지 않고 받는 용병의 문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애초에 대부분은 처음 몇 번의 의뢰를 수행하는 도중에 알아서 걸러지니까.
‘꾸준히 실적을 쌓아서 은패를 얻는 비율은 매우 낮지.’
나는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건물의 뒷마당에 들어섰다.
한쪽에 마련된 목각인형들.
입단 테스트라고 부르기도 뭐한, 그야말로 몸이 멀쩡한지를 알아보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옆에 목검 보입니까? 네. 그걸로 가볍게 허수아비를 내려치─”
안내하는 소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가 내지른 목검이 허수아비를 둘로 쪼개었다.
“...”
가로가 아닌 세로로.
힘을 너무 많이 썼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지금 이게 무슨...”
놀라서 반쯤 넋이 나간 소년을 뒤로 한 나는 다시 건물로 들어왔다.
“...상당하시군. 이름이?”
“카론.”
슬쩍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처음 나에게 뒷마당을 안내했던 사내가 놀란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음. 칼밥깨나 먹어본 것 같은데. 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묻지는 않겠수다. 이 바닥에는 워낙 이런저런 이들이 많으니까.”
마지막으로 몇 푼의 은화와 동화를 가입비로 내민 나는 곧바로 내 이름과 체격, 눈동자 색과 같은 정보가 작게 새겨진 동패를 받을 수 있었다.
이걸로 첫 번째 목적은 달성. 간단하게나마 신분과 소속을 만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바로 건물 밖을 나가지는 않았다. 내가 향한 곳은 벽의 한쪽에 걸린 큼지막한 나무 게시판.
용병 길드에서 주선하는 여러 가지 의뢰들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쓸만한 의뢰가...’
나는 빠르게 목록을 훑었다. 너무 쉽거나 보상금이 적은 건 패스였다.
그렇게 다양한 의뢰들을 쭉 읽어내려가던 순간.
‘...이건.’
내 눈에 띈 의뢰 하나.
<타로스 숲의 트롤 사냥 의뢰>
나는 내리던 시선을 멈추고 해당 의뢰가 적힌 종잇조각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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