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전 (1)
“영지전?”
내 설명을 들은 아르젠시아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단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한다면 가장 확실하고 완벽한 해결책이 될 방법.
“뭐, 나도 아예 떠올리지 않은 부분은 아니지만...”
그녀가 말끝을 미간을 좁혔다.
“헤리튼 백작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겠네.”
아르젠시아 역시 일단 백작을 설득하기만 하면 이쪽으로 승산이 확 넘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
“서둘러야겠네. 들리는 바로는 헬몬트 백작이 벌이는 전투는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니.”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대답했다.
“그래. 곧바로 가볼 생각이다. 시아 너도 바빠 보이는데.”
나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단출한 여행자용 로브와 단단히 꾸려진 작은 배낭. 그녀 역시 카블락을 잠시 떠날 계획인 듯했다.
“맞아. 검은 뱀과 관련해서 꽤 가능성 높은 흔적의 실마리를 발견했거든.”
아라하드 네크로폴리스에 대한 이야기.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나름 결연했다.
페르닐 숲의 거대 거미에 대해서 별다른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탓인지, 이번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려는 모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헤리튼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아르젠시아가 나를 도울 부분은 없다. 차라리 그 사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터.
“뭐,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영지전은 변수가 많은 법이니까.”
카블락을 중심으로 벌어질 영지전. 아르젠시아는 내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스윽. 로브를 써 귀를 가린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 자유 도시는 내 터전이기도 하니까.”
***
헤리튼 백작이 머무는 본성, 헤스타라로의 이동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르젠시아와의 대화를 마친 나는 곧바로 카블락을 떠나 말을 몰았고, 다시금 익숙한 도시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커다란 성문 앞에서 멈춰선 나는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번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
조금 전에 누군가 도착한 건지 주변이 북적였다.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에서 내린 나에게 정중히 이야기한 병사. 나는 무슨 일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잠깐 성을 떠났던, 백작령 소속의 병력이 한 무리가 막 복귀한 모양.
제법 규율이 잡혀 있는 것이 나름 인상적이었다.
“음?”
그때 멀리서 나와 시선이 마주친 한 명의 사내. 병력의 선두에 선 그는 지난번 마주친 인물이었다.
케프먼 트레일. 몽마를 처리하고 이곳을 떠나기 직전에 대장간 앞에서 나누었던 기사.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은 그가 말 위에 올라탄 채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케프먼 경.”
그가 내 가벼운 인사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 카론 경. 아니, 경이라는 호칭은 생략해달라고 했었지. 반갑소, 카론. 생각보다 더 빠른 재회로군.”
활기찬 어조. 영지의 경계 부근에서 발견된 오크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성을 떠난다고 했었지. 저번 대화를 떠올린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크와의 전투는 잘 끝난 모양입니다.”
“아, 하하.”
내 말에 그가 쾌활하게 웃었다.
“녀석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렸지. 가벼운 산책 정도는 되더군요.”
성공적으로 끝난 듯한 전투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한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영주님께 볼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네. 동맹 건으로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잘 되었군. 같이 들어가시죠.”
케프먼의 말이 떨어지자 재빨리 비켜서는 병사. 나는 다시 말에 올라탄 후 그와 함께 본성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문서상으로 정리된 협의 내용이 아닌, 내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에서 헤리튼 백작 역시 어느 정도 목적을 짐작하고 있었을 테니.
“...선제공격이라.”
백작의 표정은 담담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 옆쪽에 앉은 기사 케프먼 역시 침묵을 깨지는 않았다.
핵심적인 설명은 마친 상황.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헤리튼 백작은 정의로운 인물이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헬몬트 백작이 먼저 노골적인 시비를 걸어왔다는 것도, 그의 지배 아래 놓인 성과 마을의 농민들이 그리 좋지 못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도 헤리튼 백작이 자신의 병사를 희생시킬 이유는 되지 않았다.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로군.”
물론 그를 설득시키기 위한 조건은 확실했다.
영지전에서 승리하면 얻게 될, 헬몬트 백작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영토.
애초에 자유 도시 카블락은 그 넓은 땅을 관리할 여력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헤리튼 백작에게 그 지역을 약속하는 것이 나은 선택일 터였다.
아무리 왕국이 혼란스러워 수도에서 개입할 여유가 없다고 해도, 백작위를 가진 인물이 표면적으로 나서는 것이 사태를 정리하기에 더 자연스럽기도 했고.
“지금이 최적의 시기입니다.”
나는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대가 전투를 마무리 지으며 병력을 아직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상황.
더 넓어진 영지를 바탕으로 군사를 새로 모집하고 재정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헤리튼 백작이 곧바로 반대의 뜻을 말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터.
나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마냥 자비롭기만 한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그랬더라면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지금의 영지를 유지하지도 못했겠지.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헤리튼 백작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거대한 새 영지를 얻고, 자유 도시 카블락은 지긋지긋한 적을 처리하고 교역로의 평화를 얻는 것이로군.”
깔끔하게 정리한 말. 백작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허면 자네는.”
강렬한 눈빛. 그의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이 싸움으로 무엇을 얻나, 자유 도시의 기사 카론?”
나는 그의 말에 옅게 웃었다.
자유 도시의 기사.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단어 조합이다.
기사는 사관학교에서의 생도나 오랜 종자 기간을 거친 후 자신이 평생 충성을 바칠 영주의 서임을 받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
물론 가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작위를 가진 귀족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 도시에 기사라는 직함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애초에 그 사실은 백작인 헤리튼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터.
어쩌면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헤리튼 백작의 어조에는 조금의 비웃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나를 한 명의 기사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확히는 자유 도시의 용병. 냉정하게 따진다면, 언제든 이기적으로 도시를 버리고 떠나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버나드와의 대화에서 생각한 것처럼, 내가 그 길을 가장 후 순위로 미룬 것은 단순한 정의감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내가 터전으로 삼은 자유 도시 카블락에 대한 노골적인 시비와 간섭을 먼저 지속적으로 걸어온 것은 상대방이다.
게다가 헬몬트 백작은 기사 하나를 죽여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린 나를 확실하게 인지한 채 이를 갈고 있을 터.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지금,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더 현명했다.
물론 거기에 더해서.
‘두 명의 기사. 이름이 벨리트와 페르네겐이었나.’
홀로 찾아간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헬몬트 백작 휘하의 기사 둘.
어쩌면 지금껏 상대했던 이들 중 가장 강력할 가능성이 큰 그 두 명은 사실상 이 근방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상.
영지전이 끝난 후 오래 지나지 않아 더 넓은 지역으로 떠난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 두 명의 기사를 확실한 발판 삼아 힘을 더 키울 생각이었다.
“글쎄요.”
나는 눈앞의 백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저는 책임이나 희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거짓을 말할 생각은 없다.
“따라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적어도 이번 영지전을 거치며 손해는 보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확신에 찬 말. 주변이 잠시 침묵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유 도시의 기사다운 대답이야. 마음에 드는군.”
피식. 내 대답에 작게 웃은 헤리튼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더 묻지는 않지. 이기적인 마음으로 벌인 일도 얼마든지 이타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이니.”
결정을 내린 것인지, 백작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케프먼.”
“네, 영주님.”
자신의 기사를 본 그의 입에서 확신에 찬 말이 선언하듯 흘러나왔다.
“기수들을 소집해라. 영지전을 준비한다.”
***
헤리튼 백작의 결정은 영지전이 성립되는 데 사실상 가장 결정적인 요소. 확답을 받아낸 지금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카블락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뭘 맡아달라고 하셨습니까?”
“도시 병력의 지휘관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두 명의 의원과 버나드의 의견이 현재 균형을 유지하는 쪽으로 내려지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을 그대로 날려버리는 듯한 요청.
하지만 나는 기쁨을 표현하는 대신 턱을 쓰다듬었다.
“조금 갑작스럽군요. 일개 용병에게 병력의 지휘를 맡긴다니.”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상할 건 없긴 했다.
내가 지금껏 카블락에서 이루어낸 일들은 한낱 용병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알카루스 공방의 일을 시작으로 사교도를 발각해 처리하고 지하 수로의 암살자와 주제를 모르고 날뛰었던 초보 기사를 쓰러뜨린 데다, 얼마 전 페르닐 숲까지.
이미 도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었다.
뭐,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나는 어디까지나 확실한 특색이나 능력을 가진 적의 시체에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서 했던 행동이었지만.
“물론 카론 자네가 언제고 이 도시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네.”
의원 카일의 말.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계속해서 붙잡을 생각은 없네. 다만 이번 영지전에서만큼은 이쪽을 이끌어줄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하지. 그것도 적들의 기사에게도 밀리지 않을 실력을 가진 인물이 말이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처럼 내가 언제고 이 도시에 머무를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비교적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지만, 새로운 적이나 기회의 등장에 따라 얼마든지 멀리 떠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버나드와 의원들이 제시하는 바는 영지전이 끝나면 개별 행동에 대해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겠다는 것.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긍정적인 요소일 수도 있었다.
병력의 일부를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영지전에서 내 목표를 이루기 더 수월해진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반발이 있지는 않겠습니까. 그래도 용병 출신이라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내 말에 또 다른 의원인 길라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모두가 동의한 사항입니다. 카론님이 카블락에서 이룬 업적들은 이미 유명하니까요. 뭐, 그리고.”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곳 카블락에서는 누구든 중책을 맡을 수 있습니다. 능력만 충분하다면요.”
많은 세금을 내고 있는 덕에 유지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도시의 정체성.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모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환해지는 얼굴들. 특히 지금껏 큰 부담을 안고 있었던 버나드의 얼굴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첫 지시를 내렸다.
“곧바로 도시의 병력을 모아주십시오.”
헤리튼 백작 역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있을 터.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적이 다시금 힘을 모으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영지전의 시작. 나는 서늘하게 식어 있는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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