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값 (1)
전투가 벌어진 디에타 평원은 산기슭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과거에도 이쪽으로 왔었지.’
돌이켜보면 나름 훌륭한 방향 선택이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 넓은 평야를 혼자 돌아다녔다가는 수색병에게 금방 발각되었을 테니.
자신들 소속이 아님이 분명한, 신분패도 없는 낯선 사내. 병사들이 곧바로 목을 베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추적이 어렵고 발각당할 위험성이 낮은 산기슭은 바람직한 이동 경로였다.
물론 그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겁에 질려 현실을 반쯤 부정하며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인 것뿐이었지만.
‘후.’
나는 가벼운 숨을 내뱉으며 걸음을 멈췄다.
주변은 온통 울창한 숲뿐. 들판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겨우 반나절 이동한 것에 비하면 이동한 거리가 상당했다. 아마 이쯤에서 조금 쉬어가는 것이 나을 듯했다.
입고 있는 망토를 펼쳐 바닥에 깐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물론 단순히 지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금 먼 거리를 이동하기는 했어도, 기사의 힘을 일부 흡수한 나는 최소한 상급 용병 이상의 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자리를 잡고 앉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후우우...”
완벽하게 내 것이 된 지식. 마나 호흡법.
느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공기 중의 마나가 천천히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더럽게 조금이긴 했지만, 이게 어디인가.
이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얻을 수 없었던, 타고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다는 힘인데.
‘나쁘지 않네.’
한참 동안 명상에 가까운 호흡을 마친 나는 육포와 마른 과일을 먹은 뒤 물로 입가심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옷 안에 사슬 갑옷을 걸친 채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산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행동을 할 여유도 있었다. 예를 들면.
콰직!
나는 검격 한 방에 쓰러진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잡았을 만한 덩치의, 사나운 야생 멧돼지가 깔끔하게 숨이 끊어진 채 내 앞에 쓰러져 있었다.
왜 이렇게 쉬워 이거.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짐승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상당한데.’
놀라운 점은 두 가지였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훨씬 빠른 속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름 모를 기사에게서 가져온 검이 생각보다도 더 훌륭하다는 것.
흉폭한 성향과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진 회색 가죽 멧돼지의 육중한 몸은 거의 두 동강이 나 있었다.
힘과 스피드, 좋은 무기가 만들어낸 결과.
나는 검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야금술에는 별다른 지식이 없지만, 이 검이 내가 항상 사용해오던 싸구려 철검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건 확실했다.
표면에 묘한 무늬가 비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진 대장장이의 작품일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드워프의 작품일 수도 있고.
“...”
눈에 띄지 않게 낡은 천으로 감싼 검집에 다시 검을 집어넣은 나는 쓰러진 멧돼지를 보고 피식 웃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있었던 귀족 애송이의 사냥 보조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마주쳤던 멧돼지도 이 정도 크기였던 것 같은데.
‘아니, 이것보다는 좀 작았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발단이 되어 이런 기회를 맞이할 줄이야.
뜻하지 않게 일이 좋게 풀린 셈이었다.
물론 힘을 조금 더 키우고 나면 그 애송이를 비롯한 이들을 손봐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마땅한 값은 치러야지.’
어쨌거나 당한 건 똑같이 갚아주어야 하는 법이니까.
뭐, 나처럼 죽음의 문턱을 다시 넘고 말고는 개인 사정이었고.
짧은 상념을 마친 나는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멧돼지의 두툼한 살점을 발라내었다.
회색 멧돼지의 살점 대부분은 퍽퍽하고 쓴맛이 나지만, 넓적다리 살 일부는 맛이 꽤 괜찮았다.
슬슬 어두워지는 주변. 나는 능숙한 손길로 부싯돌을 부딪혀 불을 피웠다.
불을 피운 나는 암염 덩어리를 조금 갈아서 부순 소금을 잘 구운 고기에 뿌려 먹은 뒤, 나머지를 바싹 말리기 위해 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걸어놓았다.
망토를 대충 펼쳐 잠자리를 마련한 나는 용병으로 다져진 방향 감각과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쯤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내 기억대로라면, 첫 번째 목적지는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
3년 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벗어나, 겁에 질려 정신없이 산길을 떠돌던 내가 목숨을 건진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커다란 행운을 마주쳤기 때문.
물론 하루 이틀 정도 산을 돌아다니며 야생동물을 마주치지 않은 것도 운이 따라준 것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
아무런 무기도, 식량도 없이 산을 돌아다녔다면 결국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
“...!”
저 녀석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산길. 나는 앞쪽에 멍하니 서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양손 가득 마른 나뭇가지들을 들고 있는 소녀.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그녀의 아버지.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산을 돌아다니던 나를 처음 발견하고 도와준 이들이었다.
느껴지는 반가움. 물론 녀석은 나를 모를 터였기에 멋대로 인사를 하거나 다가가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는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나를 발견하고 먼저 달려왔...
“히, 히익!”
하얗게 질린 얼굴. 두 팔 가득 들고 있던 장작을 내팽개친 녀석이 후다닥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반응이 왜 달라.
***
물론 그 답을 찾는 것은 간단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던 탓에 겁먹어서 질질 짜며 시체 밭에서 도망쳐 산길을 헤매다가 탈진한 인물과, 철저한 무장을 갖추고 피로 물든 배낭까지 멘 인물의 첫인상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런. 딸이 오해를 한 모양이군. 자네가 이해하게. 여긴 사람이 좀처럼 오지 않는 곳이거든.”
다행히 오해를 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닥에 떨궈진 장작을 주워들고 그 뒤를 따라간 나는 곧 마주친 그녀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톰슨이고 이쪽은 내 딸 레나. 보다시피 산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
“카론입니다. 바깥이 꽤 혼란스럽긴 하죠.”
“...아까는 죄송했어요.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조금 놀라서.”
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강인한 인상을 가진 톰슨과 악수를 나눈 나는 사실을 약간 섞어서 내 상황을 설명했다.
“저런.”
잘 모르는 지역에서 용병 임무를 하다가 길을 잃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는 내 말에 톰슨이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젊은 친구가 고생깨나 했겠군그래. 어쨌거나 다행이군. 편하게 쉬다가 가게.”
“감사합니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내가 품속에서 돈을 꺼내려 들자 레나가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여관도 아니고. 돈은 안 받아.”
“...”
그대로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숲속의 오두막도, 넉살 좋은 웃음도,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친절함도.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마침 곧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거든. 같이 들게.”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인연을 다시 되새기기 위함만은 아니다.
정확히는, 그보다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들은 죽는다.
그것도 한 달 후에, 처참히.
***
“음식이 입에 맞았을지 모르겠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이쪽을 바라보며 건네지는 한스의 말에 나는 싹 비워진 그릇을 내보이며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훌륭했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거친 용병 생활에 익숙해진 내 입맛은 매우 관대한 편이었을뿐더러, 그걸 고려하더라도 좀전의 저녁 식사는 꽤 훌륭한 편이었으니까.
두툼하게 썰어 알맞게 구운 숙성 사슴 고기와 곱게 빻은 곡물가루를 넣은 고소한 수프. 빵에 발라먹을 신선한 야생 벌꿀까지.
소금을 대충 뿌려 구운 육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름의 만찬이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고개를 흘끗 돌려 단단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유리로 만들어진 창 따위는 없었기에 바깥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산에 자리 잡은 사람은 이 친절한 부녀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녀석들도 이때쯤 흘러들어왔겠지.’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이 오두막에 참상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탈영병이나 범죄자 등으로 구성된 무리.
경비대를 피해 산까지 달아난, 보잘 것 없는 오합지졸들이 모여 무슨 짓을 벌일지는 너무나도 뻔한 것이었다.
일반 농민들을 상대로 하는 산적 짓거리. 아마 녀석들에게는 현상금도 걸려 있을 터였다.
“흠흠.”
나는 오랜만의 손님에 신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찻잔을 준비하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나는 홀로 다음 목적지인 도시를 향해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만나보고 가야지.’
신선한 벌꿀과 사슴 고기에 대한, 그리고 과거의 도움에 대한 값을 건네줄 차례였다.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