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의 스킬 줍는 방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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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현파
작품등록일 :
2024.07.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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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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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DUMMY

나는 눈을 깜빡였다.


반쯤 주저앉아 있는 자세. 어질거리는 머리.


방금 전까지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낡은 여관. 나를 둘러싼 용병 녀석들. 이어진 전투와 마지막 순간까지.


‘...’


역시 죽지는 않았네.


뭔지 모를 그 특전이 효과를 발휘하긴 한 모양이다.


‘가만.’


문득 느껴지는 이상함.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주변. 여긴 여관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실내가 아니었다.


넓은 평원. 주변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 사방에서 풍겨오는 죽음의 냄새.


이곳은 싸움이 끝난 전쟁터였다.


‘여긴...!’


누구라도 놀랄만한 상황. 하지만 내가 다소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3년간 용병으로 굴러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3년 전.


정확히는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에 처음으로 떨어졌던 날 눈을 뜬 장소.


용병놈들과의 전투로 입은 치명상은 모두 사라진 상태. 나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워낙 강렬했던 탓에 뇌리에 박혀버린, 과거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설마.


현대인의 상상력과 용병의 직감이 합쳐져 현재 상황에 대한 추측을 완성시킨다.


‘과거로 돌아온 건가?’


처음 이 세계로 떨어졌던 그 날로?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어쨌든 다시 살아났으니까.


“...허.”


나는 옅은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을 짚으며 바닥에 앉는 과정에서 우연히 한 시체에 손이 닿은 순간.


-특전, 운명의 천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숙련도가 낮아 지식 흡수를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글자.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그러자 보이는 희미한 빛무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빛이 이름 모를 시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 한 구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자 보이는 희미한 빛들. 주변에 널브러진 모든 시체들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특전 ‘운명의 천칭.’


그래. 발동 조건이 죽음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되살려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의미했다.


그럼 원래랑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회귀가 그 효과인 줄 알았는데.’


진짜는 이거였나. 나는 다소의 얼떨떨함을 느끼며 턱을 쓰다듬었다.


물론 이제는 죽으면 진짜 끝이라는 것이겠지만 뭐, 그거야 모두가 원래 그렇지 않은가.


현대인의 지식, 그리고 3년간 구른 용병의 냉철함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식 흡수. 꽤나 직관적인 명칭이었다.


하지만.


‘숙련도가 낮아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했지.’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는 건 흡수의 기회를 이런 이름 없는 병사에게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전쟁터. 수많은 시체가 즐비한 곳.


가장 쓸모 있는 시체, 그러니까 가장 강력했던 인물을 찾아야 한다.


***


이 전쟁터에서 가장 뛰어났던 인물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곳은 조용했지만, 시체들은 오로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각자의 강함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흘러나오는 빛.


물론 대부분은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희미했지만, 그중에는 나름 밝은 빛을 띠고 있는 시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밝은 빛을 띠고 있는 시체는 단 한 구.


가까이 다가간 나는 상대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우그러진 갑옷과 값비싸 보이는 장검. 그리고 너덜너덜한 망토에 새겨진 문양까지.


기사다.


마나의 힘을 다루는 초인.


물론 누군지는 모른다. 망토에 새겨진 문양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시체가 이 소규모 전쟁터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인물이라는 것.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시체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떠오르는 설명.


-대상과의 과도한 격차로 인해 천칭이 크게 기울어져 완벽한 지식 흡수가 불가능합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설명. 하지만 고민할 것은 없었다.


기사의 힘은, 일부라 할지라도 일반 병사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일 테니.


나는 심호흡을 한 후 빛무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화아악!


낯선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하급 마나 호흡법을 흡수합니다.

-약간의 힘과 민첩, 체력의 일부를 흡수합니다.

-카르펜 식 검술(기초)을 흡수합니다.

-카르펜 식 격투(기초)를 흡수합니다.

-중급 승마술을 흡수합니다.

-기사도에 대한 지식 일부를 흡수합니다.

-기본 예법에 대한 지식 일부를 흡수합니다.


주르륵 떠오르는 문장들. 나는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부 맞아?’


신체 능력이 향상되며 활력이 차오른다.


동시에, 머리가 핑 도는 감각과 함께 새로운 지식들이 머릿속에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기사 사관학교에서 배우는 검술이나 격투술 일부. 승마와 예법과 같은 고급 지식이 마치 내 것처럼 자연스럽게 습득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감각. 세상을 이루고 있는 본질에 한 단계 가까이 다가간 느낌.


‘...이게 마나.’


일반인과 초인을 가르는 가장 절대적인 기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급급했던 지난 3년간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힘.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마나가 심장을 타고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소 어지러운 머리를 털었다. 이 정도로 만족스러운 보상을 얻을 줄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이전에도 희미하게 보였던 시체들의 빛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내가 그만큼 강력해진 덕이겠지.


나는 시험 삼아 근처의 병사에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떠오르는 문구.


-숙련도가 낮아 지식 흡수를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예상했던 바. 별다른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졌다.


3년간 간절히 원했던 특전의 발동에 흥분해 눈앞의 병사에게 지식 흡수를 사용했으면 이 보물덩어리를 놓쳤을 테니.


게다가.


‘얻을 수 있는 게 지식 흡수뿐만은 아니지.’


나는 주변에 널브러진 병사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미약한 온기가 남아있는 데다, 시체를 뜯어먹는 까마귀들이 몰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투가 끝난 지는 대략 삼십여 분.


‘여긴 디에타 평원. 가까운 영지가 케른 성이었나.’


나는 차분하게 시간을 계산했다.


이 현장에 대한 수습, 혹은 지원을 위한 인원들이 도착하기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는 상황.


“너무 슬퍼하지는 말라고, 기사 나으리. 네 물건은 내가 소중하게 사용할 테니.”


나는 허리를 숙여 이름 모를 기사의 옆에 떨어져 있는, 값비싸 보이는 장검과 검집을 집어 들었다.


스릉. 질 좋은 특제 강철 검이다.


이가 쉽게 나가 일주일에 한 번씩 교체했던 용병 시절의 무기들과는 비교하기도 힘든.


아마 이 검집만 처분해도 몇 골드는 족히 받을 수 있겠지. 빈털터리나 다를 바 없는 지금은 아주 요긴한 자산이다.


나는 주변을 훑었다.


깨어나자마자 주변에 가득한 시체에 놀라 토악질을 하며 정신없이 도망쳤던 과거. 하지만 지금의 나는 3년간 별별 고초를 겪으며 살아남은 용병이다.


‘자, 다음은.’


나는 짧게 묵념을 한 후, 주변의 시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과거와 마찬가지로, 처음 눈을 떴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빈털터리였다.


가진 거라곤 추위도 막기 힘든 얇은 가죽옷 한 벌뿐. 흔한 동화 한 푼마저 없었다.


따라서 여러 번의 행운이 겹쳐 간신히 살아남았던 과거와 같은 개고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챙길 수 있는 것들은 챙기는 것이 현명했다.


물론 용병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다 기사의 힘 일부를 흡수한 지금은 시작점부터가 달랐지만, 장비나 돈은 있어서 나쁠 점이 전혀 없었으니까.


나는 능숙한 손길로 비교적 멀쩡한 장비와 물건들을 챙겼다.


이 이름 모를 기사는 대단히 모범적이고 청렴한 인물이었던 건지, 장검을 제외하면 아무런 장신구나 금화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터에는 일반 사병뿐만 아니라 용병들의 시체도 있었기에 이동을 위한 물건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가벼운 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단검 몇 자루, 잘 드는 손도끼.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주머니와 작은 소금 덩어리. 부싯돌과 약간의 육포와 건조 과일, 그리고 동화와 은화를 비롯해 여행에 필요한 몇 가지 잡동사니들.


그것들을 여벌의 옷과 함께 피에 젖은 배낭에 넣은 나는 두꺼운 여행자용 망토를 둘렀다.


순식간에 그럴듯한 용병의 모습이 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욕심은 금물이었다. 쓸데없이 무거우면 이동에 방해가 될 뿐이었으니까.


뭐, 굳이 더 가져갈 것도 없었고.


까아악. 하늘에서는 어느새 포식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는 행동을 멈추고 땅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드드드드.


그러자 한껏 예민해진 귓가에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이쪽으로 말을 탄 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는 적게 잡아도 수십. 아마 전황 파악이나 뒷수습을 위한 인원들일 터.


신분패 따위도 없는 상황에서 저들과 마주쳐 좋을 것은 없었다. 게다가 기사의 시체가 지니고 있던 장검까지 챙긴 상황이니.


나는 자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물건을 챙긴 기사와 몇몇 병사, 용병의 입을 작게 벌려 동화 한 닢을 물렸다.


죽음의 강을 건널,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


짧은 작업을 마친 나는 묵직한 가방을 가볍게 들쳐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볼까.’


빙글빙글 돌며 점점 낮게 활강하는 까마귀들을 흘끗 바라본 나는 전쟁터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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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수도 (1) +16 24.09.11 14,721 477 11쪽
44 흑마법사 +25 24.09.10 14,711 532 12쪽
43 수도의 감사관 +15 24.09.09 15,145 472 12쪽
42 들판의 배회자 (4) +10 24.09.08 15,512 473 12쪽
41 들판의 배회자 (3) +21 24.09.07 15,632 518 11쪽
40 들판의 배회자 (2) +21 24.09.06 16,132 494 11쪽
39 들판의 배회자 (1) +12 24.09.05 17,037 484 12쪽
38 영지전 (6) +18 24.09.04 16,758 558 13쪽
37 영지전 (5) +21 24.09.03 16,528 573 11쪽
36 영지전 (4) +13 24.09.02 16,981 521 12쪽
35 영지전 (3) +16 24.09.01 17,060 546 11쪽
34 영지전 (2) +16 24.08.31 17,409 534 12쪽
33 영지전 (1) +21 24.08.30 18,328 514 12쪽
32 숲의 거미 (2) +24 24.08.29 18,508 530 12쪽
31 숲의 거미 (1) +19 24.08.28 19,237 560 11쪽
30 복귀 +16 24.08.27 20,004 563 12쪽
29 대화 (3) +14 24.08.26 19,843 613 12쪽
28 대화 (2) +10 24.08.25 19,944 567 11쪽
27 대화 (1) +14 24.08.24 21,005 588 12쪽
26 기사의 자격 (3) +17 24.08.23 21,133 581 12쪽
25 기사의 자격 (2) +15 24.08.22 20,476 596 12쪽
24 기사의 자격 (1) +23 24.08.21 21,409 623 15쪽
23 지하 수로의 암살자 (3) +15 24.08.19 20,944 591 14쪽
22 지하 수로의 암살자 (2) +12 24.08.18 21,486 584 12쪽
21 지하 수로의 암살자 (1) +17 24.08.17 22,472 593 10쪽
20 베리드 용병단 (3) +13 24.08.16 22,093 628 11쪽
19 배리드 용병단 (2) +10 24.08.15 21,994 601 11쪽
18 베리드 용병단 (1) +10 24.08.14 22,978 609 11쪽
17 리베르 상회 (3) +11 24.08.13 23,183 621 11쪽
16 리베르 상회 (2) +12 24.08.12 23,598 622 10쪽
15 리베르 상회 (1) +14 24.08.12 25,079 60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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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동 (2) +20 24.08.02 27,297 741 10쪽
5 이동 (1) +22 24.08.01 28,092 73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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