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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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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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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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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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월담(2)

DUMMY

맹수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문을 열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안에 무엇이 있을 지 다양한 가능성을 저절로 떠올랐다. 주옥이 상상한 ‘이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생물’은, 다름아닌 백주귀였다. 지금 그와 맞닥뜨렸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수많은 눈들이 일제히 주옥을 향했지만, 그들 중 사람의 것은 없었다. 우리에 갇힌 네 발 짐승들은 전부 사람보다 훨씬 야만적이고 흉폭한 안광을 쏘아 댔지만, 인간 특유의 교활함은 보이지 않아 차라리 안심이 됐다. 그제야 주옥이 내부를 둘러봤다.


‘신기한 짐승이 이렇게 많았구나. 명나라 땅에서는 살 것 같지 않은 짐승이 절반이 넘어.’


하나같이 으르렁거리며 주옥을 노려보는 맹수들 사이에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짐승이 많았다. 사자후라는 이름으로만 들어봤지, 실물로는 처음 보는 사자, 표범보다 크고 호랑이보다 작은, 온 몸이 주옥만큼이나 새까만 고양이과 맹수. 명의 변방국을 통틀어도 저런 짐승은 살지 않았다.


고양이과 맹수 뿐이 아니었다. 얼굴은 원숭이를 닮았지만 주변 머리가 쟁반처럼 넙데데하고, 키가 5,6척은 되어 보이는 붉은 털 짐승이 물끄러미 주옥을 바라봤다. 온몸의 근육과 털이 위협적이었지만, 얼굴은 순한 편이었다.


‘성성(猩猩,유인원)인가 보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성성을 보고 고개를 돌리자, 백섬마황이 말한 대로 거대하고 코가 긴 녀석도 있었다. 운남에서 간혹 발견된다고 알려져는 있지만, 직접 본 경험은 없는 동물, 대상(大象, 코끼리)였다. 백섬마황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지금 이 맹수들과 비교해도 주옥의 덩치는 상당히 큰 편이었지만, 그런 그의 머리도 이 코끼리의 어깨보다 낮았다.


그 외에도 두꺼운 나무나 철로 된 우리에 갇힌 짐승들이 무수히 많았으니, 늑대나 표범 정도에게는 눈길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각종 진기한 짐승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이곳의 광경에, 주옥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늘 견문이 엄청나게 넓어졌구나. 비록...’


비록 저 수많은 짐승 중, 만족스러워 보이는 개체는 단 하나도 없었지만. 이 곳에 들어와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갇혀 있는 짐승들의 태도는 두 가지였다. 살기등등하거나, 체념했거나.원래 육식을 하는 맹수들이 주옥을 바짝 경계했고, 성성이나 대상처럼 흉포하지 않은 짐승은 체념하여 움직임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식이었다. 그마저도 일반적인 경향성일 뿐, 체념한 늑대나 으르렁거리는 원숭이도 있었다.


‘회임한 백마들의 마구간이 최악인 줄만 알았는데, 여긴 한 술 더 뜨는구나.“


지난번 백씨마장에 침임했을 때, 회임한 백 마리의 암말들이 모인 마구간을 보고 주옥은 마방이 아닌 공방(工房)에 들어선 기분을 받았다. 그것도, 최고의 경주마가 태어나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 내는 데 혈안이 된 음험한 공방. 그곳에서 말들은 생명을 가진 동물이 아니라, 완성품이 나올 때까지 무한정 쏟아부어지는 재료 취급을 받았다. 이것이 백주귀가 짐승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지금 이 맹수 우리로 가득찬 곳은 그 때보다 더한 충격을 주었다. 나무, 또는 금속으로 된 창살 뒤에 갇힌 짐승들은 창살에 가로막힌 게 한이라도 되는 듯, 주옥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 했다. 또는, 아예 주옥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양쪽 다 제대로 된 짐승의 반응이 아니었다.


‘이 녀석들도 어딘가 뒤틀려 있어. 설마...?’


주옥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코끼리에게로 향했다. 이곳에서 가장 크면서도, 가장 초탈해 보이는 동물, 그에게 다가간 주옥은,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잠깐 손 좀 대도 되나?’


코끼리의 큰 눈이 주옥을 향했다. 텅 비어있던 그 눈이 곧 이채를 띠었다. 주옥에게 흥미가 생긴 게 분명했다. 코끼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이 동의를 표하는 방식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고갯짓이었다. 그 몸짓에, 주옥은 따로 맥을 짚어 보지 않아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코끼리도 상단전이 열렸다.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이 짐승의 지능과 사고방식은 충분히 인간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전보다 조금 더 예의를 갖춰 전음을 보냈다.


'그럼 실례하지.'


그리고, 방금 전 손이라 칭했던 앞발을 코끼리의 몸에 갖다댔다. 곧 이 거대한 짐승 안에 펼쳐진 임독양맥이 눈에 보이듯 훤히 느껴졌다. 예상대로, 내력이 통하고 있었다. 만약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이었다면, 이 코끼리 역시 강제 타통을 당했을 것이라 단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경험하지 못한 짐승이니만큼, 신중을 기하려 전음을 통해 물었다.


'몸 속에 힘, 강제로 주입당했나?'


그 말을 들은 코끼리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굵고 기다란 코를 움직여, 코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그런데, 코끝의 움직임에 따라 흙바닥에 남는 자국의 모양이 익숙했다. 다름아닌 한자, 그것도 익숙한 자였다. 可(옳을 가), 주옥이 정확히 짚었다는 뜻이었다. 그 한 글자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문자를 쓰다니. 여기 갇혀 지내면서 문자의 쓰임새까지 알아차리려면 눈치와 지능이 엄청나게 높단 소리다. 게다가 이 코끼리도 강제 타통을 당했어. 그렇다는 것은...'


이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의 지능은 백섬마황과 회영보다, 어쩌면 자신보다 높을 지도 몰랐다. 단지 그 사실을 표현할 방법과 의지가 없었을 뿐. 이 살기등등한 곳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눈앞에 있는 이 짐승의 지능을 이용해야 했다. 주옥은 재차 물어야 했다.


'혹시 여기 있는 다른 짐승들도 마찬가지인가? 다들 당신처럼 강제로 힘을 주입당한 거야?'


그 말을 듣고, 코끼리는 바닥에 쓰여 있는 可자 앞을 코 끝으로 톡, 톡 건드렸다. 다시 한 번 맞혔다는 의미였다. 그제야 주옥은 이 공간의 존재 의의, 나아가 백씨마장의 진짜 목적까지 알 수 있었다. 백주귀의 터무니없는 야망에 공포가 엄습해 왔다.


'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짐승들도 네 뜻대로 개조하려는 거냐, 백주귀? 그걸로 대체...'


한청검. 이 순간 떠오른 것은 한청검이었다. 정확히는, 한청검의 소실 경위. 마교의 수중에 떨어진 한청검이 백주귀의 손에 있다. 달리 말해, 마교와 백주귀는 연관되어 있다. 이제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주옥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럴수가. 무림지사에 풀어놓으려는 거야. 조련된 맹수들을 마교 측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주옥이 말의 몸을 얻은 뒤 정확히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절이 변해가는 걸 보면 몇 달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다. 그 동안 말로 지내는 데 너무 열중해 미처 신경쓰지 못했지만, 그 동안 무림이 평화로웠을 리가 없다.


점창의 멸문 소식은 아무리 늦어도 열흘 내로 무림맹에 전달됐을 것이다. 그럼, 그 다음 무림맹이 취할 수 있는 대응은 뻔했다. 마교와의 전면전 선포. 적어도 지금의 무림맹은 망설임 없이 마교 척살에 나설 집단이었다. 현대의 무림맹주, 남궁세가주 남궁창(남궁창)은 마교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인물이었으니.


그럼 그 뒤 수 개월간 무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마교를 필두로 한 사파연합과 정파 무림맹이 자비 없는 혈전을 펼쳐 왔을 것이 분명했다. 주옥이 알기로는 40년 전 무림을 휩쓸었던 정사대전이 다시 개전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터였다. 이런 당연한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니,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너무 멍청했어. 조금만이라도 생각해 봤으면 진작부터 느꼈을 텐데, 이 당연한 걸 이제서야...!"


당혹감에 휩싸인 채 주변을 둘러봤다. 호랑이, 늑대, 표범, 이름모를 맹수들이 당장이라도 주옥의 목숨을 끊어놓고 싶어 했다. 그들이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 지켜보니, 마치 각각의 짐승이 한 명의 무인이 된 듯 상당한 기파를 내뿜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들 하나하나의 무위를 가늠해 봤다.


'역시 강해. 보통 짐승보다 훨씬 더. 마교가 정말 이들을 수족처럼 부리게 된다면, 제아무리 무림맹도 버틸 수가 없다.'


비교를 위해 생전 한청검의 주인, 합명이 떠올렸다. 철응회라는 작지 않은 회의 수장이면서 철응검의 명수였던 그는, 일대에 이름을 떨친 고수였다. 그의 경지를 떠올려 봐도, 지금 눈앞에 있는 표범을 제압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 호랑이나 사자와 맞붙는다면 필패했을 것이다. 무림맹에도 합명 수준의 고수는 그리 많지 않으니, 이곳에 모인 맹수들만 부려도 마교측 전력은 배로 늘어날 것이다.


무림을 떠난 몸이지만 그래도 평생을 명문정파의 장로로 살아온 자, 말의 몸을 가진 주옥의 갈등이 심화됐다. 이 짐승들이 그대로 마교의 전력에 합세한다면, 획기적인 전력이 가세하지 않는 한 무림맹은 확실히 패배한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역시 지금처럼 인간사, 무림사에 관여하지 않아야 할까? 아니면 사문과 사형사제들의 원수인 마교를 저지해야 할까? 주옥에게는 아주 길게 느껴지는, 그러나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한 줄기 결연한 의지가 솟아올랐다.


'...해야 해.'


뭘 해야 해? 내면의 또다른 주옥이 물었다. 뭐라도 해야 해. 점창 장로 주옥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 끔찍한 장소의 문을 열어둔 채 다른 건물을 찾아 나섰다. 목적지는 백주귀의 침소가 있는 곳이었다. 정확한 장소는 몰랐지만, 백섬마황의 말에 따르면 이쪽 구역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주옥은 생각했다.


'백주귀를 죽인다. 그걸로 끝을 봐야 해.'


백씨마장의 짐승 부대 육성 계획을 저지한다, 그것으로 마교를 저지한다. 이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결과적으로 사문 점창이 속했던 정파 무림맹의 편을 드는 꼴이 되겠지만, 그건 부차적인 이유였다.


'무림의 동향은 인간이 결정지으라 해. 정파 무림맹의 위선과 가식이 이기든, 마교와 사파연합의 무질서와 방탕함이 이기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 놈들의 머릿속을 뜯어고쳐 가면서 무림지사에 개입시키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짐승이면서 인간인 내 입장에선.'


이게 주옥의 최종 입장이었다. 무림맹도, 사파연합도 아닌 제 3지대, 그러나 천하에 단 하나, 자신만이 속한 지대에서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주옥이 우려한 것은 정사대전이 아니었다. 짐승들의 참전으로 정사대전이 사파연합의 승리로 끝난다면, 무림맹의 잔존 세력은 과연 그 패배를 수용하고 얌전히 물러날까? 그럴 리가 없다. 그들도 짐승들을 연구하기 시작할 것이고, 종래에는 무림 전체가 짐승들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그런 전쟁터는, 인간의 것 하나면 족했다. 사람이 들어갈만한 건물을 탐색하는 주옥의 눈길과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집중한 채 살펴보니 사람이 잠들어 있는 건물은 짐승들이 있는 건물과 그 기척이 크게 달랐다. 거기다 사람들의 거처로 쓰이는 건물은 동물들의 거처보다 확연히 작고, 마루가 지면에서 띄워져 높이 설치되어 있었으니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저 건물들 중 어느 곳에 백주귀가 있는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야심한 밤, 피로를 덜 느끼는 무인이라도 잠들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하나씩 살펴 봐야 하나? 아니면...'


이럴 때 쓰기 적절한 능력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일 지는 몰랐지만 어찌 됐든 연마해 온 능력이었다. 주옥은 주위를 둘러보고 적당한 위치를 물색했다. 그 능력을 활용해 백주귀를 찾으려면 시야가 넓어야 했다. 곧, 크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에 올라간다면 자신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으면서, 일대 건물들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조금 뒤, 주옥은 바로 그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는, 지긋이 눈을 감고 백주귀의 얼굴을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그의 얼굴이 눈에 보이듯 선하게 떠오르자, 주옥은 이윽고 전음을 날렸다.


'밖으로 나와라, 백주귀.'


얼굴을 보지 않는 전음, 진일보한 주옥의 전음입밀이 이 일대 어딘가에 있을 백주귀의 머릿속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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