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새글

장정소고
작품등록일 :
2024.08.04 20:46
최근연재일 :
2024.09.16 19:40
연재수 :
44 회
조회수 :
2,212
추천수 :
141
글자수 :
261,334

작성
24.09.05 09:35
조회
13
추천
2
글자
13쪽

백씨마장(2)

DUMMY

어느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모현 경마장 역사상 이런 착차가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경주 결과가 나오면 항상 광기에 가까운 열기가 이곳 경마장을 지배하곤 했지만, 워낙 충격적인 결과에 이번만큼은 관중들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게다가 우승마가 도망쳐 버렸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가장 당황한 것은 진행요원이었다. 경마장에서 경주가 열릴 때마다 내력이 담긴 목소리로 경주를 진행하고 결과를 발표하던 자로, 이 일을 경마장이 생긴 이래 벌써 10년간 해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우승 기수가 우승마를 몰고 도망치다니! 대체 어떡하란 말이야?!’


방금 압도적인 격차로 결승선을 통과한 말과 기수는,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속도를 높여 경기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진행요원은 침착하게 우선 순위와 착차를 발표하며 시간을 벌어 봤지만, 이 다음 시상식이 문제였다. 말에게 휘장을 걸쳐 주며 군중의 환호를 유도하는,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식이 곧바로 이어져야 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사라져 버렸으니 난처함이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 애송이 놈! 무풍이라 했던가, 운 좋게 명마를 얻어 탄 걸로 몇 번 우승했다고 기고만장해져서 이런 짓을... 내 책임지고 다시는 말을 못 타게 해 주마!’


어차피 우승권에 들락거리는 경주마들은 정해져 있었으니, 시상대에 올라서는 말과 기수, 마주들도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이번에도 2,3위는 익숙한 말들이 차지했으니, 그들의 기수들과 마주 백주귀는 이미 경기장에 내려와 시상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번엔 이례적으로 2,3등 말들의 마주가 같으니 마주는 한 사람만 내려와도 족해, 준비가 유독 빠르기도 했다. 진행 요원은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 무안해 하며 말했다.


“이것 참, 죄송합니다. 보셨다시피 흑풍암제와 그 기수가 도망쳐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 지 판정단이 의논중입니다.”


그러자, 백주귀가 굳은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무례한 젊은이군. 응당 실격시켜야 하지 않겠나.”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높낮이 없이,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울려퍼졌다. 진행 요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주귀를 바라봤다. 이 자가 말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백주귀의 과묵함은 백씨마장의 은밀함에 방점을 찍는 백미와도 같았다. 그랬던 그가 오늘은 곧장 입을 열었으니 크게 이례적이었다.


여태껏 시상식에서 수도 없이 백주귀를 마주해 왔지만, 의사표현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고갯짓으로나 대신할 뿐, 그는 어떤 상황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소리내야 할 일이 있다면 항상 기수가 대신 나설 정도였다. 그런 자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진행요원이 충격을 느끼는 사이, 관중의 함성 소리가 급작스럽게 커졌다.


급히 시선을 돌려 보니, 아까 바람처럼 퇴장했던 흑마가 나갔던 통로를 통해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나갈 때와 달리 기수는 없고, 빈 안장만 얹고 달려오고 있는 흑마의 입에는 종이 한 장이 물려 펄럭였다. 그 모습을 본 백주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행요원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어쩌고 말만 돌아온단 말인가. 그런데, 흑마는 곧장 시상대 앞의 진행요원에게로 달려오더니 그 바로 앞에 멈춰서 입에 문 종이조각을 들이밀었다. 받아든 종이조각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뒷간이 너무 급해 실례했습니다.가능하다면 저를 빼고 시상식을 진행해 주십시오. 혼자 상을 받을 수 있게 말을 훈련 시켜 놨으니 문제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기수 무풍.]


기가 막힌 일이었다. 자기 맘대로 말을 몰아 퇴장하더니, 이런 장난 같은 쪽지 한 장으로 무마하려 하다니. 진행요원의 심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패였다. 하지만.


“줘 보게.”


백주귀가 종이조각을 요청했다. 그 목소리에 거부하기 어려운 힘이 있어, 진행요원은 저도 모르게 종이를 쥔 손을 그에게 뻗어 넘겨주었다. 백주귀가 종이조각을 받아들고 잠깐 읽어 보더니, 실소를 픽 터뜨리며 진행요원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가?”


진행요원이 대답을 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직도 그 백주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진행요원은 잔뜩 긴장한 채 대답했다.


“예! 그것이...! 역시 기수가 자리를 비운 채 수상하는 건 전례가 없기에 이대로 실격 처리를 할까 생각중입니다!”


“아니지, 아니야.”


진행요원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백주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몸짓에 담긴 위압감도 대단해서, 진행요원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아, 아닙니까? 아까는 실격이 온당하다고...”


“생각이 바뀌었네. 그 무풍이란 젊은 기수가 이렇게 예의를 지켜 사정을 설명하지 않나. 게다가 뒷간 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니 따져물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야. 저 열광하는 관중들은 또 어떤가. 백섬마황을 상대로 대차승을 거둔 흑마가 실격당한다면 저들이 납득하겠나? 뭐, 개인적으로는 시상식을 훈련해 뒀다니, 말을 키우는 입장에서 그 성과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걸 제외해도 젊은 기수에게 실격은 가혹한 것 같군.”


여전히 백주귀의 말투에는 어떤 높낮이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행요원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퍼지는 것을 느꼈으니 그건 백주귀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방금 그 특유의 목소리로 백섬마황의 대차패를 언급했다. 그 말이 어떤 말인가. 10년 역사의 경마장을 지배해 온 수많은 말들 중에서도 최고라 여겨지는 말 아니었던가. 그런 말이 크게 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순간, 백주귀의 안광이 번득였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게 분명한 눈빛이었지만, 한낱 진행요원이 그런 것을 따져물을 수는 없었다. 한껏 위축된 채, 진행요원은 겨우 대꾸했다.


“마, 말, 말씀이야 옳지만 대중의 의견만 고려할 순 없겠지요. 정 그러시다면 판정단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고...”


“유감이군. 자네라면 내 말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자네, 내력을 얻은 게 소과채(小寡寨) 시절 아니던가?”


그 말에, 진행요원의 안색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마지막으로 주최측의 권위를 지켜 보려던 시도는 무참히 무너지고, 공포가 진행요원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진행요원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흑풍암제는, 기수 없이 수상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차가운 말투만큼이나 굳어 있던 백주귀의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진행요원은 무표정한 얼굴보다 그 미소가 백 배는 무서웠다. 백주귀는 온몸이 굳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진행요원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네. 역시 중모현 경마장의 일등공신은 자네야.”


이렇게 말하고 백주귀가 멀어져 갔지만, 진행요원은 여전히 공포를 이겨낼 수 없었다. 소과채란 이름 때문이었다. 그 이름은 다름아닌 산적 집단, 그것도 이곳 중모현과는 멀리 떨어진 산동에 자리잡은 산적 집단의 것이었다. 백주귀의 말대로, 진행요원이 내공을 배운 곳이기도 했다. 공포에 못지 않은 의문이 차올랐다.


‘대체...대체 내가 그곳 출신인 건 어떻게 안 거지? 여기 겨우 자리잡은 뒤로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그는 과거에 실제로 산적이었다. 마음을 고쳐먹은 뒤, 연고가 없는 곳을 찾아 정착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 외엔 무공을 쓰는 일조차 삼가며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겨 온 그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금 경마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데, 느닷없이 현의 제일마장주가 자신의 과거를 들춰냈으니 청천벽력 그 자체였다. 진행요원은 아직도 오금이 저릿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냥 돈 많고 말 잘 키우는 마장주가 아니다. 그 눈빛, 그 정보력. 반드시 무림일파와 연관되어 있어. 강호를 떠난 몸으로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자로군.’


* * *

겨우 시상대에 오른 주옥은, 휘장을 등허리에 걸치고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환호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말 머릿속에서는 지금 상황과 그닥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참사를 막아서 다행이야. 백가놈의 상태는 어떻지?’


그는 지금 자신의 바로 옆에 2등,3등마의 마주 자격으로 서있는 백주귀를 살펴보고 있었다. 백주귀는 늘상 봐 오던 차가운 무표정으로 서서 군중의 갈채를 받아내고 있었으나, 주옥은 평소와는 다른 점을 진작에 파악했다.


‘진행요원이 백주귀의 눈길을 피한다. 백씨마장 말은 항상 3위 안에 드니 두 사람은 서로 질릴 정도로 얼굴을 본 사인데도... 뭔가 있군. 백가(가) 자식, 협박이라도 했나?’


시상대에서 백주귀를 자주 만난 것은 주옥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그 때마다 백주귀의 기도를 유심히 살펴 왔다. 그가 최종적으로 짐작한 백주귀의 무위는, 점창의 장로 중에서도 수위급에 해당할 정도. 무림의 영역이 아닌 이곳 중모현에서는 당연히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강자였다. 그렇다면, 역시 일천하나마 무공을 깨우친 진행요원에게 위력을 행사하는 것도 간단했다. 여기까지 짐작한 주옥은 생각했다.


‘저 백주귀란 놈이 선한지 악한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긴단 말이야. 뒤에서 사람을 협박하고 다니는 것 정도는 우습겠지. 게다가 저놈의 검을 항상 차고 다니니, 도저히 백가놈을 좋게 생각해 주기가 어렵다.’


한청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 길이 없었다. 전음입밀을 갈고 닦으면 훗날 이 백주귀를 낚아볼 수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마저도 명확한 계획이 아니라 막연한 기대에 가까웠다. 백주귀를 힐끔거리는 주옥의 심정이 착잡해졌다.


“...그럼, 경주마와 기수, 마주들은 퇴장.”


시상식을 끝나는 진행 요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말에, 말과 사람들이 일제히 시상대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옥은 등허리에 걸친 휘장 밑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오는 걸 느꼈다. 평범한 손이 아닌, 내력을 담은 손이었다.


‘손? 내력? 이건 설마?!’


그 정체를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주귀. 그가 부지불식간에 주옥을 진맥했다. 점혈을 하려는 의도는 없이, 목적은 말 그대로 진맥. 흑풍암제의 몸에 내력이 흐르는지, 그 내력의 성질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손이 혈자리에 닿은 것은 찰나였지만, 흑마의 몸에 담긴 내력의 정보가 넘어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너도 개조품이었군. 누구 작품이냐.”


백주귀가 주옥과 나란히 걸어가며 주옥의 귀에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읊었다. 그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는 맹수를 연상케 해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백주귀의 시선과 목소리, 어느 쪽에서도 주옥을 신경쓰는 태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 아무도 그가 흑풍암제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옥 역시 너무 놀라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백주귀의 독백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알아듣는 거 다 안다. 대답은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새 주인이 되어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이렇게 말한 뒤, 백주귀는 홱 방향을 틀었다. 주옥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뒷모습 뿐이었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한참 지켜본 뒤에야, 겨우 맨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력을 간파당한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 뒤로 이어진 말들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화룡점정은 그가 내린 결론. 즉 흑풍암제의 새 주인이 되겠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끝이 났으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어느새 뱃속의 긴급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온 무풍이 옆에 서서 주옥을 불렀다. 머리를 돌려 무풍을 바라보자, 무풍이 물었다.


“돌아왔어요. 시상은...잘 끝났죠?”


아무래도 탈이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듯, 무풍의 말에서는 여전히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주옥에겐 그것마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중얼거리듯 전음을 보내 겨우 대답했다.


“아니. 뭔가 크게 잘못됐어.”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골드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24.08.27 17 0 -
공지 연재 시각 : 매일 19시 40분(저녁 7시 40분) +1 24.08.04 50 0 -
44 환수 NEW 19시간 전 5 0 13쪽
43 처단(4) 24.09.15 10 0 13쪽
42 처단(3) 24.09.14 7 0 13쪽
41 처단(2) 24.09.13 8 1 13쪽
40 처단 24.09.12 9 1 13쪽
39 재월담(2) 24.09.11 11 1 13쪽
38 재월담 24.09.10 10 1 13쪽
37 협상(2) 24.09.09 11 1 13쪽
36 협상 24.09.08 13 1 13쪽
35 백씨마장(4) 24.09.07 12 2 12쪽
34 백씨마장(3) 24.09.06 17 2 12쪽
» 백씨마장(2) 24.09.05 13 2 13쪽
32 백씨마장 24.09.04 14 3 13쪽
31 예감(2) 24.09.03 18 3 12쪽
30 예감 24.09.02 17 2 13쪽
29 경마왕(2) 24.09.01 19 2 12쪽
28 경마왕 24.08.31 18 2 13쪽
27 삼쌍승식 작전(4) 24.08.30 19 2 13쪽
26 삼쌍승식 작전(3) 24.08.29 23 3 12쪽
25 삼쌍승식 작전(2) 24.08.28 25 3 13쪽
24 삼쌍승식 작전 24.08.27 28 3 13쪽
23 무풍(2) 24.08.26 27 4 13쪽
22 무풍 24.08.25 36 4 13쪽
21 중모현으로(3) 24.08.24 40 4 13쪽
20 중모현으로(2) 24.08.23 48 3 14쪽
19 중모현으로 24.08.22 51 3 13쪽
18 새로운 만남(2) 24.08.21 54 4 13쪽
17 새로운 만남 24.08.20 53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