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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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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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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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DUMMY

‘대체 왜?’


남은 의문은 이것이었다. 백씨마장에서 몸을 빼낸 주옥은 아문 마구간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백씨마장과 백주귀는 왜 그런 짓까지 해 가며 경마에 집착하는 걸까. 오늘 본 거대한 마구간 두 채에 살고 있는 말은 이백 마리에 조금 못 미쳤고, 회임한 흰 암말들만 백 마리에 가까웠다. 거기다 아직 둘러보지 못한 구역이 절반에 가까웠으니, 간단히 어림해 봐도 상식을 벗어난 숫자의 말들을 키우고 있다는 얘기가 됐다.


‘그럼 매년 적어도 망아지만 백 마리 가량, 거기다 일반 말들도 죽을 테니 말 시체만 백수십 구를 태워버린단 얘기야. 경마 상금만으로 몇 년씩 그 짓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


다른 마장들처럼 은퇴 경주마를 종마로 활용해 돈을 벌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백씨마장은 그런 상식적인 돈벌이를 마다했다. 아무리 경마에 목숨을 거는 곳이라 해도, 이런 체계를 몇 년씩 유지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려면, 엄청난 양의 물을 쉴 새 없이 쏟아부어야겠지.’


그 거대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숨겨진 자금줄이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 주옥의 결론이었다. 어떤 곳에서, 무슨 이유로 그 자금을 대는지 알아보는 과제가 남아 있었지만, 여의치는 않았다.


'그런 문제는 말들만 들쑤셔서는 알 수가 없겠지. 사람 쪽에 접근해야 될 텐데, 이건 전혀 다른 문제야. 서두른다고 해결될 리 없으니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주옥은 충격적인 첫 야행(夜行)을 마쳤다.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다음날, 낮 휴식 시간이 되도록 어젯밤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반쪽짜리 휴식마저도 방해를 받게 되었으니, 무려 다섯 사람이 예고도 없이 마구간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들 중 구무관과 무풍만이 매일 보는 이들이었고, 나머지 셋은 구면이었으되 예상치 못한 이들이었다.


‘지현과 수행원, 그리고··· 백주귀?!’


저런 인원 구성이라면 누가 봐도 주요 인물은 지현과 백주귀. 나머지는 그들을 보좌하는 역할일 것이다. 썩 좋지 않은 구무관과 무풍의 표정을 보니, 혹 어젯밤의 정찰이 들켰나 하는 우려가 샘솟았다. 마장을 나오기 전 나름 침입의 흔적을 지운다고는 했지만, 워낙 밤이 깊고 깜깜해 놓친 흔적이 있을 법했다.


걱정이 밀려오는 가운데, 어느새 지현과 백주귀가 눈앞에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잠깐 동안 주옥을 바라보더니, 이내 대화를 시작했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쪽은 백주귀였다.


“역시, 몇 번을 봐도 훌륭한 말입니다. 경주 전후로 보는 모습과 사뭇 다르군요.”


백주귀의 목소리가 귀를 의심케 했다. 나긋나긋하다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심지어는 진심도 꽤나 담겨 있었다. 언제나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이 없던 자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법한 말투였다. 지현 역시 부드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이러나저러나 최고의 명마지요. 이런 말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오다니, 운이 정말 좋았지 뭡니까.”


백씨마장의 말들을 전부 박살낸 흑풍암제를 이렇게 말했으니, 자칫 백주귀를 도발하는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현의 말은 그닥 듣기 거북하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그의 말투 덕분이었다. 지현의 말투에는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양쪽의 말이 모두 진심일 리 없었다. 지금은 서로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사업상의 수사(修辭)를 늘어놓는 것, 당사자 두 사람과 듣고 있는 주옥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는 주옥도 방문의 이유를 대강 짐작했다.


‘새 주인이 되러 온 건가.’


시기가 묘하게 맞아 떨어졌을 뿐, 어젯밤의 염탐이 들킨 건 아니었다. 손이 있다면 가슴을 쓸어내렸을 법한 안도감을 느끼며, 지현과 백주귀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계속해서 들었다. 백주귀는 마방 문앞에 붙어 있는 종잇장을 본 뒤 미소를 띄우고 지현에게 물었다.


“흑 주부께서 꾸준히 조정의 권위를 드높이고 있으니, 공이 크십니다.”


다소 뜬금없는 말에 지현의 말문이 순간 막혔지만, 곧 그 역시 백주귀가 본 것과 같은 것을 본 뒤 멋쩍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아, 그, 그렇지요. 하하.”


그 모습을 본 주옥이 소리내지 않고 냉소했다.


‘잘들 논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자명했다. 바로 마방 문 앞에 붙은 주옥의 임명장이었다. 흑풍암제라는 말을 정9품 주부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임명장이, 이제는 누렇게 변색이 된 채 너덜너덜해져 힘겹게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도 관직이 있었지. 의미라고는 한 톨도 없지만.’


주옥이 받은 벼슬의 취급은 그 임명장과 신세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주부로서 특별한 일정을 소화한 적도, 심지어는 특식 한 번 받은 일도 없었지만, 사실 그런 취급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실망할 것도 없었기에, 관직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주옥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지현의 반응을 보니 그 역시 주옥의 벼슬을 잊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에게도 중요한 건 임명식과 그에 따르는 화제성이었지, 벼슬자리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지현이 무풍과 구무관을 돌아보며 묻는 대사가 그의 관심사를 반증했다.


“기수, 구무관. 우리 흑 주부는 건강하지?”


그에게 경마장은 사업이었지, 여흥은 아니었다. 경마와 경마장이 올리는 성과에 주목했을 뿐, 경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방금의 질문도 괜히 물어본 것이었다. 구무관이 나서서 대답했다.


“예. 언제나처럼 만전의 상태입니다. 제 평생 말 옆에서 살아 왔지만, 이런 말은 처음 봅니다.”


“좋소, 좋소.”


백주귀가 흡족해 하며 구무관의 말을 받았다. 지현을 향한 대답을 백주귀가 받은 모습. 여기서도 미묘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말을 듣자, 지현이 자연스럽게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질문을 던졌다.


“자, 그럼. 저희 흑 주부를 직접 보고 하실 말씀이란 건 무엇입니까?”


오고 가는 말과 말투가 전부 사람 좋은 푸근함을 담고 있었지만, 주옥에겐 양측의 대화가 전부 날이 선 비도( 飛刀)처럼 느껴졌다. ‘저희 흑 주부’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예. 공사다망하신 지현이시니 거두절미 하겠습니다. 저희 백씨마장에서 흑 주부를 영입하려 합니다.”


그 말에 지현은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 하니 왠지 진심으로 놀란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씨마장주가 이곳까지 손수 행차해 경쟁마를 확인할 이유 따위는 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란 척을 하는 건, 일종의 예의 같기도 했다.


“이미 명마들을 즐비하게 보유하신 백 장주님께서 탐내실 정도로 저희 흑 주부가 뛰어납니까?”


연기였다. 관심없는 지현이라 해도 경마장의 판도 정도는 꾸준히 보고를 받았다. 애초에 경마장을 만든 것이 지현 본인이었고, 주옥을 데려다 사람들 앞에서 벼슬을 준 것도 경마장의 부흥을 위해서였다. 그런 이가 경마장의 동향을 주시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주옥은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백주귀의 방심을 유도하고 있어. 그가 진짜 속내를 드러내도록.’


지현에 대한 증천의 평가가 떠올랐다. 가끔 상식을 벗어나는 희한한 판단을 내리지만, 대부분은 현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사람. 10년 가까이 이런 큰 고을을 책임지다 보면 이 정도의 수완을 갖추게 되는 모양이었다. 백주귀는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하게 반색하며 대답했다.


“예. 여기 구무관의 말대로 본 적이 없는 명마더군요. 부끄럽지만 저희가 키우는 어떤 말도 흑 주부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오, 그 정도군요. 그런데, 저희로서도 그런 경주마를 포기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즉각 대답이 나왔다. 본격적인 협상의 개시를 알리는 질문이었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물론이고, 그 대화를 듣는 주옥, 심지어는 회영까지 전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백주귀도 눈빛을 바꾸고는 대답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저희 측에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니, 금괴로 그 대가를 지불하고자 합니다. 100관이면 어떨는지요.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백주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금의 가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지금은 은의 10배에 달했다. 금 100관이면 은 1000관. 현 재정에 도움이 되는 수준을 넘어, 3개월은 충분히 운영할 만한 돈이었다. 그런 재산을 말 한 마리에게 쏟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믿기가 어려웠다.


“그, 금 100관 말입니까? 은이 아니라?”


지현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지금까지의 모르는 척은 전략이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터무니 없는 가격 책정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어, 지현은 진심으로 말을 더듬었다. 반면 백주귀는 여전히 태연하고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명마란 의미지요.”


“아무리 그래도 말 한 마리에 쓰이기엔 너무 큰 금액이니, 저희를 납득시켜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지현이 곧바로 요청했다. 왜 그렇게 큰 돈을 지불하려는지 설명해 달라는 얘기였다. 백주귀는 흔쾌히 해설을 시작했다.


“간단합니다. 이런 말은 고금을 통틀어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중모현 아문과 저희 백씨마장이 경마장에서 경쟁하는 사이란 점도 가격 책정에 고려했습니다. 혹시 그래도 걱정이 되신다면, 흑풍암제를 인수받는 직후 경주에서 은퇴시키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주옥도 이 말에는 놀라고 말았다. 이제 겨우 4전짜리인 자신을, 더 이상 경주에 참가시키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럼 왜 자신을 사 간단 말인가?


오래 지나지 않아 백주귀의 계산을 깨달았다. 자신이 없으면 어차피 우승은 다시 백씨마장 차지였다. 거기다 백씨마장도 수익을 내지 않을 뿐, 종마를 활용해 경주마를 기르고 있으니, 그 무자비한 번식 체계에 자신을 종마로 끼워넣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백씨마장의 연구에 흑풍암제의 혈통이 합쳐진다면, 어떤 괴물 말이 나올지는 스스로도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종마가 될 리는 없지만 말이야.’


번식행위를 할 생각이 없는 주옥이 종마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주옥의 의지를 알고 있는 이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몸값에 종마로서의 가치를 반영해 책정한 것이다.


흘긋 무풍 쪽을 쳐다보니, 청년은 이제야 큰 혼란에 빠진 듯했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주 선생님은 과연 종마로서 자신의 몫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풍이 평소에 이 따위 고민을 해 봤을 리가 없으니 주옥도 그의 혼란을 이해했다.


‘···그래. 달리 해 줄 말이 없구나.’


이 생각은 전음으로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기수와 구무관은 현의 고용인일 뿐이고, 경주마를 파는 것은 마주들 사이에서의 일이었따. 그들에게 이 거래를 막을 권한은 전혀 없었다. 모든 인간들이 침묵에 빠진 채 시간이 흘러갔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지현이 대답했다.


“그런 이유라면 절대 팔 수 없겠군요. 이거, 고대하시던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대답에, 이곳에 모인 모든 인간은 기류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백주귀가 눈빛을 바꾸고 자세를 곧추 세우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살기를 품었다. 주옥마저도 흠칫 놀랄 정도의 기파였는데도, 지현만큼은 그 변화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였다. 난처한 듯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만은 영락없이 멋 모르는 문외한의 그것이었다. 달리 보면 여유이기도 했다.


‘그 도(道)가 무(武)에 있지 않을 뿐, 이쪽도 고수라는 건가.’


지현의 기개에 감탄하며 주옥이 생각했다. 그의 눈에 지금 백주귀와 지현의 대립은, 인간 시절 봐 왔던 어떤 고수들간의 비무보다도 아슬아슬했다. 백주귀는 냉랭한 기세를 전혀 누그러뜨리지 않고 따져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상치 못했던 답이군요. 이젠 제가 그 근거를 여쭤야 할 듯 합니다.”


거절의 이유를 말해 달라는 뜻. 지현은 곧장 답해주기 시작했다. 자세는 여전히 공손을 유지했고, 말투도 그러했으나 아까보다는 확실히 강단이 느껴졌다.


“저 역시 간단합니다. 나뭇값을 잘 쳐준다 해서 기둥 뿌리를 뽑아다 파는 가장 따위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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