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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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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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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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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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2)

DUMMY

“지현께선 제가 남의 집 기둥을 뽑아가려 한다 여기시는군요. 말 한 마리를 사 가는 게 어찌 그렇게까지 폐가 되겠습니까?”


“명성이 드높으신 백 장주께서 헤아리지 못할 리 없는 간단한 계산입니다. 외람되지만 이 말단 관리를 시험한다 여기고 답해 보겠습니다.


여태까지는 진심인 듯 빈말인 듯 아슬아슬하게 상대를 자극해 온 지현이었지만, 이 말은 아무래도 도발이었다. 백주귀의 안색이 흐트러지는 가운데, 지현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판단 근거를 해설하기 시작했다.


“백씨마장은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경주마들을 육성해내고 있습니다. 아마 중모현 밖으로도 그 명성이 뻗어나가고 있겠지요. 벌써 8년째 경마장의 시상대를 석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과찬이십니다만.”


백주귀는 굳은 표정을 풍지 않고 인사치레로 말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껏 백씨마장의 말은 지난 8년간 출주할 때마다 시상대의 세 자리 중 한 자리 이상을 예외 없이 차지했다. 올해 출주한 백섬마황이 그 방점을 찍어, 흑풍암제를 상대할 때만 아니라면 계속해서 우승을 석권해 오던 중이었다. 지현은 고개만 끄덕인 뒤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비록 경마에는 젬병이라도, 장부를 보고 주판을 굴려 온 경력이 조금 되지요. 경마장 10년 역사 중, 관의 입장에서는 지금이 경마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을 필히 짐작하실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백주귀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제 그도 지현이 하려는 말을 이해한 듯했다. 백주귀는 신음하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도 인기겠지요.”


지현은 여유롭게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역시 대단하신 혜안입니다. 확실히 장주께서 짚으신 대로 본질은 그것이나, 여기 저희 피고용인들에게는 설명이 필요할 듯해 덧붙이겠습니다.”


피고용인이라면 지금 현장에 있는 무풍과 구무관을 의미했다. 실제로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현의 뜻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으니, 해설이 필요했다. 반면 주옥의 상태는 그보다 조금 나았다.


‘지현 이 사람, 진짜 고단수잖아? 증천의 말이 틀리지 않았네.’


주옥이 지현의 말뜻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와중, 지현이 잠시 멈췄던 말을 재개했다.


“경마장이 잘 되면 저희 아문도 이득을 봅니다만, 사실 우승마가 누군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설 마장들에겐 상금이 주 수입원이지만 아문 전체의 수익을 보자면 우승마가 벌어오는 상금은 비중이 극히 작지요.”


역시 예상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인기마들을 따라 움직이는 액수는 어마어마했지만, 그에 비해 정작 말들이 상금으로 가져가는 액수는 작았다. 말에게 걸린 돈을 세금, 경마장 부대비용, 당첨금으로 분배하고 남은 돈이 겨우 마주에게 돌아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 규모의 마방이라면 그 정도 수익도 큰 도움이 됐겠지만, 백씨마장에게는 한참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지현도 그 사실을 궤뚫고 있었으니, 주옥이 대강 짐작한 바보다 더 뛰어나 보였다. 지현의 설명이 이어졌다.


“경마장의 진짜 수입은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경주날이면 사람이 몰려들어 여기저기 돈을 쓰고, 그 돈이 돌아 현을 먹여 살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경마의 인기를 유지하는 것은 관의 지대한 관심사입니다.”


그러자 백주귀가 끼어들어 물었다.


“백씨마장이 흑 주부까지 손에 넣으면 경마의 인기가 떨어진단 말씀이십니까?”


이제 그의 말투에도 조급함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반면 지현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여유로웠으니, 누가 주도권을 가졌는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람되오나 종국엔 그렇게 될 겁니다. 듣기로는 저희 흑마가 백씨마장의 유일한 경쟁마라고 하니, 이들이 한 곳에 모이면 경쟁이 사라지게 되겠지요. 달리기도 전에 결과가 정해진 경주를 보러 올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가 만든 경마장을 제 손으로 폐쇄할 순 없는 노릇이니, 백 장주께서 널리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주귀는 즉각 반박했다.


“그건 틀리셨습니다. 대중은 강자에 열광하는 법이니 1위와 2위가 연합하여 여태껏 볼 수 없던 전력을 구축하면 반대로 흥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경쟁이 사라질까 걱정이 되신다면 저희도 저희 종마를 공유하도록 하지요.”


“과연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껏 백씨마장에서는 종마를 유출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갑자기 방침을 바꾸시면 현이 압박을 넣은 것으로 오해받을까 두렵군요."


이렇게 즉각 대답하는 지현의 말을 들으며, 주옥은 생각했다.


'거짓말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백씨마장의 백주귀가 내세운 약조 자체가 공허하고 허술했다. 그들이 약속대로 종마를 제공한다 해도, 그게 일류 경주마일 거란 보장은 없었다. 괴상한 말 연구를 그토록 많이 해 온 백씨마장이라면 심지어 일류 경주마가 맞더라도 뭔가 손을 써 둔 채 반출시킬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런 제안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지현의 말은 이어졌다.


"게다가 인기 면에서도, 백 장주께서는 향후 일이 년의 말씀을 하시고, 저는 향후 십년, 이십년의 경우를 말씀드리고 있으니 양측 모두 틀리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단기적으로는 화젯거리가 되겠지만 세대가 거듭할수록 그런 단발성 화젯거리는 잊혀지겠지요. 백씨마장의 육성 능력이 워낙 뛰어나니, 그 때가 되면 다른 마장은 백씨마장을 견제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 말은 어째 좀 부당하게 들리는군요. 백씨마장의 역량이 너무 뛰어나기에 팔 수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능력을 갖춘 것이 죄가 아닐진대 어찌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충분히 그리 여기실 법 합니다. 어떤 결정들은 미움을 감당해야 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고을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 선택을 무를 수 없으니, 그저 제가 머리숙여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뼈 있는 말들이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갔다. 따져 묻는 백주귀나, 대답하는 지현이나 마치 할 말을 준비해온 듯 막힘없이 말을 주고 받는 모습이 무아지경에 빠져든 고수들의 비무와 같았다. 여기서 지현이 한 마디를 더함으로써, 완벽한 우위를 잡았다.


“그리고, 백씨마장에 사죄하는 의미로 한 가지 약조를 더 드리겠습니다. 다른 어떤 마장에도 흑 주부를 팔지 않고 저희 아문의 기술로만 후계마를 육성할 테니, 백 장주께서 노여움을 더시길 바라겠습니다.”


주옥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이 조건은 핵심 중에도 핵심이었다. 마지막에 내건 조건을 통해, 비로소 경마장의 균형을 백씨마장에게서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백씨마장을 견제하겠다는 명분만 제시했다면, 백주귀는 반드시 우회로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런 명분이라면 백씨마장이 아닌 다른 마장에는 흑풍암제를 넘길 수 있단 말이었으니, 적당한 마장에 사주해 흑풍암제를 빼돌리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지현은 방금 전의 약조로 그런 우회로를 완전히 막아 버렸다. 게다가 백씨마장을 향한 예의라는 명분도 있었으니, 백주귀로서도 거절할 방법이 없는 수였다. 남의 말을 가지고 팔라, 말라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완승이다.’


지켜보던 주옥이 되뇌었다. 명분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더 이상 백주귀에게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과연 백주귀 역시 굳은 얼굴로 서서 무안해 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주귀의 얼굴을 보며 주옥이 평가를 내렸다.


‘상대를 너무 얕봤군, 백주귀. 무(武)를 겨루지 않는 전장에선 무공도 별 수가 없어.’


가진 힘이 강한 무림인들은, 무공이 없는 민초를 대할 때 알게 모르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곤 했다. 그건 종(種)의 본능이기도 했으니, 반대로 힘 없는 민초들은 대부분 그 본능에 따라 무림인의 비위를 맞춰 주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일도 생겼다.


백주귀도 뛰어난 수완을 가졌지만, 상대는 광동을 통틀어 제일가는 현의 수장이었다. 그것도 10년을 무탈하게 고을을 지켜온 자였으니, 자신의 영역에선 그가 백주귀 이상 가는 강자인 게 당연했다. 그런 상대에게 단순히 돈을 들이밀고 말로 구슬려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했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


“다망(多忙)하신 백 장주님을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시다면 각자의 업무로 복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는데 원하는 바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네며, 정중한 축객(逐客)의사를 표했다. 백주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대로 툭 쏘아붙였다.


“유감입니다. 이렇게까지 서로의 생각이 다를 줄은 몰랐군요.”


그리고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재촉해 마구간을 나갔다.


‘이걸로 담판은 끝인 건가. 지현 이 인간,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이었어.’


그런 평가조차도 지현의 혜안을 전부 헤아리진 못했다. 백주귀가 열린 문을 통해 걸어나가 모습을 완전히 감추자, 그는 보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집무실로 증 총포두를 불러 주게. 나는 여기 있는 무 기수와 함께 집무실에서 기다리지.”


무풍은 지현이 심각한 말투로 자신을 지칭하자, 크게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예···에? 저 말입니까?”


지현은 무풍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한참 뒤, 무풍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마방에 돌아왔다. 그를 내내 기다려 온 주옥은 곧바로 전음을 날렸다.


‘뭐야? 왜 불렀어? 무슨 얘기 했어?’


무풍은 주옥의 마방으로 서둘러 들어오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는 지현, 증천과 나눈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청년의 얼굴에서는 상기된 기색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큰일입니다. 지현께서 백씨마장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래? 그게 왜 큰일이냐?’


여기까진 예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불쑥 찾아와 보인 백주귀의 모습은 확실히 수상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지현이 조금만 아둔했거나 덤벙거렸다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주옥이 본 지현은 그렇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이어진 무풍의 보고 내용이었다.


“그 수상한 백씨마장의 정보를 캐내실 생각이니에요! 그래서 증 총포두를 부른 겁니다. 수사와 관련된 직감이라면 그만한 자가 없다면서.”


‘뭐? 벌써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고? 게다가, 수사를 하려면 판관 예하의 관원들을 동원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이 조치는 주옥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과감하고 신속했다. 게다가 이어지는 무풍의 대답을 들어 보니, 은밀하기까지 했다.


“증 총포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현께서는 이 수사가 ‘비공식’이라서 공식적인 수사력을 동원할 수 없다고 하셨고요.”


‘대체 뭘 시키려는 거야?’


“앞으로 증 총포두와 예하 포쾌들이 하루 종일 백씨마장을 감시할 겁니다. 계속 동향을 파악할 거래요. 저를 부른 건 경마장에서 백씨마장을 감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딱히 잠복을 할 필요는 없고, 특수한 동향을 보이면 보고해 달라 하셨습니다.”


‘경마장에는 아문 사람들이 차고 넘치잖아? 그런데 왜 너야?’


“백씨마장의 술수에 제일 넘어가지 않을 법한 사람이 저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그들의 목표가 된 주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자이면서 경마 경력도 짧고, 나이가 어려 어수룩하게 여길 테니 회유할 시도도 없을 거라면서요.”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야, 이 지현이란 인간.’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백씨마장이 벌이고 있는 짓은 분명 끔찍하긴 했어도 범법이나 범죄는 아니었다. 최고의 경주마를 뽑아내기 위해 말들의 목숨을 내다 버리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 말들은 자신의 것이다.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긴 해도, 원칙적으로는 자기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 일이니 처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백씨마장의 만행을 밝혀낸다 해도, 오히려 명분은 그들 쪽으로 넘어간다. 특히 무림 세력과도 연결되어 있는 게 분명하니, 그 세력 쪽에서 문제를 삼는다면 도리어 지현과 아문이 감시 조치의 연유를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지도 몰랐다.


‘···지현, 여기까지도 헤아리고 있는 거 맞지?’


자신의 조치가 가진 위험성을, 지현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기를 바랐다. 오늘 그가 보여준 안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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