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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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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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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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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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마장(4)

DUMMY

흑마가 어둠 속을 소리 없이 갈랐으니 그 사실을 알아차릴 만한 이가 많지 않았다. 백씨마장의 문을 지키던 두 명의 보초도 마찬가지였다. 주옥이 뛰어오르는 기세는 단계(檀溪)를 뛰어넘는 촉한 소열제의 적로를 비웃듯 했다. 날아오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날아오른 300관 무게의 거구가 담장에 발을 딛었다. 지면으로부터 한 장 높이를 두 앞발이 박차고, 그 직후 뒷발이 같은 곳을 연달아 박차 올랐다. 달려드는 속력을 살려, 순간적으로 수직으로 달린 말이 곧 담장 위에 우뚝 섰다. 점창의 절기, 유운신법의 일초 적권운승(積卷雲昇). 이 초식이 인간이 아닌 짐승의 몸으로 펼쳐지는 건 고금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벽을 딛고 한 장 반 높이까지 오르는 것은, 주옥의 십분지 일만큼 가벼운 인간에게도 결코 낮은 경지가 아니었다. 달리 말해, 인간보다 열 배 이상 무거운 주옥이 벽을 박찼음에도 담장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말 발자국 네 개만이 남아 있었다. 어떤 무인이 보더라도 신기(神技)로 보일 만했다. 놀라지 않은 것은 주옥 본인뿐으로, 그는 이미 밝은 눈으로 마장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역시 넓긴 더럽게 넓구나. 제대로 둘러 보려면 반나절은 필요하겠어.’


위에서 마장을 내려다 보자, 반대쪽 담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내부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공터와 건물이 번갈아 가며 자리잡은 모습이, 마치 백씨마장 장원 안에 또다른 중모현이 들어선 듯했다. 푸르스름한 달빛만을 받아도 이런 인상이 남았으니, 낮에 이 광경을 봤다면 완전히 압도될지도 몰랐다.


‘마장이 이렇게 넓으니 담장 위에서는 구조를 파악하는 게 어렵겠어. 내려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지.’


무겁고 큰 말의 몸을 직접 빼내 이곳에 닿은 것은, 결국 수상한 이 장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백씨마장은 누가 봐도 수상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수상한지는 아무도 특정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보안이 철저했기 때문이다. 주옥 역시 고작해야 한청검 정도의 단서밖에 더 알지 못했으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은 백씨마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밝혀내는 일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이상하리만치 강해진 예감이 옳게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거대한 흑마가 담장 위를 걸었다. 담장 안쪽에 키크고 억센 가시덤불이 빽빽이 심어져 착지하기가 어려워, 뛰어내리기 좋은 곳을 찾는 과정이었다. 좁은 담장 위를 외줄타기 하듯 걸으며 내부를 살피던 주옥은, 그나마 덤불이 덜 무성한 곳을 찾아 그 너머로 뛰어내렸다. 발을 딛는 작은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듣지는 못했다.


‘이런 걸 왜 안쪽에만 심었지?’


이 가시덤불에 애를 먹긴 했지만,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게 그 용도의 전부일 것 같지는 않았다.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담장 외부에 같은 식물을 심는 게 더 도움이 됐을 테니.


‘그럼 설마 내부로부터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얼른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백섬마황 정도의 말이라면 방금 주옥이 넘어 온 담장을 넘을 수 있을까? 그건 무리였다. 하지만 만약 백섬마황을 아득히 뛰어넘는 말이 태어난다면? 매년 점점 더 강한 말을 내놓고 있는 백씨마장이라면, 그런 말이 태어날 경우를 대비하고 있을 법했다. 반면, 담장 외부에 이 가시덤불을 심어 놨다면 괜히 한 번 더 호기심을 자극할 지도 몰랐다. 저 정도 높은 담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라면 어차피 가시덤불 따위는 방해가 되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 철저함에 약간 질린 채, 주옥은 눈앞에 보이는 공터로 향했다. 관영 훈련장처럼 흙바닥으로 된 공터에는 타원 모양으로 흙이 약간 패여 있어, 훈련장으로 쓰이는 곳임을 드러냈다. 주변을 둘러 보니 잔디가 깔린 곳, 경사가 급한 곳 등 다양한 환경을 구현해 놓은 훈련장이 많았다.


‘단순히 경주마를 키우기 위해서라고 보기엔 역시 과하단 말이야.’


공터 옆을 걸으며 주옥이 생각했다. 경주마를 키우는 게 목적이라면, 경마장과 완전히 다른 환경을 구현해 놓을 이유가 없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숨겨진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옥은 가만히 한 목재 건물의 나무 문에 귀를 갖다댔다. 훈련장 바로 옆에 서 있는 여러 채의 건물 중 하나였다.


‘이토록 큰 마장이라면 마구간과 훈련장도 가까이 지어 놨겠지. 분명 여기 경주마들이 살고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자, 과연 안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야심한 시각이니만큼 말들도 잠들어 기척이 작았지만, 원래부터 밝은 말의 귀에 내력이 더해졌으니 얇은 나무문 뒤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기척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말해 주었다.


‘여섯 마리. 경주마는 아니고... 망아지들이네. 경주마의 마방은 다른 곳인가?’


호흡의 숫자, 크기와 깊이, 빈도 등에 주의하면 말들의 마릿수는 물론, 덩치도 유추할 수 있다. 이곳은 젖을 뗀 망아지들의 거소(居所)로 보였는데, 그 이상은 유추할 수 없었다. 이제 선택이 남았다.


‘빗장을 들추고 들어가 볼까? 아니면 다른 건물로? 백씨 경주마 삼형제도 분명 이 근방에서 자고 있을 텐데.’


뭘 확인하겠다고 명확히 정해둔 바는 없었다. 반대로 뭘 발견하든 의미가 있다는 얘기가 되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주옥은 머리로 빗장을 밀어올린 뒤 몸으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망아지 여섯 마리가 각자 마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백마만 여섯 마리라. 정확히는 백망아지라 해야겠지만.’


전체 마방은 열 개 남짓. 각 마방의 크기가 작은 것이 애초에 이 정도 크기의 망아지들만 수용하는 게 목적인 듯했다. 한 가지 확인해 볼 것이 있어, 주옥은 소리 없이 마방 문을 뛰어넘어가, 옆으로 누워 자는 망아지 한 마리의 몸에 발굽을 올렸다. 그리고는 잠시 기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내력이 흐르고 있어. 이 정도 크기가 되기 전에 벌써 내력을 불어넣는단 얘기로군. 부작용은 없는 걸까?’


이곳에 잠들어 있는 여섯 마리의 체고(體高, 지면에서부터 말의 어깨까지의 높이)는 아직 성체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몇 개월차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꽤나 어린 말들일텐데 벌써 강제 타통을 해도 되는 것일까.


회영이 강제 타통을 받아들였다곤 해도, 그게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회영의 운이 좋아서, 또는 당시 통제하지 못한 어떤 우연이 작용해서 성공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영 말고 다른 암말들에게 강제 타통을 시도하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성공한다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똑똑해지지만, 실패의 위험성이 너무 컸다.


혹시나 해서 다른 망아지들의 맥도 짚어 보니, 전부 내력을 갖고 있었다. 본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짐승들임에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은 한층 더해졌다. 그 근거를 명확히 짚을 수 없다는 점이 답답했다.


‘일단 나가자. 여기 있어 봐야 안 좋은 생각에만 집착하게 될 것 같아.’


주옥은 이렇게 결심하고 마구간을 나간 뒤 다시 빗장을 걸었다. 한청검을 차고 있는 백주귀를 본 순간부터 발동한 이상한 위화감은, 백주귀에 대해 알아갈수록 점점 더 커져 갔다. 방금 전도 마찬가지로, 일부러 떨쳐내긴 했지만 '안 좋은 생각'은 이미 구체적으로 떠오른 뒤였다.


‘이 여섯 마리. 처음부터 여섯 마리였을까?’


다음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머리를 세차게 저어 잇따르는 생각을 끊어내려 했다. 하지만 생각이란 머릿속에 있으면서도 의지대로 움직여 주는 법이 없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저 혼자 커져만 가는 망상의 내용은 이러했다.


'만약 저 여섯 마리의 정체가 ‘생존자’라면? 처음엔 열 마리, 백 마리가 있었지만 강제 타통을 견뎌낸 것이 여섯 마리에 불과한 거라면?'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다음은 훈련장 근처에서 가장 큰 건물의 빗장을 열고 들어갔다. 주옥이 본 건물들을 모두 통틀어도, 외관은 이곳이 가장 컸으니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문을 열자, 백수십 칸의 마방과 각 마방을 가득 채운 말들이 보였다. 아무리 마장이라 해도, 말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백마와 백마 아닌 말들이 섞여 있어, 제아무리 백씨마장이라도 죽어라 백마만 키우는 것은 아니란 점을 알려주었다.


혀를 내두르며 그곳을 나와, 닥치는 대로 다음 문을 열었다. 그 다음은 짚더미와 여물을 쌓아두는 창고였으며, 그 다음은 구무원들의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휴게실에도 마필 관리와 관련된 서책이 잔뜩 꽂혀 있는 것 정도가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 들른 공간이 문제였다. 좁고 높은 원기둥 모양 건물을 보자, 절로 도자기 가마와 그 굴뚝이 떠올랐다. 그 건물 안에 들어서자, 주옥은 자신의 생각이 적중해버렸음을 느꼈다. 그곳에는 실제로 거대한 가마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가마에서 나는 연기를 건물 꼭대기까지 이어진 굴뚝으로 내보내는 구조였다.


‘···이런 미친 굴뚝이 있다니.’


그럼 이곳의 가마에선 무엇을 태우는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화구 옆에 쌓여 있었다. 고열에 타고 남아 바스러진 말들의 유해였다. 가루가 되어 부서진 뼈와 아직 단단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뼈가 한데 쌓여 주옥의 키에 육박하는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으니, 주옥은 망연하게 그 뼈 무더기 앞으로 걸어가 유해를 살폈다.


‘망아지와 장성한 말이 섞여 있지만 전자가 훨씬 많아. 아무래도 아예 터무니 없는 상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여섯 마리의 백망아지였다. 지금 뼈무더기 속에는, 그 백망아지들과 비슷한 크기의 유해가 대부분이었다. 전염병이 아닌 이상, 망아지가 이렇게까지 많이 죽어나갈 일은 많지 않았다. 짐작하고 있는 이 떼죽음의 원인은, 물론 강제 타통의 부작용이었다.


‘···제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목숨을 장난감으로밖에 보지 않는구나.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백주귀.’


반쯤 나간 정신을 붙들고 소각장을 나섰다. 아직 부족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파악했지만, 왜 그런 일을 벌이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아까 일부러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끊어내려 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주옥은, 그 많은 어린 망아지들이 인간의 욕심 때문에 죽어나간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다음으로 들른 마구간에서 그 희망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번에 들른 마구간은 아까 보았던 초대형 마구간에 버금가는 크기였다. 역시 백 칸에 육박하는 마방을 각자 한 마리씩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전부 다 백마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전부 다 암말이야. 그리고···맙소사.’


그 많은 암말들의 배가 조금씩 불러 있었다. 주옥은 필사적으로 계산을 했다. 아까 보았던 백망아지들의 나이는 최소 3개월령. 그들 중 한 마리가 1살이 될 때 다음 기수의 경주마가 될 것이다. 말들의 회임 기간이 평균 1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다음 기수의 경주마들은 지금 어미들의 뱃속에 있어야 했다.


‘그럼 저 많은 암말들이 전부 다 회임한 몸이고, 뱃속에 있는 망아지들 중 한 마리만 경주마가 된다는 거야?’


종합해 보면 백씨마장의 1년은 다음과 같았다.


한 달쯤 기간을 잡아, 은퇴한 전대의 경주마를 종마로 하여 백색 암말을 전부 회임시킨다. 암말들이 일제히 망아지를 낳고, 몇 개월이 지나면 이 백망아지들을 강제 타통시킨다. 그 과정에서 9할 넘는 망아지들이 죽어 나간다. 이후엔 살아남은 망아지들을 키워 나가며, 그 중 가장 강한 말을 경주에 참가시킨다. 그 때가 되면 3년차를 끝낸 경주마를 은퇴시켜 종마로 사용한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백주귀.’


머릿속으로 나지막히 읊조렸다. 턱에서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된 이래 이가 갈릴 정도로 분노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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