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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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작품등록일 :
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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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2)

DUMMY

'네가 알아내고, 네가 판단해. 나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게 아니고, 나에겐 맞더라도 너에겐 틀릴 수 있다. 널 제자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스승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내 말을 받아들였다간 한계를 맛보게 돼 있어. 계속 의심해라. 모든 걸 의심해도 지나치지 않아.'


무풍에게 경공을 가르치며, 주옥은 이렇게 말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당연한 사회에서 이 말이 얼마나 파격적으로 들렸는지, 무풍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그건 불경 아닌가요?"


'그래. 잘 했어. 그렇게 의심하라는 거다. 내 말이라 할지라도, 이게 과연 맞는 말인지, 나한테 도움이 되는 말인지.'


주 선생은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놓았다. 방금 자신의 질문도 그가 말한 의심에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사부의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던 그에게 주옥은 정 반대를 강조했다. 그 모습을 주 선생도 마음에 들어 했으니, 이제 살인을 하고 돌아온 사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도 스스로 평가해야 했다.


'주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충분히 정당방위였어. 백주귀가 그 정도 악한이라면 누군가 막긴 해야 했을 거야. 문제는 백주귀가 진짜 그 정도 악한이 맞았는가겠지. 지금으로선 주 선생님 말대로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야. 당연히 선생님을 믿고 싶지만...'


그 자신도 빼놓지 말고 의심하라 한 것은 주 선생 본인이었다. 그가 한 일이 정당했다는 걸 믿기 위해서는 다른 증거가 필요했다. 굳게 결심한 무풍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그 시각 주옥은 백씨마장의 산해경 해설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와중 잠깐 무풍의 생각이 났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혼란스러워 하던 그의 눈빛,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물러나던 모습. 자신이 지난 밤 벌이고 온 일에 크게 놀랐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는 자세가 분명했다.


그 말인즉 제자가 자신의 해명을 곧장 믿지 않았다는 얘기기도 했지만, 그걸로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무풍이 직접 판단할 만한 근거를 찾아나섰다는 건, 그만큼 자기 가르침을 내면화했다는 것이기도 했으니 그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 된 것만은 자명해 보였다.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어.'


이렇게 생각한 주옥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이 자료들을 빼낸 데에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 이제 환수가 되었으니 다음 목표는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 것. 환수들에 대한 자료를 들여다 보면 그들의 둔갑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 백씨마장이 자료를 보강하고, 해설하고, 주석을 달아 놓은 환수도감은 다른 어디에서도 비슷한 자료조차 찾을 수 없을만큼 대단했다.


'그냥 아무 산해경이나 가져다 분석해놓은 게 아니야. 전해지는 모든 판본을 놓고 비교 연구한 책이다. 이름, 생김새, 능력... 거기다 직접 환수들을 만나고 온 기록도 있어. 백주귀가 만든 자료일 리가 없군.'


책장을 넘길수록 혀를 내두를 만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산해경은 물론 명의 영역 전체를 통틀어도 최고(最高)이자 최고(最古)의 환수 도감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상고 시대부터 같은 이름의 경서가 이름 모를 이들에 의해 수도 없이 나온 데다, 나중에는 민중의 흥미를 채워주기 위해 요괴들의 능력을 부풀리거나 일화를 과장하는 듯 소설적 면모까지 갖춰 현실성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이 산해경 해설서의 저자는 온갖 노력을 다했다. 심지어는 직접 환수를 만나고 궁금한 점들을 물어본 기록까지 적어둘 정도였다. 물론 그런 황당한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주옥이 아니었지만, 만약 그 내용을 전부 다 꾸며냈다고 한다면 그것대로 대단한 상상력이었다. 읽어낸 장수가 많아질수록 작자에 대한 궁금증 역시 커져 갔다.


'언제 사람일까? 지금의 무림에서야 환수는 전설 취급이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고 했어. 환수를 찾아다닌다고 만날 수 있던 시절이라면 적어도 수백 년은 되지 않았을까?'


책 자체는 그리 오래돼 보이지 않았다. 수백년 전 어떤 기인이 남겨둔 자료를 백주귀가 입수하고 필사해 뒀다든지, 아니면 애초에 입수할 때부터 필사본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 표지를 바꿔 다시 책을 엮고 보통의 연구일지 속에 섞어둔 게 분명했다. 정확히 얼마나 오래된 자료인지는 몰라도, 곡절을 거쳐 장구한 세월 끝에 자신의 손에 들어온 이 종이뭉치가 다시 한 번 그 속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 * *


동시에, 일상도 이어졌다. 주옥은 올해 두 번 더 경주에 나가야 했고 그 중 첫 경주가 다가왔다. 그 사이 훈련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주옥은 훈련 없이도 우승을 쉽게 할 수 있는 몸이었으니, 훈련 자체가 무풍을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무풍은 계속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이 많아 보였고, 주옥 본인도 둔갑 능력을 익히는 데 관심이 쏠려 있었으니 피차 도움될 것이 없어 보였다.


주옥은 훈련을 이만 마칠 것을 제안했고, 무풍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틀 간은 매일같이 주옥의 마방을 찾아왔지만, 아무 이야기 없이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고는 얼굴도 비추지 않게 되었다. 주옥도 제자의 상태가 이따금씩 신경 쓰였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자신에 대한 신뢰 문제를 겪고 있는 무풍에게 자신이 개입할 수가 없었고, 들고 나온 책도 열 권이 넘으니 읽어야 할 분량도 많았다. 부디 시간이 이 상황을 현명히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주옥은 백씨마장에서 들고 나온 기록을 탐독했다.


경주날 아침, 엿새만에 보는 무풍의 표정이 꽤나 어색했다. 이제 여섯 번째 출주를 위해 함께 경마장으로 이동해야 하건만, 이런 분위기는 아무래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가 볼까?'


주옥 어색함을 이겨내고 겨우 말을 걸자, 무풍도 고개를 끄덕인 뒤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는, 늦가을의 선선한 공기를 가르는 햇살 속으로 함께 발을 내딛었다.


"주 선생님. 내년에는 떠나시는 거죠?"


한참을 걷던 와중, 무풍이 물어 왔다. 주옥은 순간 걸음을 멈출 정도로 놀랐다. 실제로 그는 제자와의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 둔갑술을 얻고 사람의 몸을 되찾게 된다면 지금처럼 경주마 신세에도, 중모현이라는 소재지에도 묶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직 강호에는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훨씬 많았으니, 자연스레 다음 목적지를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무풍에겐 이런 계획들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일단 둔갑술을 얻을 수 있을지부터가 미지수였고, 최근 무풍과의 사이도 좋지 못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기를 기다리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심중의 의사를 한 마디도 전달받지 못한 무풍이 스스로 그 점을 짐작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 용케 짐작했구나. 어떻게 알았냐.'


"읽고 계시던 책 내용을 슬쩍 봤습니다. 저자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환수를 만나는 내용이더군요. 게다가 최근 선생님의 기도도 바뀌셨으니, 변화를 꾀하시는가 했습니다. 거기다 휴식기가 가까워 왔다지만 훈련까지 중단하셨으니, 경마에는 마음이 뜨신 걸로 여겨졌습니다."


주옥이 무풍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이 새삼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 자신의 지도를 따라오기 바빴던 소년이 어느 새 반대로 자신에게 관심을 쏟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살피고 있었다. 얼굴로 기수 자리를 얻어낼 만큼 그의 준수한 용모 위에 그 동안의 훈련을 짐작케 하는 그을림이 얹혀 더욱 건강해 보였고, 눈빛은 이제 당장 내일 그 이후의 먼 미래를 내다보는 듯했다.


'잘 봤다.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내가 떠나더라도 계속 주변 사람들을 그런 눈으로 살피면 돼.'


"확정된 건 없다 하시지만 가능하면 떠나시겠다는 뜻이군요."


'그래.'


말에 담긴 것보다 많은 의미가 한번에 오갔다. 이 제자와의 유대는 그 정도로 강했다. 무풍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결연한 것 같기도, 분한 것 같기도, 담담한 것 같기도 했다. 상단전으로 느껴지는 그의 심리 역시 동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래서 참는 것 같기도 했다.


'때를 봐서 늦지 않게 말하려고 했다. 지금으로선 정말 정해진 게 없어. 일단 가져온 자료를 다 읽어 보기 전엔 나도 모른다.'


위로가 될는지 모를 말을 건넸다. 무풍은 그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대꾸했다.


"압니다. 선생님은 그러실 분이죠. 일단은, 오늘 경주부터 해치우시죠."


무풍은 주옥을 똑바로 바라봤다. 얼굴을 못 본 엿새 동안 어떤 고민을 했으며,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몰랐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더이상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것. 달리 말해 주옥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왠지 자신이 그 판단을 반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주옥은 대답했다.


'좋다.'


잠시 후, 경마장 안에 울리는 폭죽 소리와 함께 달려나간 주옥은 몸이 이전보다도 한결 가뿐해졌음을 알아차렸다. 원래도 경마장을 압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젠 그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운공을 하며 체내의 단전이 드디어 마정의 형태로 단단히 굳어졌음을 깨달았고, 그로 인한 변화도 예상했던 바였지만 직접 달리며 느끼는 차이는 그 예상을 한참 앞질렀다.


"괜찮으십니까?"


등 위에 오른 무풍이 물었다. 관중들에겐 흑풍암제가 언제나처럼 수월하게 선두 자리로 치고 나가는 모습만 보였지만, 무풍은 평소와 뭔가 다른 점을 느꼈다. 시원하게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덜컹거리며 스스로 제동을 거는 듯한 인상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으니, 빠른 게 아니라 오히려 느리게 달리느라 애를 먹고 있는 듯했다.


'응, 문제 없다. 우승할 수 있어.'


"우승은 걱정 안 합니다."


일부러 느리게 달렸어도, 평소만큼의 속도는 유지했다. 1위는 확정지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3리 가량이 남은 경기장 내 주로는 탁 트여 야생마들과 달리던 평야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 평야에는 온통 잔디가 깔려 있었고 이 경기장은 흙바닥이었지만, 자유롭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달려 나갔다. 발걸음에 가속이 붙었다. 무풍도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지만 속도를 줄이라는 신호는 일절 보내지 않았다.


주옥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등 위에 누군가 올라 있다는 사실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무풍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직접 바람이 된 듯, 주 선생이 알려준 경공을 써서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둘이되 하나인 말과 인간은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남은 3리를 질주했다.


결승점을 통과한 다음에야 무아지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난번 대차승 때와는 달리 경기장 밖까지 서둘러 뛰쳐나가야 할 긴급 상황이 없어, 주옥도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방금 전까지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서서히 관중들의 함성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거둔 승리가 6번째였지만, 저들의 함성소리는 언제나 주옥을 오싹하게 전율시켰다. 환수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은 내린 거냐? 백씨마장주를 죽인 네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주옥이 경마장이 전하는 경이(驚異)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물었다. 물론 그 질문을 받을 만한 이는 천하에 단 한 명, 무풍 뿐이었다. 무풍 역시 주옥과 비슷한 표정을 한 채 대답했다.


"예. 선생님이 전달한 사실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찾아낸 근거에 입각해, 결정을 내렸습니다."


방금 전의 질주로 아직 숨이 가쁜지 무풍은 숨을 잠깐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백주귀를 처단했는지 납득했습니다. 저는 무림인이 아닌지라 이해했다고 하긴 어려워도 말입니다. 저희 사이에 달라질 건 없습니다. 함께 할 날이 석 달 남았든, 일 주일 남았든."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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