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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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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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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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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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DUMMY

'밖으로 나와라, 백주귀.'


또렷이 들려온, 하지만 분명 귀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닌 그 소리를 듣고 백주귀는 혼비백산한 채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의 오른손은 왼쪽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에 올려져 있었다. 마교 측과 거래할 때 그들의 간부라 알려진 금사(金士)에게 선물받은 검이었다. 그는 점창파를 멸문시킬 때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입수한 검이 있으니, 그 동안 백씨마장이 마교에 좋은 말들을 제공한 그 대가로 주는 것이라 말했다.


마치 선심 깨나 쓴다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말이 선물이지 사실은 하사품이나 다름 없는 그의 태도에 백주귀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감동받은 척 그 하사품을 받았다.


검을 뽑아 보니 푸른 빛이 도는 검날이 아름다웠으며, 동전을 쉽게 자르고도 날이 전혀 상하지 않는 예리함도 갖춘 이 명검을, 그는 줄곧 패용하고 다녔다. 본산에 남아 있던 점창파 무인들은 남김없이 죽었고, 강호에 파견 나가 있는 잔당들은 보이는 족족 마교가 처단할 예정이니 이 검의 원래 주인을 알아보는 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여겼다.


다시 지금, 전설의 무공 전음입밀이 자신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이런 상대가 적이라면 백주귀도 죽을 각오로 저항해야 했다. 최후가 될 지도 모르는 그 저항을 함께할 동반자가 바로 그 아름다운 검이었다.


반면, 드디어 집무실에서 나오는 백주귀를 지붕 위에서 지켜보는 주옥은 땀이 한 줄기 삐질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안도감에 빠졌다.


'드디어 성공했다. 몇 번이나 부른 거지?'


밖으로 나온 백주귀가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지붕 위에 선 흑마는 방금 전 상황을 되새겼다. 눈을 감고 백주귀의 얼굴을 선명히 떠올린 뒤 전음을 보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음이 잘 전달되었지만 백주귀가 무시해 버렸을 수도, 아니면 전음이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월등히 높았다.


'역시 실패인가. 좀처럼 늘지를 않는단 말이야.'


얼굴을 보지 않은 전음입밀은 아직 성공률이 낮았다. 지금의 주옥으로서는 1할5푼 정도에 불과해 아직 능력을 맘대로 구사하는건 어불성설이었다. 연습이야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실력이 한 번에 늘지는 않는 듯했다. 그렇게 열한 번을 부른 끝에 겨우 백주귀를 이끌어냈으니, 오늘은 운도 따라주지 않은 셈. 사색이 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백주귀를 보자, 새삼 전음입밀의 위상이 느껴졌다.


‘저 냉혈한이 저렇게 허둥거리다니. 내가 너무 쉽게 터득해서 그렇지, 역시 절세무공이야.’


이제 적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전음입밀이 빗나갈 일은 없었다. 멀리 보이는 백주귀를 보며, 주옥은 소리 없이 도약해 그를 관찰하기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집무실과 가까운 건물의 지붕 위였다. 그 자리에서 다시 전음을 보냈다.


‘맹수 우리를 채워둔 건물로 오라. 내가 문을 열어 두었다.’


그 전음을 들은 백주귀가 조용히 물었다.


“전음입밀을 쓰실 정도로 고강하신 고수께서 어찌 야음을 틈타 후배의 거처를 침입하십니까?”


정중하지만 질책하는 말. 게다가 숨겨진 의도도 있었다. 막상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주옥은 그가 뭐라 했는지는 듣지 못한 반면, 입을 벙긋거리는 건 볼 수 있었다. 모양새가 뭐라 대꾸를 하는 것 같긴 한데,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곧 위엄을 되찾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야기는 맹수 우리에서 하지. 일단 그곳으로 오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라면 그 방위를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 소리가 직접 울려퍼지고 있으니 그런 방식은 쓸 수 없었다. 백주귀는 또 뭐라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옥은 다시 대답했다. 백주귀가 하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으니,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뿐이었다.


‘말이 많구나. 맹수 우리로 오기 전까진 아무 대답 않겠다.’


무시하면 제 풀에 지쳐 그만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백주귀도 노림수가 있었으니, 방금 그가 중얼거린 말은 이러했다.


“송화피단, 계두국수, 비파육, 당호로...‘


다름 아닌 명나라 곳곳의 이름난 음식들을 연달아 읊은 것에 불과했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노림수는, 황당한 말을 던지고 상대의 반응을 보는 것이었다. 방금 주옥의 반응으로 인해, 백주귀는 대략적인 적의 위치를 추려낼 수 있었다.


‘방금 말은 맥락에 전혀 맞지 않았으니, 정말 말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든 반응했을 거다. 하지만 그냥 무시 일변도라는 건, 내 말을 듣지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내 말이 끝날 때마다 꼬박꼬박 대답이 돌아오니, 내 입이 움직이는 건 보고 있다. 내가 움직이고 있는데도.’


그 말인 즉슨, 적은 자신의 말이 들리지는 않지만 자신의 입이 움직이는 건 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는 얼마 되지 않았다. 백주귀의 시선이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며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가깝고 높은 곳, 그게 지금 내 상대가 있는 곳.'


주옥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백주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순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백주귀의 시선이 점점 옮겨가는 것을 보니, 자신을 정확히 포착한 건 아닌 듯했다. 사실, 백주귀는 주옥이 올라가 있는 지붕이 아닌 그 앞 건물의 지붕을 바라봤다. 적의 위치에 관한 그의 판단은 전부 옳았지만, 절대 짐작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적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주옥의 시력은 인간보다 월등히 좋았다. 그래서, 굳이 백주귀와 가장 가까운 건물 지붕에 올라가지 않아도 됐다. 만약 대낮이었다면 백주귀의 시야 부근에 주옥의 모습이 걸려 발각됐겠지만, 지금은 새까만 흑마가 몸을 숨기기 좋도록 달도 뜨지 않은 칠흑같은 밤이었다. 결국 백주귀는 주옥을 포착하지 못했다.


‘...아닌가. 일단은 맹수 우리 건물로 향해야겠군. 원하는 걸 최대한 들어줘야겠어.’


허탕을 친 백주귀가 약간 안타까워했다. 초조함과 위기감이 일었지만, 지금 상황이 반드시 봉변으로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었다. 정황으로 볼 때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최소한 자신에게서 뭔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자신을 습격하지 않고 불러낸 것이 분명했다.


지금 백주귀가 이용하려는 건 그 사실이었다. 게다가 천운으로 적이 지정한 장소도 맹수 우리 건물이었으니 상황이 악화되어 싸움이 벌어져도 희망이 있었다.


반면 주옥은 철렁한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경계를 한껏 끌어올려야 하는 것은 주옥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조정의 영역에 뿌리내린 채 마교에 부역하는 자, 달리 말해 지금 대륙의 양대 세력 가운데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한 번도 정체를 들키지 않은 자였다. 그런 자가 난적이 아니라 한다면, 그건 도를 넘는 오만이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주옥 역시 천천히 백주귀의 뒤를 밟았다.


이윽고 백주귀가 맹수 우리로 가득찬 문제의 그 건물 앞에 당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뒤, 주옥은 전음입밀로 명했다.


'들어가라.'


백주귀는 순순히 걸어 들어갔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대를 자극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가 전음입밀을 쓸 수 있다면, 무공 대 무공으로 붙어도 승산이 희박했다. 결국 약자는 자신이니, 협상력이 부족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적이 멋 모르고 굳이 이곳을 지정한 이상 승산은 있었다.


이제 주옥이 다가갈 차례였다. 그는 백주귀가 들어간 맹수 우리 건물의 안쪽을 문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곳, 그 중 안에 들어가 있는 백주귀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한 곳을 미리 봐 두었다. 주옥은 그 곳으로 움직였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취조관의 역할을 계속할 셈이었다. 과연, 정해진 장소로 가니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백주귀의 모습이 보였다. 주옥은 건물 앞 열린 문 밖 밤의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건물 안에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백주귀에게 물었다.


'내가 왜 널 이곳으로 불렀을 것 같나.'


백주귀의 얼굴에 약간 의외라는 기척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곧 대답하기 시작했다.


"후배는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그저 신기한 짐승을 좋아하는 후배가 각지로부터 그들을 사모은 곳일 뿐인데..."


이제는 백주귀와의 거리가 현저히 줄어들어,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와중,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백주귀의 말투에 주옥은 거의 경외심을 느꼈다. 건물 안에 갇힌 맹수들을 비롯, 각종 짐승들이 대부분 강제로 타통을 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말을 믿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 그럼 네가 그 짐승들을 강제 타통하지 않았단 말이냐? 그 일에 마교가 자금을 지원한 일도 없고?'


주옥이 곧장 캐물었다.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묻는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추궁을 들은 백주귀의 표정이 일순간 뜨악하게 일그러졌다. 백씨마장이 이 중모현에 자리잡은 것은 십수년 전,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교와 결탁한 것은 8년 전. 그 8년동안, 어떤 무림세력도 백씨마장과 마교의 유착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중모현 아문을 비롯한 조정의 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음입밀을 쓰는 이 정체모를 고수는 이미 백씨마장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백주귀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대화가 이렇게 흐르는 걸 예상할 수는 없었다. 순간 표정을 관리하지 못한 그였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대답했다.


“대협께선 많은 것을 조사하셨습니다. 오해가 있는 듯하니 후배가 존안을 뵙고 해명하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그가 택한 대응이었다. 상대가 자신에 대해 이렇게까지 알고 있는 이상, 거짓말로 백씨마장의 실체를 모두 덮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상대를 구슬리거나 멸구(滅口)해 버리는 게 나았다. 물론 상대가 전음입밀을 쓰는 고수다 보니 후자는 쉽지 않겠지만, 백주귀의 계산으로는 승산이 있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이 건물은 백씨마장 내에선 백수장(百獸場)이라 불리는 곳으로, 백씨마장 최고의 전력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후배 후배 하지 마, 아무리 봐도 동년배로밖에 안 보이니까.'


바쁘게 굴러가는 머릿속에 전음이 비집고 들어왔으니, 이번만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게감이 완전히 사라진 목소리와 어휘, 게다가 말의 내용까지. 당황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특히, 동년배라면 지금 무림 전역에서 한창 이름을 떨칠 만한 연배였다. 만약 그들 중 전음입밀을 터득한 자가 있다면 분명 소문이 퍼질만 했을텐데도, 백주귀는 들어본 바가 없었으니 당황한 낯빛이 그대로 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음은 이어서 말했다.


'뭐, 네가 그 짐승들에게 뭘 했는지는 둘째 치고, 어떤 목표를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거냐? 최종 지향점이 뭐야? 환수를 만드는 거냐? 그 때까지 계속 짐승들의 머릿속을 뜯어고칠 셈이야?'


"어찌 그런 섭리에 벗어나는 짓을 하겠습니까. 그저 인간에게 더 도움을 주는 짐승을 만들고자..."


'진짜냐? 그럼 너를 살려둘 이유가 없는데?'


전음이 변명하는 백주귀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백주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껏 상대를 오판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줄곧 상대가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맹수를 타통하여 조련하는 것은 무림의 법도로 보나 조정의 법으로 보나 떳떳치 못한 일이기에, 그곳으로 자신을 불러낸 이유는 분명 추궁을 위해서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말은 전혀 다르게 들렸다.


백주귀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 이 말은 살해 협박이 아니었다. 앞에 붙은 단서 때문이었다. '환수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널 살려둘 이유가 없다.' 반대로 말하면, '환수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는 거라면, 너를 살려주겠다.' 백주귀는 씩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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