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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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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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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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4)

DUMMY

말이 되면서 얻은 것은 시력 뿐이 아니었다. 말의 길다란 귀가 제공하는 청력 역시 인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뛰어났다. 그런 주옥의 귀에 알아들을 수 없는 백주귀의 주문이 흘러 들어왔다. 그 주문이 이어짐에 따라, 그를 향해 달려들던 맹수들의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곧 제자리에 멈췄다. 그리고는 곧 주옥을 향해 일제히 돌아서서 야생의 적의를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맹수들의 변화는 너무 급격해,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놀라신 듯하군요. 이 놈들은 완벽하게 통제가 안 된다 했지, 아예 안 된다고는 안 했습니다. 이 주문이 백씨마장의 조련법입니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 백주귀가 씩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옥을 노려보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표정은, 지금 그가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가감없이 드러냈다. 지금 그에게 이 순간은, 일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두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목표란, 자신의 자기 손으로 환수를 빚어내고 부리는 것. 흑풍암제를 손에 넣는다면 그 목표를 1년 내에 이룰 수 있었다.


어릴 적 서역의 적양파(翟讓派)에 입문해 무공을 익힌 백주귀는 항상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에 서고 싶어했다. 그의 실력은 동기들 중에서라면 으뜸이었으며, 곧 사형들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천하제일인의 재목임을 의심치 않았다. 후기지수들 간의 비무대회에 나가 처참히 박살이 나기 전까진.


백주귀는 일월교 본교의 2진급 전력이라 알려진 곽가장의 후기지수에게 패배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삼초짜리 패배였다. 곽가장은 교주 일가 중 후계 욕심이 없는 이들을 격리해 두는 곳으로, 치열한 경쟁과 노력보다는 여유와 인격수양을 중시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출전한 후기지수에게도 완벽히 패했으니, 백주귀는 자신의 무재가 한계에 달했음을 느꼈다.


누구보다 욕망이 강했던 백주귀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자 곧 환속을 결정했다. 이후 마장을 연 백주귀는 자신의 진짜 재능이 짐승을 다루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짐승을 자신만큼 잘 이해하는 동시에, 무공이 자신만큼 강한 자는 무림에도, 무림 밖에서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 때, 누구보다 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되살아났다. 무풍이 타고 온 한혈마를 얻게 된 이후엔, 그 욕망에 날개가 돋혔다. 백씨마장이 이름을 날리자 서역 무림의 지존, 일월교도 접촉해 왔고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흑 대협은 환수가 되실 몸이니, 목숨을 취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타격으로 무력화되실 몸도 아니시기에, 실례를 범하겠습니다."


백주귀가 자신만만하게 읊었다. 그리고는 보법을 밟아 주옥을 향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데.'


주옥이 스스로 되뇌었다. 말 그대로였다. 건물 안까지 걸어 들어온 것이 문제였다. 주옥이 스스로 걸어 들어온 이 건물은 확실히 꽤나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짐승들이 얌전히 우리 안에 갇혀있을 때나 통하는 말. 이렇게 온갖 짐승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포위망을 좁혀 오면 주옥으로서도 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익혀둔 보법이 비범하다 하더라도, 적이 이렇게 많이 나와 물리적인 공간을 좁혀 버리면 어쩔 수 없이 보법이 막힌다. 곧 딛을 땅이 남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포위망이 좁아질 게 분명했다.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 온다. 피할 곳이 얼마 없어. 이 놈들을 날려버리지 않는 한...'


짐승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수준을 측정해 보았다. 확실히,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면 짐승들의 포위망을 뚫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내력을 운용하는 짐승들이 달려들고 있었지만, 명백하게 환수였던 청호를 이겨낸 주옥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온몸을 이용해 포위망을 좁혀 오는 짐승들을 공격한다면 분명히 뚫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주옥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이었다.


'포위망을 뚫기 위해선 전력을 다해야 해. 그러다 보면 이 짐승 녀석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백주귀에게 이용만 당하고 있는 녀석들을 죽이고 싶진 않아.'


일대 다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무공으로는 사자후를 개량한 천마후가 있었다. 하지만 호랑이와 늑대, 표범이 달려들고 있는 지금, 준비 없이 내지를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곧 짐승들의 몸뚱이 사이에 갇혀 공격을 허용하다가 사로잡힌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주옥의 허리께에 뜨끔한 느낌이 섬뜩하게 파고들었다. 공격을 허용한 게 분명했다. 맹수들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허리춤에 길이가 한 척 정도 되어 보이는 장침이 꽂혀 있었다. 백주귀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손을 거두고 있었다. 짐승들을 상대하는 사이 거리를 좁힌 그가 주옥의 몸에 침을 던져 꽂은 모양새였다.


"잠드시지요. 저 코끼리를 데려올 때 썼던 중원 유일, 백씨마장의 특제 마취제입니다. 대협을 납치할 때 쓰려고 농도도 세 배쯤 압축시켜 둔 물건이지요. 다른 짐승이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겠지만, 대협은 독초를 먹고도 멀쩡한 몸이니 오히려 이 정도는 돼야 편히 잠에 드시겠지요."


흑풍암제가 독에 대해 남다른 저항력을 갖고 있다는 건 백주귀도 확인한 바였다. 그래서, 그 점까지 감안해 전용 마취제를 만들어 침에 발라 두고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지금 그 침이 주옥의 허리에 꽂혔으니, 백주귀의 말대로 주옥의 무릎이 툭 꺾였다. 이 상태에서 맹수들이 덤벼든다면 주옥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으나, 백주귀가 손을 들자 맹수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백주귀는 여유롭게 빙글거리며 주옥에게 말했다.


"자. 잠들었다 깨어나면 저와 함께 하시는 겁니다. 물론 제 통제를 따르셔야 하니, 그 사이에 백씨마장의 기공으로 상단전을 개조시켜 두겠습니다. 이 백주귀의 말에 복종하도록..."


백주귀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주옥 앞에 바로섰다. 주옥은 버티고 있던 뒷다리마저 꺾이는 것을 느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낭패감이 곧 그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런데, 백주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이유에서였다.


'몸이 이상해. 통제를 벗어난 것 같다. 마치...'


주옥은 주위를 둘러봤다. 맹수들은 백주귀의 명령 한 마디만 떨어지면 즉시 달려나와 주옥의 급소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주귀는 득의양양하게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기세를 읽자,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단어나 심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기운 그 자체가 마치 색깔 있는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기분. 침을 맞기 전까진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이었다.


'...마치 새 경지를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아.'


주옥은 생각했다. 자신이 만독불침에 가깝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취제를 맞았다는 걸 느꼈지만, 아랑곳 않고 다음 움직임을 취하려 했다. 좁혀오는 짐승들 덕에 더이상 발 디딜 곳이 많지 않았으니, 몸을 피할 곳은 위쪽이었다. 그대로 뛰어올라 짐승들의 등을 밟고 건물 밖 개활지로 나가려는 게 주옥의 계획이었고, 다리에도 힘을 넣었다. 그 순간 마취제의 기운이 돌며 다리가 차례로 꺾였다.


백주귀의 짐작대로 힘이 빠지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체내에서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기운이 들끓어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마취침은 우연히도 때마침 거기 있던 주옥의 단전 바로 위에 꽂혔다. 그 즉시, 단전에서 막대한 양의 기운이 쏟아져 나와 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기운이 발작하자, 예상과 달리 마취독이 작용하는 건 아닌가 우려했지만 그런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 기운이 운신을 방해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 크기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여느 독처럼 체내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외부에서 주입된 기운처럼 체내의 내력과 충돌하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주옥의 혈맥을 따라 흐를 뿐이었지만 그 크기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주옥은 이 순간이 자신의 무공 수준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임을 직감했다. 원래부터 강했던 천마의 몸, 그 위에 더해진 인간의 심법, 그것도 모자라 야생마들이 가져다 준 영약, 그리고 청호마정까지. 천재일우의 기연이 중첩된 자신의 몸으로도 지금 이 정체불명의 기운을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저놈의 마취독이 체내의 뭔가를 자극했어.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뭔가 일어나려 한다. 뭔가 큰일이.'


주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백주귀가 뭐라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지만, 이미 체내의 기운에 온 신경을 집중한 주옥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수라장 속에서 혼자 운공에 돌입한 주옥은, 비로소 혈맥을 천천히 흐르는 막대하고도 웅혼한 기운을 마주했다. 이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세상에 못 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기운을 다음 혈도로 옮기는 데 집중했다. 그러자 혈행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주천을 마치는 것. 이것이 지금 주옥에게 갑작스럽게 던져진 과제였다.


반면, 백주귀는 주옥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짜릿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 흑마가 옆으로 몸을 뉘일 것이다. 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일생을 기다려 왔던 환수를 곧 자기 손으로 빚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백주귀가 눈을 감은 흑풍암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자, 마음을 편히 먹고 평안하게 잠드십시오. 일어나면 제게 복종하는 금수가 되어 새 삶을 살게 될 겁니다. 그리고 환수가 되면, 함께 모든 질서를 짓밟고 그 위에 서는 겁니다. 소림이든 마교든 거칠 것 없겠지요."


이후,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뭔가 이상했다. 눈을 감았을 뿐, 흑마의 몸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호흡 역시 침을 맞은 이래 일정하게 안정된 것이, 마취독이 발작하는 증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수상하게 여긴 백주귀가 손을 뻗어 흑풍암제의 맥을 짚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흑마의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외부의 내력을 차단이라도 하듯, 흑풍암제의 혈맥이 그의 손끝을 반탄력으로 튕겨내 버렸기 때문이다.


"이,이런! 이게 무슨!"


백주귀의 얼굴은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짐승이었다면 즉사하고도 남을 맹독을 맞은 말이 작하기는커녕, 차분하게 운공을 하고 있다. 게다가, 무인이 가장 취약함을 보여야 할 운공 시간에도 그의 내력 자체가 몸을 보호하고 있었으니, 이건 백주귀가 아는 어떤 경지보다도 높은 방호술이었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흑풍암제도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가 분명했으니 지금 이 말은 실시간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 강해지고 있단 의미였다. 위기감, 곧이어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계획이 크게 어긋나고 있었다.


"이익... 지금은 안 돼! 내 밑으로 들어온 다음 강해지란 말이다!"


아직 흑풍암제는 자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적대하는 게 분명했다. 지금 이대로 흑풍암제가 일주천을 완성한다면 자신은 영락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어떻게든 운공을 방해하려 손발로 말을 때려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되려 말의 내력에 그 충격을 고스란히 되돌려받고 다시 한 번 각혈을 하고 말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백주귀는 주문을 읊어 맹수들을 움직였다. 흑마를 공격하라는 지시였다. 짐승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사이, 백주귀도 허리춤에 꽂혀 있던 보검을 뽑았다.


'손발로 운공을 멈출 수 없다면 병기로라도! 이 놈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운공을 완성시켜선 안 돼. 그랬다간 내가 죽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흑풍암제는 백주귀 자신의 꿈을 완성시켜줄 수단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상황이 급변했으니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 괴물이 정신을 차리기 전 목숨을 거둬야 자신의 목숨이 온전할 수 있었다. 백주귀의 급박한 결의를 담은 검이 주옥의 미간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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