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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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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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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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수

DUMMY

운남과 인접한 사천 남부에도 철응회와 철응회주 합명의 이름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 때, 합명의 사문인 점창파에서 전갈을 보내 왔다. 마교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으니 인근의 유력 방파는 세력을 규합하여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합명은 응당 가장 먼저 사문으로 달려갔다. 스승인 성화진인(聖花眞人) 금선붕이 구원을 청했으니 응당 임해야 했고, 장로 자리에 오른 친구, 평화진인 주옥과의 재회도 기대가 됐다.


마교와의 싸움이 목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사문을 향하는 발걸음에는 그러한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박살이 난 사문의 현판과 제자들의 시체로 가득한 연무장을 보자마자 모든 감정이 증발했다. 가장 빨리 움직인 합명도 마교보다 느렸다. 그만큼 은밀하고 빠른 기동에, 점창파도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듯했다. 믿기 어려운 그 광경 한가운데, 누가 보더라도 정체를 알 수 있을 만한 자가 서 있었다. 마교주이자 천마 곽처하. 그의 시선이 이제 도착한 합명에게 꽂혔다.


"너는 이곳의 얼치기 장로 놈들보다 낫군. 검을 뽑아라. 실력을 봐 주겠다."


합명은 검을 뽑았다. 문파를 세워 나갈 때 굳은 결의를 담아 벼려낸 동반자, 한청검이 빛났다. 천마를 상대로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드는 그 모습만으로도, 합명을 따르는 철응회인들은 감격에 젖었다. 이미 천마를 본 순간 삶을 포기한 회인들은, 대적할 용기를 짜낸 그들의 장이 자랑스러웠다. 합명은 일생을 연마해 온 절기, 철응검의 정수가 담긴 제 12초를 펼쳤다.


청강유연(靑降悠然). 내려앉는 해동청을 본딴 움직임이되, 그 움직임이 급격하지 않고 원경(遠景)으로 그려진 풍경화처럼 가볍고 조용했다. 정중동과 동중정이 어우러진 푸른 검날이 천마를 향해 춤을 췄다. 천마의 몸과 철응검날이 가까워질수록, 이 다음 초식은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쓸만하구나. 살려둘 정도는 아니지만 보아줄만은 했다."


곽처하는 합명의 절초를 짧게 평했다. 합명은 순간적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직후 자신의 팔이, 정확히는 쇄골부터 이어진 어깻죽지부터가 자신의 몸에서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합명은 멀어져 가는 자신의 팔이 외려 검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는 모습을 보았다. 천마를 본 것은 그 다음이었다.


'허, 참. 수도로 사람 몸을 가르다니. 천하제일인의 경지는 측량할 수가 없구나.'


합명은 경탄 속에 쓰러졌다.


* * *


주인 잃은 손이 오히려 더 단단히 그러쥐었던 그 검이, 지금 주옥의 미간을 위에서부터 찔러 들어왔다. 백주귀는 남은 내력과 전신의 기운을 다 실어 주옥의 미간을 한청검으로 내리찍으려 했다. 손발로는 아무리 공격해봤자 내력의 보호막을 뚫을 수 없었지만, 이 보검의 예리함을 한 점에 집중시킨다면 가능할 터였다.


"죽어라, 괴물!"


환수가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 높은 짐승을 만나자마자 죽이고 있다. 아쉬움이 없을 리 없지만 목숨을 잃을 수는 없는 법이니, 떨어지는 칼끝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검끝이 흑풍암제의 미간에 닿기 직전, 흑마는 눈을 부릅떴다. 흑마의 퍼런 안광이 백주귀의 머릿속을 궤뚫었다. 그리고, 전음이 들려왔다.


'그 검으로 날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백주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힘을 주고 내력을 쏟아도 몸은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경악하는 백주귀를 앞에 두고, 주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켜듯 다리를 쭉 뻗고 몸상태를 확인했다. 백주귀뿐 아니라, 일제히 덤벼들던 수십 마리의 짐승들 역시 온몸이 굳어 버렸으니 여유는 충분했다.


'어디... 이런 것도 되는지 볼까.'


주옥은 한청검을 쥐고 있는 백주귀의 손을 노려보고는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필사적으로 검을 붙들고 있던 백주귀의 손가락이 하나씩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백주귀는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손가락이 펼쳐지자, 경악에 빠져 실성한 듯 외쳤다.


"이... 이 괴물! 무슨 사술을 쓰는 거냐!"


이 건물 내에서 주옥을 제외한 모든 생물의 움직임이 멈춘 것도, 백주귀의 손가락이 펴지고 있는 것도, 전부 각성한 주옥의 의지대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운공에 집중해 체내에 흐르는 기운을 포섭한 직후, 그에게는 새로운 힘이 생겼다. 자신의 의지대로 먼 거리에서, 원하는 대상에게 원하는 힘을 가할 수 있는 능력. 섭력(攝力)을 다루는 허공섭물(虛空攝物)의 경지가 그에게 열렸다.


그는 달려드는 모든 짐승들과 백주귀를 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힘을 가해 억지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꽤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긴 했지만, 버틸만은 했다. 이것으로 능력의 범위와 강도를 시험했으니, 그 다음은 정밀성을 시험할 차례였다. 백주귀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검을 놓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한 이유였다. 곧 백주귀가 억지로 아홉 개째 손가락을 펴자, 그 손에 들려있던 한청검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검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낙하하던 한청검은 빙글 궤도를 바꾸더니 다시 허공으로 올라와 칼끝을 백주귀에게로 향한 채 멈춰섰다. 아무 힘도 받지 않고 있는 검이 허공에 떠 있는 모습. 백주귀는 자신의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하면서도 일종의 경외에 빠졌다.


'어검(馭劍)이다. 이걸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환수. 자신의 눈앞에 있는 흑마는 이제 환수가 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결과, 자신이 죽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흑마를 마주하자, 드디어 환수를 목격했다는 경외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공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얼른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제압당한 상태로는 그럴 수조차 없었다. 전음 한 마디가 다시 들려왔다.


'어검술은 아니야. 그냥 섭력으로 검을 들었을 뿐이지.'


그런 게 중요하단 말인가. 어검이든 섭력이든 나는 곧 죽을 판인데. 이렇게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이...입신의 경지에 도달하신걸 겨,경하드립니다. 그럼 이만 소인 같은 미천한 범부는...그,그만 보내주심이 어떨는지요."


흑풍암제는 처음 적의를 드러낸 그 순간부터 이미 난적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운공을 끝내고 절세고수의 경지에 도달했으니, 백주귀가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몸으로 애걸하던 백주귀는, 이어지는 흑풍암제의 대답에 눈을 번쩍 떴다.


'살려줄게. 내가 각성한 건 어쨌거나 네 덕이기도 하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백주귀의 목소리에 희망이 담겼다. 정황상, 자신이 찔러넣은 마취약이 알 수 없는 부작용을 일으켜 흑마를 각성시킨 건 분명했다. 물론 그럴 의도가 아니었긴 했지만, 지금 흑풍암제가 그걸 은혜라고 여긴다면 당장 이용해야 했다.


"살려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아, 그래. 필요한 게 있지. 너희, 환수를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 환수와 그들의 이능에 대한 자료도 많을 거야. 겸사겸사 상단전에 대한 연구도 했을 거고.'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함께 나가시지요. 제가 지금 당장 보여드리겠습니다!"


퍼렇게 질려 있던 백주귀의 얼굴이 약간 화색을 띠었다. 흑풍암제는 처음부터 백씨마장의 연구 성과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 그 관심을 다시 표한 것이니, 이건 진심으로 백씨마장의 지식을 탐내는 모양새였다.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협상도 할 수 있다.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한 줄기 비쳤다.


'아니, 일단 어디 있는지 말해. 서고에서 찾을 수 있는 거냐? 상당한 비전 지식일텐데.'


희망의 빛이 꺼졌다. 흑풍암제는 자신을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자료의 위치만을 얻어내고는 자신을 죽일 속셈이다. 살려주겠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이 말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놈이었다. 백주귀가 대답할 의지조차 상실한 것을 보고, 흑풍암제는 전음으로 대답했다.


'살려준다니까? 내가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겠구나. 네가 죽을 테니까. 그래도 한 번 믿어 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이렇게 말하며, 지금껏 허공에서 백주귀를 겨누고 있던 한청검을 자기 눈앞으로 불러들이고는, 그의 몸을 굳혔던 섭력마저 해제했다. 백주귀의 몸이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백주귀는 납작 엎드리며 이를 갈았다.


'이 미물 자식이 내 목숨을 가지고 노는구나. 이렇게 굴욕적일 수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이, 참. 속고만 살았나. 살려준대도 못 믿으니 이거 난감해 죽겠네.'


백주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 흑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방금 자신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복종을 표한 참이었다. 이를 갈며 저주를 한 건 어디까지나 티가 나지 않을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이 짐승이 생각까지 읽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놀라는 사이 또 한 번 전음이 들려왔다.


'놀랐어? 머릿속을 읽진 못해. 그냥 사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게 됐다 해야 되나, 훨씬 추상적인 거지. 그래도 네놈이 잔뜩 의심스러워하는 건 알겠다.'


백주귀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상대방의 기색을 엿볼 수 있다, 그럼 이 놈의 환수를 속여서 위기를 탈출하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과연 불가능하기만 할까?


한 가지 생각이 번득 스쳐 지나갔다. 기색을 읽는 거라면, 기색마저 속여넘길 정도로 연기하면 되는 문제였다. 게다가, 흑풍암제가 말했듯 지금 그의 말을 믿든 믿지 않든 달라지는 게 없기도 했다. 백주귀는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외쳤다.


"소인의 목숨을 살려주시는 은혜, 뼈에 새겨도 모자람 없으니 요구하신 자료는 서고가 아니라 제 개인 집무실에 가져다 뒀음을 일러드립니다!"


그제야 흑풍암제는 흡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일어나라.'


그 말에 백주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살아남을 방법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순간,


"아악!"


백주귀는 다시 자리에 쓰러졌다. 한청검이 번득이며 번개같이 그의 양 단전을 찌르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내력이 담겨 있지 않은 검날이었지만 이미 적잖이 내상을 입은 데다 순간 방심까지 한 백주귀의 몸으로 단전을 방어하는 건 무리였다. 급히 억지로 내력을 일으켜 봤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폐단전이었다.


"이, 이 괴물 자식! 내 목숨이 장난감이더냐!"


백주귀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 한청검이 또 유유히 움직여 백주귀의 허리춤과 검집을 연결하고 있는 가죽끈을 끊었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 검집 안에 들어가더니, 검집 째로 주옥에게 되돌아왔다. 주옥은 백주귀를 내려다보며 전음을 날렸다.


'네가 장난감처럼 쓰고 버린 목숨은 몇 갠데? 게다가, 폐단전을 당해도 살 수는 있잖아? 거짓말은 안 했어. 뒷일은... 저기 저 코끼리한테 맡기자고. 쟤가 좀 똑똑한 것 같으니까. 네가 정말 좋은 주인이었다면 얘네가 널 적대할 리 없겠지.'


이렇게 말한 뒤, 주옥은 코끼리에게 다가갔다. 처음부터 이 코끼리를 눈여겨봤다. 우리의 문이 일제히 열린 순간에도 뛰쳐나오지 않고, 지금껏 다른 짐승들과 달리 주옥에게 별다른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짐승은 저 코끼리 단 한 마리뿐으로, 백씨마장의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게 분명했다. 그래서, 주옥은 코끼리에게 말했다.


'저 인간, 네 맘대로 처리해. 살려주고 싶다면 살려주고, 죽이고 싶다면 죽여.'


코끼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고 있는 백주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백주귀의 배 한가운데를 발로 꾹 밟고 체중을 실었다. 차라리 단말마가 나을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끄아아악!!"


백주귀의 배에서는 사람의 몸에서 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소리들이 났다. 터지고, 부러지고, 끓어오르는 소리. 아마 그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한계치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코끼리가 발을 치우자, 모양이 이상하게 변한 백주귀의 배가 드러났다. 가운데는 비정상적으로 납작해져 있었고, 으스러진 뼈와 오장육부는 거죽이 덮고 있는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거나, 거죽을 뚫고 나왔다. 내장이 전부 상했으니, 입에서는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그래도 머리는 멀쩡해 이 모든 순간을 평소처럼 느꼈을 것이다.


'죽겠군.'


주옥은 코끼리의 선택을 담담히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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