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죽으려고 했는데 대공가에 취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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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L
작품등록일 :
2024.08.0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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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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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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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MMY

***

 

“자, 이제 말해보거라.”


안나그레타는 사람들을 물리고 남편의 서재로 향했다. 밀리는 아도니스와 함께 그녀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빼곡한 책장으로 둘러싸인 서재 한가운데에는 집무용 책상 외에도 손님을 맞을 수 있는 4인용 테이블이 있었다. 안나그레타는 목걸이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앉으라며 손짓했다.

 

“네 요청대로 사람을 물렸으니.”

“얼마나 대단한 걸 알고 있길래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럴 만한 주제가 되나?”

 

아도니스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밀리를 노려보았다. 이 정도의 미움과 의심은 그녀에게 익숙했기에,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저는 대신전이 위치한 성도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요.”

 

정확히는 성도 근처의 야산이었지만.

 

***

 

주방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어린 하녀치고 밀리는 본의 아니게 성서에 얽힌 창세나 신화에 대한 내용을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생존을 이어가던 중, 특정 조건 하에서는 불행이 다소 완화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신성력과의 접점이었는데, 주변인들을 괴롭히는 그녀의 불행은 희한하게도 신을 모시는 사제들에게는 미치지 않았고, 신전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도 피해갔다. 덕분에 밀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생필품이나 책을 구해야 할 때 신전을 통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 번째 회귀 이후로 그녀는 아예 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성도는 알비오니아 제국의 국교가 본거지를 두고있는 도시로, 대신전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금만 걸어도 신성력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무료한 시간과 잊고 싶은 기억을 묻어두기 위해 그녀가 닥치는대로 읽어댄 책 중에 신학 서적이나 성서, 다양한 판본이나 해석본 같은 것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제님들께서 고아인 제가 안쓰러웠는지 글도 가르쳐주시고, 책도 읽게 해 주셨어요. 그러다 중앙 대신전의 자료 정리에도 불러 주신 적이 있고······.”

 

글은 첫 번째 삶에서 하녀 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깨우쳤기에 사제들에게 글을 배웠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몇 차례 회귀를 거치며 그녀가 대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약간이나마 안면을 튼것은 사실이었다. 높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이따금씩 대신전 장서관 개편 작업이나 대규모 고문서 정리 등의 커다란 일감에 일일 조수로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는 되었다.

 

“···그 자료들에서 전전전대 대신관께서 앨버 대공 아론 에인스워스의 요청으로 성유물의 재축성을 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어요.”

 

안나그레타와 아도니스는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기억해내고는 눈빛을 교환했다. 아론 에인스워스, 그는 아도니스의 고조부였다. 이름을 아는 듯한 두 사람의 눈치에 밀리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분의 부친이신 안토니 에인스워스 대공께서 치유의 성유물을 탐한 자들로 인해 살해당했다고요.”

 

일순 공기가 차가워졌다.

 

***

 

순전히 우연이었다.

원래라면 ‘앨버 대공’쯤 되는 고위 인사의 단순 출입 명부도 아닌 알현 기록은 열람이 제한된 서가에 보관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서류는 보관 기간이 지나 창고용 서가로 옮겨가는 자잘한 문서들 틈에 섞여들었고, 하필이면 그날 하루만 분류 작업에 동원된 사람의 눈에 띄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성도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일일 작업자 중에서 하필이면 그날의 작업자가 ‘앨버 대공에게 물건을 돌려다 주라’는 유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 밀리의 손에 걸리던 수많은 서류들 중 스치듯 눈에 띈 그 이름에 이끌린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들여다본 기록은 그녀의 상상 속 귀족들의 우아한 신앙 활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요약하자면 내용은 이러했다.


「앨버 대공 아론 에인스워스는 막 부친이 살해당해 어린 나이에 대공위를 승계받은 직후 성도에 찾아왔다. 그는 대사제를 만나자마자 앨버 대공에게 대대로 내려진 ‘은총의 잔’을 거두어달라 여신에게 읍소했다. 이 잔은 여신께서 초대 앨버 대공에게 수호를 명한 그 성유물로, 그 어떤 상처와 질병도 치유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잔을 사사로운 일에 쓰게 해달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자들로 인해 에인스워스 가문은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왔다. 그들 대다수는 거절당하면 앙심을 품었고, 오랜 원한이 몇 대를 걸쳐쌓이고 쌓여 마침내 대공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성배의 수호는 시조인 초대 앨버 대공의 불신으로 인해 내려진 업이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여신께서는 법황을 통해 성배의 모습을 거두어가셨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배가 필요해질 때가 오면 오직 수호자만이 그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했다··· (중략)」

 

*

 

“그 방법이 앨버 영지의 가장 높은 절벽 동굴에 목걸이를 가져가서 수호자의 피를 묻히고 여신을 부르는 거라고.”

“네······.”

 

밀리는 어쩐지 자신이 없어 소심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처음 듣는다는 듯한 기색이었지만 그녀를 완전히 불신하는 눈은 아니었다. 동굴을 언급했을 때 눈빛을 주고받은 것을 보면 그들의 머릿속에 딱 떠오른 장소가 영지에 정말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감이 오는구나. 하지만 그곳의 입구는 매우 작고 협소해서 체구가 작은 성인 혼자서나 겨우 들어갈까말까 한 곳인데······.”

 

하지만 어느 정도 믿어볼까, 하는 기색의 대공비와 다르게 대공자는 여전히 냉랭한 태도였다.

 

“어떻게 믿지? 다시 말하지만 우리조차 모르는 내용을 너 따위 외지인이 알고 있다는 걸 난 못 믿겠는데.”

“······.”

 

이럴 것 같아서 아는 척 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하지만 타당한 지적이었다. 밀리는 억지로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씀이 맞아요.”

 

그녀 나름대로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했지만 그 방법이 어디까지 진짜일지는 몰랐고,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성배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실패한다면 밀리는 대공의 목숨과 가문의 보물을 두고 사기를 친 대가를 치러야 할 터였다. 그 생각을 하자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제가 이걸로 두 분을 속여서 얻는 게 뭐가 있겠어요?”

 

못 믿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갈길을 갈 수 있다면 참 좋았을텐데, 말에서 떨어져 머리에서 피를 흘리던 대공을 떠올리니 차마 그럴 수 없었기에 밀리는 떨림을 참고 더듬더듬 말을 맺었다.

 

“저는 그냥, 대공 전하께서 다치신 건 결국 저 때문이니까, 어떻게든 살리고 싶을 뿐이에요······.”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고 말을 맺는데 괜시리 목이 메었다.


“나는 여기에 걸어보고 싶구나.” 


주눅들어 고개를 축 늘어뜨렸던 밀리도, 모친 곁에 앉았던 아도니스도 퍼뜩 안나그레타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아우로라의 별이 사실 치유의 잔인 것은 대공과 그 배우자가 작위와 함께 물려받는 비밀이란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 봉인을 푸는 것도 진실일 확률이 높아.”

“그런······!”


통했다. 그녀가 믿어준다. 밀리의 눈에 깃든 안도감을 읽은 안나그레타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니 이제 봉인을 푸는 것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봐야겠구나. 어디 보자, 그이를 데려갈 순 없으니 피를 받아가야 하려나··· 하지만 그곳에 들어갈만한 체구의 기사라면 랜스 경 정도일텐데 지금 로엔그린 경을 따라갔지, 그러면···.”


이제 무사히 대공을 살리기만 하면 된다. 설산의 동굴을 헤매는 것 쯤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나서기도 전, 선수를 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가면 됩니다.”

 

아도니스가 말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앙상한 팔 아래 도드라진 푸르스름한 핏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낼 필요도 없고, 좁은 공간에 들어갈 걱정도 없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에이든, 하지만 너 혼자 다녀오기엔 너무 위험해.”

“하지만 저 아니면 갈 사람도 없죠. 그리고······.”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밀리를 힐끗 쳐다본 아도니스가 말을 맺었다.


“타인에게 아버지의 피와 아우로라의 별을 들려보낼 순 없습니다. 그건 곧 아버지의 목숨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까요.”

“······정말 누굴 닮아서.”

 

그의 말이 맞았다. 동굴이 좁다면 많아야 어린아이 둘이나 작은 체구의 성인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텐데, 그 정도 소수인원이라면 목걸이를 들고 도망치지 않을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남편이 쓰러진 상황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혼자보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대공비의 허락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아도니스는 이에 쐐기를 박듯 말했다.

 

“마침 눈도 그쳤겠다, 곧장 다녀오겠습니다.”

 

*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도니스가 목걸이를 들고 성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또다시 눈보라가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이 눈보라는 일반적인 자연현상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무언가의 규칙에 의해 부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 규칙을 모르는 것이 문제일 뿐. 

금방 되돌아와 후드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아도니스를 지켜보던 밀리는 무심코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왜 그러세요, 또······.”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눈이 마주치자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에게 가까이 가자, 이번에는 지나가던 하인을 손짓해 불렀다. 밀리와 하인을 나란히 세워둔 그는 우선 하인에게 목걸이를 쥐어주며 말했다.

 

“나가서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서 있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목걸이를 쥔 그 하인은 성문을 나선지 불과 몇 분만에 눈사람이 되기 직전 몰골로 들어왔다. 다시 목걸이를 빼앗은 대공자가 맨손이 된 하인을 바깥에 세워두었다. 희한하게도 목걸이를 가져가고 나니 눈보라가 치지 않았다. 확인을 마친 후 하인을 불러들인 뒤 마저 할일 하라며 보낸 그는 이번엔 밀리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나가봐.”

 

어쩐지 내쫓는 것 같은 그 어휘 표현을 신경쓰며 밀리는 목걸이를 쥐고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조금 전 그 하인이 눈바람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순식간에 엉망이 된 것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망토 자락을 꼭 쥐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말 이상하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지? 아니, 아무래도 상관 없나······.”

 

아도니스가 중얼거렸다. 영문을 모르는 것은 밀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깐 분명 성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그녀를 가두려는 듯 눈보라가 몰아쳤었는데, 갑자기 얌전해진 것은 목걸이의 영향이라고밖엔 설명이 안 됐다. 하지만 그 하인에게는 왜 해당이 안 되었던 걸까?

뭐가 어떻든간에 실험은 끝난 것 같아 도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앞을 막아섰다.

 

“공자님?”

“이대로 간다.”

“네?! 지금요?”

“앞장서서 걸어. 길은 내가 알아.”

“진짜 이대로요······?!”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아우로라의 별이 들려있었다. 이런 귀중한 것을 지니게 하다니? 그러나 목걸이를 들어보이며 물었는데도 그는 성가시다는 얼굴로 석궁을 어깨에 걸칠 뿐이었다. 언제든 쏴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출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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