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죽으려고 했는데 대공가에 취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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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L
작품등록일 :
2024.08.0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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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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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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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MMY

밀리의 제도행은 없던 일이 되었다.

대공은 밀리의 신성력에 대해 아는 자들에게 입단속을 해뒀다고 했다. 그나마 사무엘을 제외하면 알고 있는 모두가 대공내외의 최측근이자 성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입단속을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밀리의 일상은 다시 언제나처럼 돌아왔다. 오전에는 아도니스의 식사를 만들어 함께 자리하고, 그 뒤엔 고양이들을 돌보며 빌과 함께 아도니스의 시중을 드는 것으로.

다만 아도니스가 캐서린의 죄에 대한 밀리의 속죄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를 성밖으로 밀쳤던 날 이후로 그를 보는게 껄끄러웠다.

‘예전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으려나.’

자연스러운 행동을 위해 이전까지 그를 어떻게 대했었는지 기억해내 흉내를 내 보려고 했지만 기억이 나긴커녕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결국 아도니스가 내리는 지시에 서투르게 반응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미묘하게 불편한 기류를 먼저 견디지 못하고 깬 것은 의외로 아도니스 쪽이었다.

“급료가 올랐다고 하던데.”

식기를 정리하러 온 밀리에게 대뜸 아도니스가 말을 던졌다. 불편한 분위기에 빨리 식사를 마치고 일할 생각을 하고 있던 밀리는 갑자기 말이 걸려오는 바람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성을 나서지 못하게 됐으니까요. 안 됐다고 두 분 전하께서 챙겨주셨어요.”

아도니스는 피식 웃었다.

“하긴 뭐, 네가 덜렁대다 결계를 발동한 덕에 빙정석이나 경비 인력 등을 많이 아끼긴 했지. 이번에 올려준 급료의 배는 더 들었을걸?”

“서로 좋죠, 뭐.”

“흥, 성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급료가 높아져 봤자잖아.”

“?······그래도 안 높아지는 것보단 낫죠?”

“······음.”

지극히 맞는 말이었고, 그걸로 대화는 끊겨 정적이 흘렀다. 수저가 식기에 작게 부딪혀 달그락대는 소리만이 흘렀다. 그렇게 빈그릇을 모두 포갠 밀리가 꾸벅 인사하며 방을 나가려는데 아도니스가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벽에 세워 둔 부츠에 발을 꿰었다.

“흠 바람이나 쐴까.”

“지금요?”

“보면 몰라? 신발 신고 있잖아.”

“···그러세요, 그럼.”

그렇게 둘은 졸지에 함께 방을 나섰다. 빈 식기를 조심스럽게 옮기는 밀리와 나란히 걷던 아도니스가 정면을 보며 말했다.

“높인 급료론 뭐 했는데.”

오늘따라 뭘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것인지, 누가 봐도 수상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켕기는 구석 없이 떳떳했고, 결정적으로 아도니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캐낼 정도의 관심과 열정도 없었다. 그래서 밀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성실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축을 조금 더 늘렸고··· 남은 돈으론 책을 샀어요.”

“책? 넌 나가지도 못하는데 책을 어떻게 사?”

“저야 성 밖에 못나가긴 하지만 부탁만 하면 리사가 사다준다고요?”

“아 그러셔. 무슨 책을 샀길래 잘난 척이야?”

“신학서랑 주간지요.”

아도니스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비대칭으로 꿈틀거렸다.

“눈썹이 갑자기 자유분방해지신 것 같네요?”


“네가 샀단 책이 예상 외라. 신학서랑 주간지는 왜 샀는데?”

“주간지는 성밖으로 못나가면 세상 돌아가는 게 궁금할 것 같아서 샀고요, 신학 서적은···”

바람을 쐬러 간다고 하기에 복도에서 적당히 사라져 줄 줄 알았던 아도니스는 정신을 차려보니 주방에 도착해 빈 식기를 건넬 때까지도 그녀의 곁에 붙어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관성적이지만 성실하게 대답해주고 있던 밀리는 이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귀찮음이 밀려왔다. 결국 그녀는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는 아도니스를 뚱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는 게 많으실까.”

“내가 뭘.”

“급료가 올랐냐, 얼마 올랐냐, 그걸로 뭘 샀냐, 그런걸 왜 샀냐··· 이러면서 계속 물어보시잖아요.”

“내가 뭐, 못 물어볼 걸 물어봤어?”

“평소에 별로 질문도 관심도 없으신 거 제가 다 아는데 갑자기 물어보시는 게 그럼 안 이상하겠어요.”

말을 함과 동시에 밀리는 정말로 아도니스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줄곧 요점이 아닌데서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것을 깨달은 밀리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돌려서 말하지 마세요. 도련님이랑 안어울린다고요.”

따지고들면 종이 주인에게 명령을 한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가 이를 문제삼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예상대로 아도니스는 정곡을 찔린 것인지 대담한 언사에 놀란 것인지 잠시 벙찐 얼굴을 했다. 화를 낼법도 한데 잠시 그 상태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버리라고.”

“네?”

“...잊어버리라고!”

“뭐를요.”

우물대던 그가 고개를 돌려 잠시 밀리의 눈을 보다가 금세 다시 시선을 돌리곤 말했다.“

“속죄하라고 했던 거, ···잊어버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인간이 웬일이야?’였다. 이 성에 도착해서 놀랄 만한 일은 아주 많았지만 방금 전 아도니스의 발언은 대공이 낙마 사고를 당했을 때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그에게도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긴 했는지 고개는 돌린 채로 눈은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 곁눈질로 밀리의 표정을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것을 보자 머뭇거렸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약간 후련하다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혈연도 아닌데 연좌제를 지울 순 없지.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한들 성유물을 네가 반환했으니 그걸로 참작이 가능했는데 그 생각을 못했었던 것 같군. 어차피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도 된 거, 앞으로는 그냥 일이나 똑바로 잘 해.”

그렇게 자기 할 말을 속사포처럼 늘어놓은 뒤 그는 간다, 한 마디를 붙이고는 주방을 빠져나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밀리는 한동안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와······.’

대체로 맞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앨버 대공자나 되는 사람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하는 건 놀라웠다. 기왕 심한 말 번복할거 눈이나 마주치고 말하면 좀 좋지 않았을까, 싶어 헛웃음이 나오는 와중에 들어선 안 될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방금 좀 귀여웠는데?’

사실 두 사람 다 열네 살 동갑내기라지만 회귀로 누적된 세월을 감춘 밀리 입장에서 사춘기 남자아이가 솔직하지 못하게 심술을 부리는 모습은 웃기고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이를 티내는 것은 불경한 일이니 꾹꾹 눌러참아야 했다.


***


그렇게 평화로운 시절이 지나갔다.

마냥 행운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진 빌의 무릎에 피멍이 들거나, 기르던 말이 병에 걸려 죽거나, 리사의 동생이 고열로 심하게 앓는 등. 평범하게 사람이라면 흔히 맞닥뜨릴만한 불행들은 드문드문 예고 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멀쩡한 조명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사흘에 한 번 꼴로 새가 날아와 창에 부딪혀 죽고, 멀쩡하던 수프 그릇이 걉저기 깨져서 식탁보를 적시며 주변인들은 느닷없이 중병에 걸리는 등 매일같이 일어나던 원인 모를 비합리적 불행은 없었고, 그것만으로도 밀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고 사소한 불행. 평화로운 일상과 가끔 달걀을 깨면 노른자가 두 개 나오는 정도의, 누구나 겪곤 하는 하찮은 행운.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바라마지않던 평온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불안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벌어지는 전쟁과, 이후 이어지는 패전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패전 소식에 뒤따르는 열 살로의 회귀가 문제였다.

이번 회귀에서야 비로소 무언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던 만큼,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벌써 수 차례나 회귀를 했지만 여전히 그 조건은 명확하지 않았기에 전쟁 발발과 패배,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날이 덥고 습하다니, 이게 어떤 느낌인지도 아득하네.”

리사가 사다 준 알비오니아 주간 소식지를 사소한 것까지 꼼꼼하게 읽고 난 밀리는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전쟁은 5년 뒤 남부에서 발발한다. 그 조짐이 지금부터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필요할 것 같았다. 제국 안의 모든 일들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모든 지역의 소식을 다 읽기는 했지만 밀리가 가장 눈여겨 보는 것은 전쟁 발발지가 될 남부와, 그 상대가 될 황제의 움직임이었다. 교구 하나를 또 축소했고, 황녀가 열여섯 살 생일을 맞아 데뷔탕트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에 특별한 것은 없어보였지만, 밀리는 펜에 잉크를 적셔 그것을 양가죽 표지로 감싼 노트에 기록했다.

“언젠간 쓸 데가 있어야 할 텐데.”

혼자의 힘으로 전쟁을 막는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크게 빚을 진 대공이나, 자신도 몰랐던 신성한 힘을 힌트 삼아, 어떻게든 운명을 바꿔볼 수만 있기를 바라며 그녀는 책갈피를 꽂아둔 신학서를 펼쳤다.

그렇게 손때 묻은 신학서와 빼곡한 양장 노트, 날짜별로 정리된 주간지 뭉치가 쌓여가며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몇 번째인지 모를 밀리의 스무 살이 또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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