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죽으려고 했는데 대공가에 취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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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L
작품등록일 :
2024.08.0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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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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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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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MMY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대뜸 설산을 오르다니.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밀리는 다급해져 허둥거렸다. 성을 빠져나가던 길에 붙잡힌 상태 그대로인지라 방한복은 문제 없었지만, 등산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던 식량을 모두 들개를 쫓는 데 써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 잠시만요. 방에 두고 온 게 있어요!”

“다녀와서 챙겨.”

“지금 챙기지 않으면 안 돼요. 다녀오고 난 뒤면 완전히 못 쓰게 되어서 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 느려터진 걸음걸이로 언제 다시 3층탑 손님방에 올라갔다 오겠다고.”

 

짜증을 내며 머리를 쓸어넘긴 아도니스는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세웠다.

 

“빌.”

 

하필이면 조금 전 그의 ‘실험’에 동원되어 눈보라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아 만신창이가 된 그 하인이었다. 빌은 초췌한 얼굴로 조금 불쌍해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주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예, 도련님."

“3층탑 손님방에 다녀와. 최대한 빨리. 야, 빨간머리. 필요한 게 뭐야. 이 녀석이 대신 가져올거다.”

“스툴 위에 놓인 보따리예요 따뜻하고, 맛있는 냄새가 나고, 약간 묵직해요.”

“들었지.”

 

아도니스는 턱을 까딱였고, 빌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빠르게 성 안으로 사라졌다.

 

*

 

잠시 후, 밀리는 운반의 효율과 안전을 위해 목걸이를 목에 걸고 손에는 하녀장 마리아가 만들어 준 수프 보따리를 든 채로 묵묵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

“······.”

 

저벅, 저벅.

산길에는 눈 밟는 소리와 등산으로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렸다.

 

“더 빨리 걸어, 죽기 싫으면.”

“네에······.”

 

아도니스 대공자는 그녀를 뒤따르며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이따금씩 석궁으로 등을 쿡 찔렀다. 다행이라면 그렇게 굴면서도 버리고 가겠다고는 하지 않는 점이었다.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날씨 면에서 그에게 쓸모를 증명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와 동행해서인지 하늘은 출발 때와 다름없이 맑았고, 공기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날씨 덕인지, 눈앞에 펼쳐진 설원 때문인지 몰라도, 밀리는 살면서 아주 오랜만에 평화롭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꼬르륵. 뒤쪽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

 

“······.”

 

석궁을 내밀면 닿을 거리였기에 소리는 너무도 선명했지만, 밀리는 애써 외면한 채 계속해서 걸었다. 또래에 비해 한참 왜소한 그의 몸과, 일전에 음식을 마구 게워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역시 모른척 해줘야할 것 같았······

꼬르륵.

꼬르르륵.

 

“······.”

“······.”

 

이걸 모른 척 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밀리는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공자님?”

“······뭐.”

"저기 그루터기가 있는데 조금 쉬었다 가는건 어떠세요?"

 

순간 후드 아래로 보이는 소년의 창백한 얼굴에 짜증과 불쾌함이 퍼져나갔다. 그에게 모멸감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밀리는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그게, 죄송해요! 아하하, 날이 너무 추워서 그런가 걷는게 조금 불편해서요···"

 

아도니스는 구겨진 얼굴 그대로 고개를 숙여 밀리의 발을 내다보았다. 이때다 싶어 밀리는 수프 단지를 든 팔도 덩달아 축 늘어뜨렸다.

 

"아휴, 추우니까 짐까지 무겁게 느껴지는 게, 조금만 앉아서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안 될까요?"

 

사실 정말로 자신이 힘든 것이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말을 꺼내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인상을 찌푸리고 발과 보따리를 번갈아 보던 그는 어느 정도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귀찮게."

 

구겨진 미간을 아주 약간 편 채로 그가 그루터기를 턱짓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어머니는 너를 믿으시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니니까. 수틀리면 그자리에서 죽일거다."

 

그러고는 마른 다리를 휘저으며 먼저 그루터기 쪽으로 걸어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가보니 그루터기는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커서 둘이 앉아도 한참 자리가 남을 것 같았다. 다만 어째서인지 그는 앉지 않고 그 앞에 서 있어, 혼자 앉으려니 다소 눈치가 보였다.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를 보는 그의 찌푸린 미간은 도통 펴지질 않았다.

 

“쉬고 싶다고 말해놓고 막상 쉬게 해주니 눈치를 보면 어쩌란 거지? 앉아.”

“감사합니다.”

 

그도 앉아서 같이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밀리는 그를 세워둔 채로 어색하게 그루터기에 앉아 하녀장이 챙겨준 수프를 꺼냈다. 이중삼중으로 된 묵직한 용기는 보온의 효과가 있는지, 뚜껑을 열자 맛있는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녀는 한 숟갈을 뜨려다 말고 챙겨온 컵에 수프를 조금 담아 아도니스에게 다가갔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하녀장님께서 싸주신 거예요. 저 혼자 먹기엔 죄송하고, 어차피 양도 많아서요. 좀 드세요.”

“······.”

“······안 드실 거예요?”

“어쭙잖게 신경쓰는 척 하는 이유가 뭐지? 난 이딴 거 안 먹어.”

 

어느 정도 예상대로, 그는 수프를 흔쾌히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돌아서거나, 원하지 않으면 버리셔도 된다고 말하며 건네주고 돌아서거나 하려고 했다.

 

ㅡ도통 입맛이 없어. 너 다 먹거라.

ㅡ할머니, 이러다 쓰러져요······. 제발 한 수저만 뜨세요, 네?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끼니를 거부하기가 일쑤였던 캐서린을 떠올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쩐지 무언가 울컥 치미는 듯한 기분을 억누르며 밀리는 최대한 떨리지 않는 척 대공자에게 수프가 담긴 컵을 계속해서 내밀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추운 곳에서 오래 버틸 수 없어요.”

“뭘 안다고. 너보단 오래 버틸걸.”

“네, 그래서 저는 더 많이 먹으려고요.”

 

그의 손에 들린 석궁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으니 턱이 달달 떨려왔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공자님도 드세요.”

 

이제는 김이 나지 않는 컵을 여전히 대공자에게로 내밀고 있는 손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공자는 잠시 그런 밀리와 내민 손을 번갈아 노려보더니, 이내 컵을 휙 낚아챘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 계집애가 주둥이만 나불댈 줄 알지.”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컵을 움켜쥔 손이 새하얘져 있었다.

 

“내가 만약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처럼 뭔갈 먹어서 기운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쩔 거냐?”

“네? 그게 무슨······”

“이미 보지 않았나? 뭐, 상관없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다시 기억나게 해 주지.”

 

그제야 공자가 야외에서 마구 묽은 액을 게워내던 것을 떠올린 밀리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아들이 입이 짧은 편이라던 대공과 그 말을 꺼내지 말라는 듯 핀잔하던 대공비의 모습도 함께 생각났다.


‘그럼 그게 일시적인 심리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식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였어?’


헉, 하고 숨을 들이켰지만 이미 그는 컵에 담긴 수프를 한입에 털어넣은 뒤였다.

 

“고, 공자님. 저는, 그러니까, 제 의도는······.”

“왜, 이제와서 겁나? 독이라도 탄 게 아니라면 벌벌 떠는 것좀 그만두지 그래. 안심해, 맛은 나쁘지 않았······”

 

여기까지 말한 대공자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공자님?”

“······가, 없는데.”

“······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뭐가······ 말씀이세요?”

“맛이 있을 리가, 없다고······.”

 

이제는 내 어깨까지 붙잡고 흔들 기세인 그가 마리아의 요리 실력을 의심해서 이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소리기에? 그는 그저 멍하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

 

배가 고프다며 칭얼대다가도 젖을 물려주면 얼마 먹지 못하는 아기. 아도니스는 그런 아이였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할까 두려웠던 대공 부부는 정기적으로 아기를 데리고 영지 내 신전에 방문해 겨우겨우 신성력으로 아이의 목숨을 붙들어놓았다. 다행히 신전에서만은 아도니스도 평소만큼 애먹이며 젖을 먹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이가 느리지만 천천히 자라나며 그들은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맛을 느끼지 못했다. 


본능적인 허기로 입안에 뭐든 집어넣더라도, 아무런 맛도 없는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불쾌한 감각 탓에 금방 식사를 멈추기 일쑤였다.

신전에서는 젖을 곧잘 먹었던 것을 떠올린 대공 부부는 성장기 동안만이라도 아들을 신전에서 지내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곳에서만은 미약하게나마 맛을 느낄 수 있어, 그도 평균적인 식사에 근접한 양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ㅡ교구 축소?

ㅡ예, 황제께서 소규모 신전의 정리와 교구 개편을 명하셔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ㅡ그런······ 대신전에서도 허락한 건가?

ㅡ아시잖습니까, 대사제님께서도 최근에 새로 선출되셨는걸요.

ㅡ······골치로군. 아들 밥 좀 먹이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내 미처 몰랐네.

ㅡ죄송합니다, 전하.

ㅡ살펴 가시게.

 

새로 등극한 황제가 대신전을 견제하려 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황제는 신전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지원을 위한 교구 개편이라는 명목 하에 신관의 인원 수가 기준치에 미달한 지역별 작은 신전은 '정리'하였으며, 고위 신관들의 신성력 사용에도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고위 신관들이나 신성력 치료가 절실했던 사람들, 외진 곳에서도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던 여러 신민들은 반발했으나 공교롭게도 새 황제의 즉위와 엇비슷한 시기에 새로 선출된 젊은 대사제는 황제의 요구를 모두 수긍했다. 황실에서는 약속한대로 큰 지원금을 보내왔기에 반발여론은 점차 잦아들었다. 하지만 지원금보다는 새 대사제가 태후의 집안과 연이 닿아있다는 소문의 힘이 더 컸다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알 사실이었다.

어쨌든 앨버 영지의 신전은 그렇게 사라졌고, 가장 가까운 북쪽 교구 신전은 말을 타고서도 한참을 걸릴 거리에 있었다. 유일한 후계자를 먼 곳에 보낼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

 

그렇게 아도니스는 주변 어른들이 사정해야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는게 고작인 아이가 되었고, 자연히 성장 또한 또래에 비해 턱없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자신을 결함 있는 존재라 생각해왔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없어질 수가 있는 건가.’


자신의 감각을 믿지 못하는 얼굴로 밀리를 쳐다보는 아도니스의 눈에는 미지에서 기인하는 공포마저 서려있었다.

 

“넌 정말로······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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