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죽으려고 했는데 대공가에 취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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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L
작품등록일 :
2024.08.0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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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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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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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MMY

“······.”

 

밀리는 곤란한 표정으로 아도니스를 쳐다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참을 모르고 살던 낯선 감각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훅 밀려온 덕분에 잔뜩 혼란스러웠던 것도 잠시, 찬 공기가 아도니스의 정신을 깨웠다.

그제야 그는 볼품없이 왜소한 자신의 모습을 보인 걸로도 모자라 가문의 수치라고 여기는 자신의 결함까지 무심코 이 외부인 계집애에게 말해버릴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정신이 아니군.’

 

스스로를 타박하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됐다. ······방금 건 잊어버려.”

“네? 네······.”

“다 먹었으면 일어나. 마저 움직인다.”

 

밀리는 남은 수프를 아도니스처럼 입안에 털어넣고는 재빨리 그를 따라 일어났다.

 

아도니스는 석궁을 든 채 밀리를 앞세우고 뒤에서 걸었다. 짐승 털을 덧댄 가죽부츠를 신었음에도 한기가 들어왔지만 그의 마른 다리는 쉬지 않았다.

앞서 가는 소녀의 걸음이 느려질라치면 그는 관성적으로 그녀의 등을 찔렀다. 위협적인 행동이었고, 실제로 수틀리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지만 사실 그녀를 죽일 결심은 어느 순간 잊혀져 있었다.

그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땋은 머리를 멍하니 보며 생각했다.

 

‘분명히 평소와는 달랐다. 찰나였지만 맛이 느껴졌어. 하지만 갑자기 어떻게?’

 

그 감각을 되새기고 있자니 왠지 언제나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입안에 아직도 미지근한 스프의 맛이 감돌아 기분이 약간 멍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입에 털어넣고 삼키는 게 아니었나, 하며 그 맛을 곱씹고 있는데 앞서가던 밀리가 우물쭈물대며 걸음을 멈추었다. 미간을 좁힌 아도니스가 다시 등을 찔러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그녀가 머뭇거리며 앞을 가리키더니 아도니스를 돌아보았다.

 

“여기선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오른쪽?”

 

그제야 갈림길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아도니스가 한걸음 다가와 밀리의 곁에 섰다. 두 길 모두 눈이 가득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나 낙엽 등이 굴러다니는 것이 사람이 오랫동안 다니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정표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는 밀리를 지나친 아도니스가 갈림길 가운데에 서 있는 가느다란 나무를 걷어찼다.

퍽.

쌓여있던 눈이 우수수 쏟아지자 나타난 것은 몹시 낡은 이정표였다. 그마저도 오른쪽은 진작에 떨어졌는지 왼쪽을 가리키는 화살표만이 달랑달랑하게 남아있었다.

 

“동굴로 가는 길은 오른쪽이긴 한데.”

 

아도니스는 선뜻 오른쪽으로 향하는 대신 팔짱을 끼고 왼쪽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잠시 노려보았다. 밀리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동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아도니스가 걸음을 뗐다.

 

“잠깐 어디 좀 들르지.”

 

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왼쪽 길로 향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오르막길이 점차 평탄해지나 싶더니, 저만치 평지가 나타났다. 산속에 웬 공터인가 싶을 법 했지만 조금만 더 걸어와 보면 그곳이 단순한 공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회색빛의 돌이 세워져 있는 그곳은, 묘지였다.


선조들의 묘지가 산에 있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도니스는 숙연한 표정을 짓고는 묘지로 걸어들어가 가장 가까운 비석에 쌓인 눈을 털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비석에 쌓인 눈을 하나하나 손수 치우기 시작했다. 밀리는 잠시 도울까 고민했지만 외부인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비석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에인스워스 가문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도니스는 그 앞에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서성거렸다. 이윽고 그의 발걸음은 성배를 노린 자들에게 아버지를 잃었다던 아론 에인스워스의 묘비 앞에 가 멈추었다.

 

“도와주세요.”

 

아도니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내뱉어놓고 보니 뭔가 조금 어색했다. 선조에게 무운을 비는 것이 아니라 꼭 떨어지는 별똥별에 소원을 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에만 갇혀있다시피 살았으니 누군가의 묘에 와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망자를 대하는 통상적인 절차와 기도가 어떤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꽃을 바쳐야 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빈손이었다.

 

“꽃을······.”

“찾아볼까요?”

“······.”

 

밀리가 재빨리 대답하자 아도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고.”

 

관성적으로 그렇게 말하며 그는 석궁을 든 쪽의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석궁을 쥔 손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졌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

 

“이쪽이려나.”

 

묘지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대공자에게 재빨리 꽃을 찾아보겠다고 말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곳은 몇십 년 동안 겨울이었던 곳. 막상 꽃을 찾겠다고 돌아서자마자 피는 꽃이 있기는 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묘지에 바치려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가급적 흰 꽃을 찾아야 할 게 아닌가. 눈으로 뒤덮인 설산에서 흰 꽃을 찾는다니.

 

‘완전히 사막에서 바늘 찾기잖아······응?’

 

흰 것은 눈, 검은 것은 나뭇가지 또는 흙. 그것이 전부인 설산에서 보일 리 없는 색이 눈에 띄었다. 선명한 붉은 색은 단숨에 밀리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가가보니 놀랍게도 꽃이었다. 밀리는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ㅡ카밀리아요?

ㅡ내 고향에서 피는 꽃이란다. 녹색 잎사귀는 윤기가 흐르고, 빨간 꽃은 눈을 맞으면서 피지. 네 빨간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와 아주 닮았어.

 

동백이었다. 

날씨 탓인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해 만개하지도 못했고 흰색도 아니었지만, 주변에 다른 꽃이 없다는 사실을 핑계 삼아 그 꽃을 가져가고 싶었다. 이름을 지어주던 날의 다정한 그 음성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톡. 언 가지는 살짝 힘을 주니 쉽게 부러졌다. 가지며 잎사귀 위에 쌓여 있던 눈이 가지가 꺾인 충격의 여파로 후드득 떨어졌다. 군데군데 끝이 붉은 꽃봉오리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어쩐지 가슴이 설렜다.

 

“꽃은. 찾았어?”

“네, 지금 가요!”

 

가지가 부러지고 잎사귀가 출렁이는 소리를 들은 대공자가 다가와 물었다. 다행히 그는 흰색이 아닌 붉은 꽃을 보고서도 별말 없이 꽃가지를 받아 들었다. 가지는 아론 에인스워스의 비석 앞에 놓였고, 대공자는 다시 경건하지만 짧고 확실하게 애원했다.

 

“도와주세요.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밀리 또한 두 손을 모아 속으로 빌었다. 성배를 목걸이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인 아론 에인스워스가 과연 두 사람을 도와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와주세요. 대공 전하를 살려주세요. 또다시 제 어깨에 목숨을 지우지 않을 수 있게요.’

 

잠시동안 그렇게 서 있던 아도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내려가지.”

“네.”

 

묘지에서 돌아서는데 동백의 빨간 꽃망울이 눈에 밟혔다. 그냥 내려가기는 조금 아쉬워 밀리는 쭈뼛거리며 대공자의 눈치를 봤다. 그가 귀찮은 투로 나를 흘겨보았다.

 

“말해.”

“저, 잠깐 꽃만 꺾어서 내려가면 안 될까요?”

“그래.”

“감사합니다!”

 

마음이 차분해진 것인지 그는 의외로 흔쾌히 기념품 챙기기를 허락해주었다. 덕분에 밀히는 다시 동백꽃 쪽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최대한 꽃봉오리가 많이 붙어있는 가지를 가져가려고 이리저리 살피는데, 갑자기 은은한 빛이 동백을 비추는 것 같았다.

 

“응?”

 

놀랍게도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뭐, 뭐야?”

 

놀라서 허둥거리다보니 동백나무 뒤에 가려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동백꽃을 꺾어가려던 소기의 목적도 잊고 밀리는 멍하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구멍······?”

 

가까이 다가가보니 새카만 틈이 있었다. 성인 남성은 몸을 잔뜩 구겨야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그 구멍으로 다가가자, 목걸이의 빛이 확연히 선명해졌다.

왠지 여기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목걸이가 날씨에 영향을 미쳤던 것부터 여기까지 인도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리는 아도니스 대공자를 불렀다.

 

“공자님! 여기 입구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역시 빛나는 목걸이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조그만 동굴 입구로 들어갔다.

 

안으로 진입하자, 목걸이는 더욱 환하게 빛이 났다. 동굴 내부가 침침해서인지, 맞는 길에 다다랐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이 드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밀리는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었다. 횃불을 든 것처럼 팔을 높이 드니 은은하게 눈앞이 밝아졌다. 가뜩이나 안쪽으로 들어올 수록 빛이 적어지고 있던 차라, 광원이 생기니 조금 더 걸음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고 생각했다.

 

“조심!”

“꺅!”

 

팔을 들고 있던 탓에 시선 높이에만 빛을 비춰보던 그녀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뒤에서 걸어오던 아도니스 대공자가 팔을 세게 붙들지 않았더라면 잘못 넘어져 크게 다칠 뻔했다.

 

“감, 사합니다······.”

“이리 내놔.”

 

여전히 밀리의 팔을 붙든 채로 아도니스는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휙 낚아챘다. 그러더니 목걸이 체인을 자신의 팔에 칭칭 감고는 가장 커다란 보석이 달린 메달 부분을 손에 쥐었다.

 

“이제 내가 앞장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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