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죽으려고 했는데 대공가에 취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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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V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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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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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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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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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MMY

“급여는 이전 급여의 두 배를 주겠네. 어떤가?”

 

조건의 좋고 나쁨을 떠나 대공이 일자리를 줄 수 있으니 말만 하라고 했던 연회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포상이었지만 지금은 입막음과 보험에 가까우니까. 사실상 선택권은 없는 것과 다름 없었다.

밀리는 얼른 대답했다.

 

“폐가 아니라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좋아. 목숨을 두 번이나 빚졌으니 제대로 갚아주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 후론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몇 없는 그녀의 짐과 살림은 대공 측에서 사람을 시켜 대공성에 새로 마련된 방으로 가져다주기로 했다.

그렇다, 방이 생긴 것이다.

여러 차례 하녀 취직을 해 봤지만 단언컨대 개별 숙소를 주는 곳은 여기가 처음이었다. 귀족 가문의 대저택이더라도 사용인들은 대부분 공동 숙소를 사용했고 집사나 하녀장 정도쯤 되어야 개별 숙소를 쓸까말까 했으니까.

방은 그녀가 그간 머무르던 손님방보다 약간 작았고, 손님방에서 썼던 탁자와 침대, 옷장과 서랍을 겸하는 작은 장 하나가 그대로 옮겨와 있는 형태였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보겠다만, 거리가 먼 건 애쓴다고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니 조금 기다려. 그동안은 불편하겠지만 이것들을 사용하면 돼.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리사는 조금 민망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사실 민망한 쪽은 밀리였다. 캐서린과 함께 살 때 사용하던 가구들은 하나같이 다 형편없이 작고 낡았기 때문이다. 그걸 북부까지 가져올 바엔 새로 사거나 있는 것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지고 오는 길에 망가져버릴게 뻔했고.

가구 뿐인가? 옷 또한 대공성에 입고 온 것이 그녀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옷이었지만 이곳에서 받은 하녀복만 못했다. 그마저도 오는 길에 넝마가 되어 버려졌고.

하지만 구태여 그런 이야기를 꺼낼 필욘 없으니 밀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 방은 봤으니, 이제 업무 정하러 갈까?”

 

그 외에 다른 곳과 이곳의 다른 점이라면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 애써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과, 어떤 일을 할지 정해져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은 하녀를 뽑는 곳에 찾아가 지원했지만(시중 드는 하녀보다는 부엌 하녀를 뽑는 곳 위주로 지원해왔었다) 이번에는 딱히 일자리가 있어서 들어온게 아니라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성에 괜히 일자리를 만든 경우였으니까. 때문에 일손도 필요 없는 곳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있게 될까 걱정했는데,

 

“그러니까 부엌, 빨래, 청소, 시중, 정리, 보조 업무 중에서 고르면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듣다보니 거의 모든 곳에서 일손이 필요한 상황 같았다. 밀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얼빠진 표정을 짓자 리사가 짓궂은 얼굴로 웃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 하나 뽑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지? 네 생각이 맞아.”

“그런데 어째서······.”

“예전엔 사람을 구하려고 해봤었대. 난 그때 어린애였어서 잘 기억 안 나지만.”

 

리사의 말에 따르면 눈보라가 그치지 않게 된 이후로 이런 춥고 척박한 곳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때문에 애초에 지원자가 없거나, 일을 하더라도 금방 그만뒀다고.

 

“신기하네요, 숙식을 제공해주는 일자리를 마다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니.”

“날씨가 궂고 위치도 안 좋아서 성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우니까. 그런 환경 탓에 기분도 우울한데 가족을 보러 가기도 쉽지 않으니 악순환인거지.”

 

그렇게 몇 년을 신참 교육만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과감히 새로운 사용인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남은 사람들끼리 성을 꾸려나간지가 벌써 10년이 넘은 모양이었다. 리사나 빌처럼 몇 안되는 젊은 사람들은 다 기존에 일하던 사용인들의 자식이나 친척이라고 했다. 듣고 있으니 아쉽기 짝이 없어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아······.”

“그래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가가 전부 들어와서 일하고 있거나 가족이 없는 사람들 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리사가 까르르 웃었다. 그러니까 밀리는 가족이 없으니 후자에 해당해서 괜찮은 모양이다. 어쩐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괜찮아. 우리끼린 같이 살면서 집안일 하다가 정들면 그게 가족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너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

 

그 무심한 듯 상냥한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서 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끄덕여버렸는지 리사가 또 까르르 웃었다.

 

“자, 그럼 다시 일 얘기로 돌아와서. 개인적으론 전에 하던 일을 이어서 하면 좋겠는데, 어떤 일을 했어?”

 

이렇게 해서 그녀의 업무가 부엌일로 정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부엌일 중에서도 재료 손질을 도맡아 했을 것이다. 밀리가 우연히 마리아의 수프 레시피에 관한 대화에서 아도니스 대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텅-

철제 쟁반이 바닥에 떨어지며 멍청한 사람의 머리통에서 울릴 법한 소리를 냈다. 그것을 떨어뜨린 리사는 차마 주울 생각도 않고 얼빠진 얼굴로 밀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다른 부엌 하녀인 에이미와 루시도 마찬가지여서 밀리 또한 마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제가 방금 말한 얘기 중에 이해가 잘 안 될 만한 얘기가 있었···던가요? 도련님께서 하녀장님의 수프를 잘 드셨다는 얘기가 다인 것 같은데···”

 

툭.

감자가 가득 든 포대를 들고 들어오던 빌 마저도 부엌 입구에 포대를 떨어뜨린 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우뚝 멈춰섰다. 밀리는 도대체 다들 어느 포인트에서 이렇게 충격을 받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고 나니 그들은 앞다투어 질문을 해 댔다.

 

“진짜?”

“언제?”

“왜?”

“자, 잠시만요. 한분씩 좀···! 그러니까, 저번에··· 대공 전하께서 의식을 잃으셔서 도련님 지시로 설산에 가시는 것을 수행했는데, 그 길에 좀 시장하신 것 같아서 하녀장님께서 제게 싸 주신 수프를 드린 게 다예요.”

“시장?”

“···도련님께서, 시장?”

“오, 여신이시여.”

 

설명을 하면 할수록 그들은 이성을 잃는 것 같았다. 급기야 리사는 루시와 에이미, 그리고 아직도 부엌 입구에 못박힌 듯 서 있는 빌까지 불러다 무어라 속닥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막고 밀리를 바라보기 바빴다. 어쩐지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까마득한 막내이자 신참은 그런 것을 티 내면 안 되는 법이기에 밀리는 그저 최대한 무해해보이는 표정을 짓느라 애를 썼다.

그런 무해함 어필이 먹힌 것인지, 어쩐지 음흉해보이는 표정으로 리사가 다가와 밀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무래도 밀리 네가 유일한 도련님 또래니까 마음이 편해지셨을지도 모르겠네.”

“네에?! 마음이 편해지셨을 거라고요?!”

 

석궁을 제 등에 겨눴는데요?

 

“그럼그럼. 우릴 봐. 너 다음으로 제일 어린게 곧 서른 다 되어가는 빌 뿐이잖아.”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도련님 식사는 네가 갖다드릴래?”

“네?”

 

이게 무슨 소리야.

 

“온지 얼마 안 됐으니 얼굴도 익힐 겸···며칠 있어봐서 알겠지만 도련님은 마주치기 어려우신 분이야. 이렇게라도 인사해둬야지.”

“제 얼굴은 이제 아시지 않을까요···?”

“우린 도련님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보셨어. 지겨우실걸.”

“아······.”

 

모든 논리를 파훼당했으니 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그는 수틀리면 날 한번에 죽여버릴 것 같았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아직도 머리 위로 화살이 스쳐지나가던 감각이 선명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보면 42인의 산적들과 반려곰 떼에게서 밀리를 구해주신 것도 도련님이잖아. 이 기회에 은혜 갚으면 되겠다.”

 

뭔가 굉장히 수치가 과장되어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그, 그러시다면, 저야 영광이죠······.”

“다행이네! 그럼 내일 조식부터 하는 거다.”

“네······.”

 

리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표정이 어쩐지 조금 묘하게 기쁜 낯이었는데, 도통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

 

그녀의 증언(?)을 적극 반영했는지, 아도니스의 아침 식사는 일전에 캐서린이 밀리에게 싸준 것과 같은 북부식 크림스프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빵이었다. 다만 양이 현저히 적었다. 성장기 소년의 식사보단 어린 아이나 환자의 식사에 가까울 정도로.

 

"정말 이만큼만 드셔도 괜찮으실까요?"

 

문득 밀리는 일전에 뒤뜰에서 나오는 것도 없는데도 계속해서 헛구역질을 하던 아도니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공을 비롯한 여러 사용인들의 증언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그의 식이에는 확실히 무언가 문제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스프 한 그릇 다 마셨다는 얘기가 그렇게나 신기했나.'

 

리사가 에이프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도련님이 이걸 다 드시면 저녁에 양파 껍질 벗기는 일 빼줄 테니까 일단 가져가 봐."

"? 네에······."

 

그렇게 의문을 가득 안은 채 밀리는 쟁반에 담긴 식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고, 실내복을 입은 아도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그의 눈빛이 조금 오래 머무르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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