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꿀 제안 (1)
무너져가는 집에서 단 하나만 챙길 수 있다면.
난 거침없이 ‘노트’를 집을 것이다.
시간을 삶이라는 스토리로 녹이고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았으며
나를 표현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글이 적혀있는 것.
* * *
소년 도민준의 나이 15살.
돈이 없어 추심꾼들에게 비는 아빠를 보고 생각했다.
못해도 돈은 벌어야겠구나.
“살려주십쇼. 다, 다음 주까지는 꼭... 아니, 내일 모레...”
“이 새끼 소설가라며. 글쟁이면 뭐라도 써야 돈이 나오는 거 아니야? 내가 글 재촉도 해야해?”
“아유. 아닙니다. 저 글 안 씁니다. 글쟁이 그만 뒀습니다...”
“글쟁이 그만두고 빚쟁이 취직했어? 왜. 하나 잘 쓰면 대박도 난다며. 아니야?”
“아뇨. 그, 그건 극소수죠.”
‘꿈’과 혼용해서 쓸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있다는 걸 슬슬 알기 시작한 때였다.
바로 ‘돈’.
이 꿈, 돈 때문에 아빠 도현철은 알코올과 도박이라는 두 가지 해악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꿈은 무한히 컸고 돈은 유한한 바닥이었다.
두 개가 대등하지 못한 생은 참사가 났다.
“글을 못 팔면 장기라도 팔 생각을 하라고. 멀쩡히 잘 두고 있지?”
“애 엄마 도망갔다매. 그년 일하는 곳까지 찾아갈까? 엉?”
추심꾼들은 돈종이를 어디 숨겨놨나 살핀다고 책장을 다 엎어뜨렸다.
넘어지는 책장 틈으로 낡은 노트가 하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 이건.”
가만히 보고만 있던 도민준이 후다닥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요. 이 노트들은 안 돼요.”
도민준이 다섯 권 정도 되어 보이는 노트를 빠르게 집어 들고 지키듯 품 안에 안았다.
추심꾼 중 하나가 피식거렸다.
“뭔 공책? 천 원짜리라도 숨겨놨나? 아들놈이 짜랑짜랑하네.”
짜랑짜랑? 처음 듣는 단어다.
메모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도민준은 참았다.
“아무튼 노트들은 안 돼요. 건들지 마세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건 애나 어른이나 비슷했다.
추심꾼 남자가 노트 하나를 도민준의 품에서 빼냈다.
흘낏 보다가... 갑자기 30초가 쑤욱 지났다.
또 그 30초는 금세 3분이 됐다.
“뭐 보냐. 애가 덜덜 떨잖냐. 찢기라도 할까 봐.”
한 명이 인상을 쓰며 노트를 휙 빼앗아 들었다.
“그게 아니라...”
“딱 보니까 냅다 찢어서 창밖으로 던질 기세더만, 뭘 아니야.”
남자에게서 노트를 빼앗은 또 다른 남자가 글을 훑다가 갸우뚱 하며 멈췄다.
뭐지? 애가 쓴 거 맞나.
노련해 보이는 글씨체도 농후한 느낌이 가득한데, 심지어 재밌다.
극적이면서 잔잔하게 가슴을 후리기도 하고 몇 문장은 심히 와닿는다.
노트를 든 남자는 본분을 잠시 잊은 듯 보였다.
집안을 망가뜨리는 작업이 잠시, 아주 잠시 멈췄다.
“네가 쓴 거야?”
노려보는 도민준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허, 재미지네.”
“시간 없다.”
“어, 어...”
눈치껏 더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아쉬움을 묻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어느 철학책 사이에 이자로 낼만큼의 돈이 숨겨져 있었다.
오늘의 술, 내일의 도박으로 탕진될 예정인 돈이었다.
“어이, 도현철. 돈 있었잖아! 똑바로 안 할래?”
“몰랐습니다. 진짜 몰랐어요.”
“뭘 몰라. 처먹고 놀라고 숨겨놨겠지. 십, 이십, 삼십... 칠십, 팔십. 맞네. 가자. 이거 아직 이자고 원금은 한참이야. 자주 보자고.”
추심꾼들은 집을 나서기 전, 아빠한테 한마디 덧붙였다.
“아들내미, 너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고만. 잘 키워봐. 나중에 성공해서 빚 갚아줄지 아나.”
* * *
아빠는 또 술을 찾았다.
“술 사와.”
“저번에 한 외상도 안 갚았는데요.”
“너 돈 없어?”
아빠한테 용돈 한번 받은 적이 없는데, 왜 묻는 걸까.
“쩌 길목 건너편 수퍼 가서 외상해 와.”
“거기는 저한테 술 안 팔던데요.”
“하... 아들놈 참 도움 안 되네.”
나도 동감했다.
하지만 날 선택한 건 아빠고, 난 아빠를 선택한 적은 없다.
도현철. 42세의 무명 작가였다.
고집 강한 성품을 드러내듯 그가 쓰던 소설의 주제는 매번 확실하고 명확했다.
혹여 누가 자기 글을 까면, 예술도 모르는 새끼가 뭘 아냐고 되려 까버렸다.
자존심이 강한 작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야 자기 정신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이유를 세상이 내 진가를 모른다고 얘기하며,
글이라는 팍팍한 방향성을 골라버린 과거의 자신을 보호하고.
아빠는 글을 하겠다는 신념을 잃고 자존심만 남아버린 형태였다.
글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글 탓을 하고 있다.
끝없는 남 탓의 굴레로 도피한 것이다.
아빠는 내가 정리해 쌓아둔 노트 5권을 빤히 주시했다.
추심꾼들을 잠시 한눈팔게 했던 그 글.
“뭔데 그러냐. 줘봐.”
읽으며 한동안 말없이 연초를 태웠다.
오늘은 무려 3명이나 내 글을 본 날이다.
아무도 읽은 적 없던 글을 갑자기 3명이나 읽은 것이다.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독자 상승 비율이라, 오늘이 뭔가 특별한 날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스읍 – 후.”
좁은 거실에 연기가 자욱하게 찼을 때, 잠잠하던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는 진동이 오는 줄도 모르다가 잠시 후에 전화를 받았다.
집중했던 건가.
전화를 건 남자는 아빠의 후배였다.
소설 동문이며 현역 시나리오 작가 박종찬.
“크흠, 어, 오랜만이네. 어어.”
대충, 보조작가가 필요한데 일해볼 생각 없냐는 거였다.
한 살 어린 동생이 보조를 권유하다니.
아빠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가 없었다.
“보조오? 푸하하. 너 아직도 글 쓰냐? 한 작당 얼마 받고? 어차피 한 작품 쓰는 데 1년은 걸리는 거 아니야? 아니지, 제대로 하려면 그 정도 잡아야지. 수정까지 하면 끝도 없겠네. 풉 - 난 글 같은 건 안 쓴다. 취직하라는 곳 몇 군데 있어서. 좋은 곳이야. 고귀한 척 글 쓰는 거 말고 진짜 고귀한 관리직이다. 훨씬 안정적이고 규칙적이고...”
휘황찬란한 거짓말로 자존심과 월 120만 원을 매몰차게 맞바꾸고는.
전화를 끊은 아빠가 중얼거렸다.
“보조를 하라고? 예전에는 내 밑에서 빌빌 기던 새끼가...”
자기 환멸을 늘 남의 환멸로 돌려야 살 수 있었던 그였다.
이를 자각하고 분풀이라도 하듯 아빠는 공책을 몇 줄 더 읽더니.
내 앞에서 노트를 박박 찢어버렸다.
아아, 깡패보다 못한 아빠였다.
“글은 쓰는 게 아냐. 성공할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우린 그 피가 없어. 아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의 혈관이 찢어져 터질 정도로 세게.
“피가 있는 놈들만 성공하는 거야. 공부해서 취업을 하든 공장에 다니든...”
난 아빠의 반복형 훈교가 끝나자마자 찢긴 노트 조각들을 바닥에서 주워 한 자 한 자 붙였다.
눈물이 새어 나왔지만 긍정 회로를 돌렸다.
또 쓰면 돼.
더 쓰면 돼.
그러면 돼...
그나저나, 한 달에 120만 원이라고 했나.
꽤 큰 돈인데.
조금씩이라도 모으면 험상궂은 남자들이 또 책장을 엎을 일도,
집 나간 엄마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없을 거다.
나는 아빠의 메일 계정에서 박종찬의 메일 주소를 찾았다.
이력서에 적을 내용은 적지만, 자기소개 정도는 기깔나게 쓸 수 있었다.
안될 거 알아도, 잡을 지푸라기를 찾아보는 거다.
[안녕하세요. 박종찬 작가님. 보조작가 지원합니다.]
적을 것은.
초졸.
성심껏 쓴 지원동기.
내가 쓴 글 몇 개를 옮겨서 넣자.
그리고 며칠 뒤, 답신이 왔다.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박종찬은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 * *
큰 마당을 가진 3층 주택.
하얀 대리석 바닥 신발장은 우리 집 화장실만 했다.
거실에는 ‘니니’라는 고양이 한 마리가 고아한 자태로 누워있고 정신을 쏙 빼놓을 영화 포스터와 드라마 스틸컷들이 크게 벽에 붙어 진한 감성까지 풍겼다.
난 박종찬의 집을 보며 크게 침을 넘겼다.
“박 작가님, 손님 오셨습니다.”
가정부가 나를 안내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박종찬은 나를 확인하고는 굳은 얼굴로 내 지원서와 글 프린트본을 들췄다.
“안녕하세요. 도민준입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드는 동안, 박종찬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글을 주시하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고,
그리고 다시 글.
다시 나, 다시 글.
어느덧 또 박종찬의 시선은 화살처럼 글자들에 쏙쏙 박혔다.
“직접 쓴 게 맞는지,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서 불렀어.”
말은 바로 편히 나왔다.
“이 글은 어떻게 쓰게 된 거니?”
지원동기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내가 첨부한 글들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나비와 결합 되어 날개가 생긴 인간의 학교 폭력 복수극. 동물 보호소를 하며 동물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의 파멸기, 재벌과 비렁뱅이의 영혼이 바뀐 도심 속 휴머니즘 드라마...
쓰게 된 배경과 의도, 의미, 핵심들을 간단하고도 길게 풀어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정체성과 같은 글들을 설명한 것은.
듣던 박종찬은 눈살이 흔들거리기도 하고 자세를 고쳐 앉기도 했으며 두 손을 깍지 꼈다 땀이 나는지 무릎에 닦고는 다시 글을 몇 번 더 훑었다.
“단편 시나리오 습작도 있던데, 작법은 어떻게 공부한 거고?”
“책 보고요.”
“여기 적혀있는 책 말고도 더 읽은 게 있니?”
“이야기의 역사, 플롯과 철학, 시나리오 작법 끝판왕, 스토리 구성론요. 집에 있어서요. 또...”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은 후.
만일 합격한다면 부모동의서 때문에 어차피 아빠가 도현철이라는 것을 들킬 것 같아 가정환경은 실토했고,
도현철의 아들이라는 소리에 박종찬은 또다시 놀랐다.
이어서 박종찬은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 하나와 영화 하나를 내게 분석해 보라고 했다.
“드라마는 휴먼 판타지, 영화는 스릴러야. 이 장르 많이 보니?”
평소에 영상물을 많이 접한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번 볼 때 이입은 기깔나게 잘했다.
난 집중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다가 순간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는지 모를, 나만의 블랙홀 같은 공간이 생성되는 듯했다.
* * *
“다 읽었어요.”
1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자세 하나 뒤척이지 않고 글을 흡수한 도민준의 입에서 성장기 아이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어땠니?”
“<강변 미술관> 드라마는 미술관에서 그림이 살아 움직이며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이 참 흥미로워요. 그런데...”
“그런데?”
아쉬운 부분을 얘기하는 자리겠지, 싶어서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 폭포수를 맞은 박종찬은 순간 현기증이 일었으나, ‘이건 적어야 해.’ 라는 직감이 확 덮쳤고 침착하게 노트북을 두들겼다.
이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타자키가 눌렸다.
“자, 잠시만. 어, 그래. 계속 말해볼래?”
타닥, 타닥, 타다다다닥-!
“두 번째 작품, 가보자.”
“네. 영화 <동네의 무법자>는 동네에 연쇄살인마가 나타났는데, 범인이 천사라는 별명을 지닌 초등학교 선생이라는 게 포인트였어요.”
모니터에 눈을 박은 박종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이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인물의 내면이 더 정신병리학적으로 납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과거 회상 씬을 수정하면 좋을 듯 한데요...”
“회상씬? 어어.”
“동물을 죽이는 걸로 희열을 느끼는 장면보다, 유별난 성격으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를 당하는 장면들이 캐릭터를 더 매력있게 만들 것 같았어요. 빌런이라고 해서 나쁜 면만 보여주면 단면적인 캐릭터가 되니까요. 그리고요...”
수정 방향성 제시까지.
화자의 나이를 잊게 하는 완벽한 피드백.
타다닥!
검은 글자로 흰 문서 바탕을 한가득 채운 박종찬이 말문을 뗐다.
“그, 그래, 여기까지. 일단 잘 짚었어. 이건 제작 들어갈 예정인데, 맞아. 그런 단점 얘기가 나와서 수정 중이었지.”
태연한 듯 보이나 박종찬의 이마에는 땀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도민준의 피드백은 전문가들이 모인 회의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내용들이었다.
“잘했어. 이런 식으로 분석을 해주면 되고 말이지... 흠. 그랬군.”
박종찬은 예상치 못한 타격을 받기도 했다.
분석해 준 것은 고마우나, 정곡을 찔려 고통도 느껴졌달까.
“좀 더 디테일하게 가보자고. 씬 수정을 한다면 어디를 어떻게 하는 게 낫겠니? 한번 얘기해볼래?”
“네. 그럼 도입부터요... 1씬에서...”
베일이 걷히고 우주가 드러나듯 뿜어져 나오는 어린 작가의 자태.
있었구나.
이런 인재가 세상에 있었어.
무명 소설가 도현철의 아들놈이 바로 이놈이라는 거다.
아빠의 글 빨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도 모자라, 아빠의 비운과 불행에서 보상받아야 할 능력치의 총량을 아들놈이 가져간 거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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