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무한회귀자 6
다시 지하실에 들어오니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역시 미궁과 같은 느낌이다.
나는 냉철하게 생각했다.
'내가 아는 미래를 바꾸면 안 돼.'
내가 죽기 전에, 이곳에서 어떻게 행동했더라?
주변을 과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미궁과 같은 느낌?"
[보기보다 감이 좋은 도전자구나.]
같은 대사를 유도했다!
다음은 어떻게 했었지? 맞다!
"힉!"
[감지 면에서는 좋지 않군. 매우.]
⋯뭔가 대사에 사족이 붙었다?
"당신이 켈리어?"
[질문은 자신을 증명한 뒤에 받지. 검을 들어라.]
나는 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이에 화답하듯 목각인형이 내 어깨와, 목과, 배를 벤 전적이 있는 낡아빠진 검을 들어 올렸다.
[2위계구나. 그러면 세 번 공격하겠다. 피하거나 막아 결과적으로 살아남거나, 혹은 내게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먹이거나. 가겠다.]
좋아! 그대로다.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목각인형의 내려치기를 알고 있음에도 엉성하게 받아냈다.
[쯧.]
목각인형의 검이 내 검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칼등에 닿았다.
이미 그 공격에 당한 적이 있었기에 미리 예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나는 검을 크게 떨쳐올려 찌르기를 빗겨낸 뒤 검을 위로 쳐올렸다.
'됐다!'
그래도 탐험가 되어 미궁에 들락날락거린 짬이 헛되지는 않았다.
눈을 빛내며 자세가 크게 흐트러진 목각인형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목각인형은 내 공격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내 검을 부드럽게 걷어내었다.
현재 내 실력으로는 어떻게 무너진 자세에서 다시 정상적인 자세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쁘지 않군. 통과다.]
통과!
"그러면 잠깐 쉴 텐데. 그동안 내가 질문해도 될까요?"
[그러지.]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대로다.
나는 이제는 사라진 시간대에서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했다.
"방금을 1단계라고 치면, 도전은 몇 단계까지 있습니까?"
목각인형이 검을 매만지며 답했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다.]
"어? 그러면 그게 대충 몇 단계까지인지?"
[다음 질문은 검을 나눈 뒤에 받지. 다섯 번 공격하겠다. 가겠다.]
"흡!"
기다려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나는 방어자세를 잡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목각인형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피하거나 방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집중하며 목각인형의 검을 바라보았다.
실패해도 다시 재도전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이 드니 긴장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정직한 공격이야!'
총 다섯 번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팔과 다리에 조그마한 자상을 허용했다.
"읏!"
[반응이 느리군. 내 공격을 외워봤자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
[묘하게 침착해. 미리 말하지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미 입은 상처가 낫는 일도 없지. 그래도 도전할 텐가?]
도전?
켈리어의 시련을 포기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통과, 아니면 죽음.
이 질문은 어쩌면 내게 불가능한 선택지를 주는 시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계속하겠습니다."
[패기는 있군. 그러면 가겠다.]
"몇 번 공격하는지 아직 안 말해주셨습니다만?"
[실전에서 그런 걸 일일이 말해주는 경우가 있나?]
목각인형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며 공격을 이어갔다.
다섯 번째 공격에 가드가 풀렸고, 되는대로 막아봤지만 열 번째 공격에 왼팔이 크게 베였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으아악!"
[반응이 역량보다 늦어. 왜 그러지?]
내가 왼팔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 목각인형이 검을 빼들었다.
[다시 가겠다.]
"잠깐!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한 번의 질문을 허락하마.]
"제 검술에서 보완할 점은 무엇이죠? 곧 죽을 놈한테 한 수 알려주시죠."
목각인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이제 죽을 건데. 그걸 알아서 뭐 하지?]
"대답만 해 주십쇼. 제가 지금이라도 당장 수정해서 적용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자 목각인형이 검을 치켜들었다.
공격을 방어하던 내 자세를 흉내내며.
[이 부분. 기억하나?]
"물론이죠. 방금 제가 취했던 자세인데."
[오른쪽 허벅지의 마나 배분이 쓸데없이 많다. 그러면 동작이 커지고, 상대방도 이를 눈치채기 쉽지.]
목각인형이 다가와 내 허벅지를 집으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네 지금 실력에 불어넣는 마나의 양은 이 정도가 좋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의외로 감이 좋군.]
목각인형은 내가 적절한 마나 배분으로 자세를 취하는 것까지 봐주고서야 검을 들었다.
[그러면 가겠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목각인형은 곧 내 검을 쳐냈고, 자비 없이 내 목을 찔렀다.
[8번 남았군.]
감흥 없이 이어지는 칼질.
하나하나의 고통이 너무나도 끔찍하다.
덜컥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나는 내 피에 익사하며 주마등을 느꼈다.
-키릭.
⋯⋯
"⋯후."
"루카스 님?"
"아닙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도전에서 두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네 번째 도전에서 두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세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열 번째 도전에서 여덟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열다섯 번째 도전에서 두 번의 가르침과 행동을 교정 받았다.
-키릭.
열여덟 번째 도전에서⋯⋯
[왜지?]
지금까지의 패턴과 다른 말에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에?"
[왜지?]
정신을 차리자 내 상태를 인지할 수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왼손의 손가락 두 개가 없었고,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시야를 가렸다.
[왜 가르침을 갈구하는 거지? 너는 이제 죽는다. 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어.]
"⋯⋯."
[포기해라. 편히 죽여주겠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
나는 잘 잡히지 않는 검을 치켜들었다.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손에 닿지 못해, 뻗을 생각도 못 해 놓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항상 포기해왔어. 처음에는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어. 하지만 뭔가에 도전하면 도전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그만두는 게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위안삼는 내가 싫었어."
내 검이 목각인형을 겨냥하자 감정이 없어 보였던 나무의 몸이 움찔했다.
그래.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 오히려 포기하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삶이 있어!"
[이해할 수 없군.]
"당신의 이해를 바라지 않아!"
내 절규에 목각인형이 검을 치켜들었다.
[너를 죽이겠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어! 영원히!"
[⋯⋯.]
분노의 감정은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몇 번의 검격 뒤로 내 목이 꿰뚫려있었다.
나는 꺼져가는 불빛 속에서 목각인형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무정물은 나를 비웃지 않았다.
역시, 개 같은 기분이다.
-키릭.
⋯⋯
무한 회귀의 굴레 속에서, 정신력이 회복됨과 동시에 깎아져가는 이 감각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얼마의 회귀가 지났을까.
[크게 문제 있는 점은 없군.]
"?"
[방어하는 자세의 문제점은 없다고 했다.]
목각인형의 30연격을 방어해낸 뒤 들을 수 있었던 말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 뺨을 쌔게 때렸다.
'내가 몇 번 회귀했지?'
53번. 정확히 53번이다.
그 말은 켈리어의 시련은 나 같은 놈은 50회 넘게 죽었다 깨어나도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는 것이 된다.
"목숨 하나로는 못할 짓이 맞았군."
[자세가 아닌 다른 질문을 받겠다.]
"⋯이 시험의 통과를 위해서는 당신의 인정을 받아야 하죠."
[그렇다.]
"어떻게 해야 당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죠?"
[방어만 해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러면 가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방어 와중에 손을 뻗어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바로 반격 받아 배를 얕게 베이고, 다시 방어 자세로 돌아왔다.
[방어는 괜찮은데, 공격이 허술하군.]
"⋯⋯공격에서의 제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망했다.
방어와 공격의 조합은 방어만 신경 쓰던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정확히 46번을 더 죽었다.
⋯⋯
[어설프군.]
⋯⋯
[어설퍼.]
⋯⋯
[내 공격을 알고 있다는 듯한 움직임이군.]
⋯⋯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
[좋은 움직임이다.]
"감사합니다."
[계속하지.]
⋯⋯
[내 시험의 정보가 알려졌나? 마치 나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된 도전자 같군.]
"⋯빨리 진행하시죠."
⋯⋯
죽음. 죽음. 죽음.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내 검이 목각인형의 목을 찌르고 있었다.
목각인형은 내 목을 내리치려는 자세를 한 채로 무너졌다.
인형의 몸 안에 깃들어있던 마나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검을 치켜올린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간 안에 흩어져 있던 마나가 일시에 한 점으로 모여들며 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로만 이루어진 사람.
십중팔구 켈리어 파르말. 본인의 인조 영혼이겠지.
"재미있었다. 다시 한 수 나누자꾸나."
"기꺼이."
나는 몸을 낮추고 켈리어에게 달려들었다.
켈리어가 내 공격을 부드럽게 막았다.
일부러 교착 상태를 만드려는 움직임.
나는 다급해하지 않고 켈리어와 호흡을 맞췄다.
"자세를 낮게, 검은 높게. 기본적인 자세지. 마나의 배분도 좋아. 스승이 궁금하군."
당신입니다만.
내 말할 수 없는 대답을 침묵으로 해석한 켈리어의 검이 공격을 이어갔다.
다섯 번의 연격을 막으며 이루어진 두 번의 공격.
켈리어의 손목 스냅이 내 검을 기가 막힌 각도로 걷어냈다.
'썩을. 아직도 수가 남아있었나.'
가슴이 활짝 열리고, 켈리어의 검이 당겨졌다가 내뻗어졌다.
이번에는 심장이 찔려서 죽는 건가?
나는 온몸에 힘을 쭉 빼고 죽음을 기다렸다.
하지만 켈리어의 검은 내 가슴의 첨단을 살짝 찔렀을 뿐이다.
응?
"무슨⋯."
[아. 이제는 죽이지 않는다. 교만에 찬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실력을 증명해 낸 동량을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아."
나는, 성공한 건가.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잠깐 쉴까.]
켈리어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깐의 침묵 뒤, 내가 진정이 된 것을 확인한 켈리어가 입을 열었다.
[미궁은 몇 층까지 개척되었나?]
"잘 모르겠는데요?"
[흠. 올해가 제국력 몇 년이지?]
"그것도 잘⋯⋯."
[상식이 부족하군.]
"죄송합니다."
[되었다. 다음 도전자에게 의문을 풀면 되지.]
나는 켈리어가 나와 검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켈리어. 당신은 왜 이곳에서 시련을 진행하는 겁니까?"
[의외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
켈리어가 잠깐 고민했다.
[내 인과율을 최대한 소모하지 않는 방향으로 답변하겠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영생을 바라는 내 아집과 교만 때문이었지. 미궁. 영혼. 인과. 이것이 내 대답의 전부다.]
"⋯⋯?"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이었다.
켈리어가 미궁에서 가져온 아티팩트로 인조 영혼을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내 사고는 여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답은 머릿속에 잘 넣어둬야겠군.'
[이제 시작하지. 내가 너에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내가 그동안 무한 회귀를 통해 100번 가까이 진행해왔던 켈리어의 개인 지도였다.
나는 그동안 많이 받아왔기에 별 감흥 없이 진행했지만 켈리어가 보기에는 그게 아닌 듯했다.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군.]
"네. 뭐."
그렇게 체감 시간 6시간 정도의 개인 지도가 이어졌다.
대검호가 1대1로 해주는 지도는 하나하나가 엄청난 경험이 되었다.
나는 당장에 이해하지 못한 가르침을 머릿속에 최대한 쑤셔 넣었다.
[이제 너에게 가장 알맞은 기술을 알려줘야 하는데.]
켈리어의 침묵이 길어졌다.
"에? 왜 말을 중간에 끊으십니까?"
[무슨 검술을 배웠지?]
"육합검법입니다만."
[육합검법?]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캘리어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줬을 때 더 이해가 빠른 모습을 보였다.
나는 쉬지 않고 내가 알고 있는 육합검법의 모든 초식을 펼쳤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어진 켈리어의 총평은 그 모든 시간을 한 점으로 압축한 듯했다.
[허접하군.]
"네?"
[원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수백 번의 변형이 있었겠어. 그 과정에서 검법의 오의가 흩어져 버렸다.]
"⋯⋯."
[초식의 대부분이 막싸움을 고려하고 있으니 말 다 했군.]
켈리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났지만 켈리어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는 어떤 보상을 원하지?]
"⋯⋯."
나는 고민했다.
이미 이곳에서만 100번 가까이는 죽었다.
이제 무환 회귀를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내 앞으로의 방침은 정해져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이 높아질수록 그 위험을 돌파했을 때 얻는 대가는 커진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을 위험 속으로 빠져들게 해야만 한다.
이러한 말을 두서없이 꺼내니, 켈리어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에게 딱 알맞은 것이 있다.]
나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숨기지 않으며 켈리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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