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먹구름
허탈한 전투가 끝이 나고 삼 만 오크를 태우는 불줄기가 밤하늘을 밝혔다. 주력은 대부분 철수했다. 그들은 철수하기 전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오크의 시체를 던져 넣은 뒤 불을 질렀다.
기름을 잔뜩 부어 넣은 불은 사흘 내내 쉬지 않고 타올랐다.
메흘린은 여유 병력을 산개해 놓아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마교는 이번 전투에서 엄청난 전투력을 보였고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삼 만 오크의 십 분의 일 수준의 병력이 열 배나 많은 세력을 단 반나절 만에 박살 낸 예는 주신 제국의 크고 작은 전투를 돌아봐도 이만한 성과를 낸 전투가 없을 정도였다.
그 전투 이후 마교에 대한 소문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쉬쉬하더라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수천을 헤아린다. 그들의 입과 귀를 모두 피해갈 수는 없다. 삼 만 오크의 토벌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약간 과장된 술꾼의 입김이 더해 마교의 힘은 단순 용병이 아닌 거대 귀족의 사설 부대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 만 오크의 괴멸 소식은 얼마 되지 않아 시몰레이크 후작에게도 보고 됐다. 시몰레이크 후작 밑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조직은 그를 위해 주야로 수많은 정보를 끌어모은다.
당연히 싸움을 직접 지켜봤던 몇몇 인커전의 생생한 목격담이 적힌 서신이 고스란히 시몰레이크 후작의 손에 들려졌다.
"썩은 이가 잠 못 자게 괴롭힌다더니 그 꼴이구나. 이놈들 어느새 날카로운 바늘이 되었어."
프로이시어도 조금은 격앙된 표정을 지었다. 늘 차분하고 침착함을 유지던 그로서는 보기 드문 표정이다.
"음. 테일리아드의 마법사는 아예 출정도 하지 않았다는군요. 저는 삼 만 오크가 괴멸당했다고 하기에 혹이나 테일리아드 마법사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나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군요. 마교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삼 만이 반나절 만에 전원 괴멸당했다고 우리 군단을 총동원해도 이런 업적을 낼 수가 없어. 주변에 떠도는 마교에 대한 소문이 과장 되었거나 헛소문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되었네. 아주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만약 이놈들이 정말 제시어스 왕자를 보호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더 커져."
시몰레이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프로이시어 몰레이그에게 전문을 보내라. 이번에는 오크 십 만이다. 십만을 보내 엠버스피어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불태워버리라 하여라.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엠버스피어를 완전히 불태워버리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오크 십 만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조금 무리한 머릿수긴 하나 후일을 생각하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인커전을 동원해 하루빨리 제시어스 왕자의 위치를 알아내거라. 그들이 왕자를 빼돌리기 전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제 밤의 자매단조차 믿을 수 없구나."
"후작님 시그발디 백작의 보고서가 도착해 있습니다."
"들어와라."
후작은 서신을 펼치고 왼손으로 턱을 괴며 내용을 읽어 나갔다.
"음, 역시 시그발디는 재간이 뛰어난 자다. 생각보다 빨리 귀족들을 규합하고 있어. 팬텀 가드너의 충신 중 한 명인 호른가를 우리 쪽으로 돌려세웠다는 보고다. 이제 팬텀 가드너를 수호하는 귀족가도 얼마 남지 않았군."
프로이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 후작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습니다. 노르딕이 다시 훈련을 재개한 모양입니다."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놈들이 오크를 자극한다 해도 몰레이그가 잘 통제하고 있고 귀찮은 놈들은 저번에 제이미가 모두 죽여 놓았지 않나? 이번에 다시 십만을 추릴 때 골치 아픈 놈들 위주로 편성하면 돼. 충분한 군량을 넣어 주었으니 놈들도 잠시 숨을 쉴 수 있겠지."
"로만 울프가 오만의 일 년 치 식량을 오크에게 먹인 것은 잘한 일입니다. 놈들의 흉포함은 극도로 치달아 더는 마법으로 붙잡아 두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성황을 속이기 위해 수년을 허비하여 계획을 수정하고 수정했다. 다 된 밥에 누가 잿가루를 뿌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 이번 참에 마교라는 용병 단체를 아예 박멸해 버려야겠어. 더불어 제시어스 왕자까지 처리하면 덤이고."
***
노르딕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의 탁자 앞에 한 장의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마교와 오크 삼만의 전투에 관한 내용이었다.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정보란 매우 소중하다.
솔라리스 군은 큰 희생을 치러 시몰레이크 후작 패거리를 축출해 냈다. 군단 하나가 와해 될 정도로 희생이 컸다. 하지만 오크 또한 계속 머릿수가 줄어들고 있다. 애초 삼십만 대군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십오만 정도만 남았다. 여기다. 크게 다치거나 식량을 위해 흩어져 있는 오크를 빼고 순수 전투 인원은 이제 이십만이라고 봐야 한다.
오크 진영이 보이는 쪽에 나가 있는 정찰병에 의하면 오크의 진형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한다. 오크가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전조의 동향이 보고 되었고 그 소문은 군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곧 오크의 전군이 돌격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집결지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두 왕자를 구하자는 제이미는 갑자기 조용해진 듯했고 각 군단장도 분위기가 이러니 진 내에 주둔하며 부하들을 다독이는 상황이다.
"노르딕 단장님 정찰병으로부터 보고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막사 밖으로 뛰쳐나간 노르딕은 급히 말을 몰고 온 한 병사로부터 괴상한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뭐라고? 오크가 반으로 분열되었고 반은 뒤로 물러난다고?"
노르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십만 중 십만이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보고다.
"뒤로 물러난다? 후퇴는 아닐 거고 그 뒤에 뭔가 있다는 이야기다. 놈들이 쓸데없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병력의 반이나 뒤로 뺀다는 것은 무언가를 완전히 초토화하려는 것인데?"
그는 조금 전에 올라온 보고서를 생각했다.
"갑자기 오크 삼만을 동원해 엠버스피어를 쳤어. 마교라는 용병 단체가 오크 삼만을 궤멸 시킨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오크가 갑자기 왜 용병 단체를 공격한 것인지 알 수가 없군. 십만? 우리도 감당하기 힘든 병력인데 십만의 오크를 동원한다고? 기껏 용병 단체 하나를 잡는데 오크를 십만이나 동원하다니 웃기는 일 처리가 아닌가?"
노르딕은 갑자기 고함을 쳤다.
"군단장들을 모두 집합시켜라. 이건 어쩌면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모른다."
***
메흘린도 이미 정보를 접한 상태였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마는 이번에는 조금 무서운 칼을 빼 들었군요. 이제 십 만이랍니다."
작전회의실에 모인 장로의 표정이 한결 무거워졌다.
"저번 삼만 전투에서 우리 쪽 손실은 겨우 삼백 명. 그것도 신병들 위주였어. 놈이 꽤 충격을 받은 거군. 십 만이라. 정면 승부는 꽤 벅찰 듯 보이는데?"
엘빈의 말에 테드버도 수긍했다.
"놈들은 긴 여정을 할 겁니다. 우리가 중간마다 습격해서 엠버스피어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머릿수를 줄여 놓는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야 할 듯싶습니다. 삼만과는 수준이 다른 병력입니다. 좋은 전술과 전략을 동원해도 머릿수를 감당하기에는 벅찹니다. 교주님께 연락해 보겠지만 돌아올 답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이번 고난도 마교의 장로들이 해결해야 할 듯싶습니다. 교주께서는 마교 장로들의 능력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삼 만은 그분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이제 본격적인 능력을 판가름할 수 있는 싸움판이 벌어졌으니···."
메흘린의 말에 끝나기 전에 엘빈은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테드버드 장로의 말에 저도 찬성합니다. 십만 오크군을 뒤흔들어 놓을 결사대를 조직합시다. 당주급들로 결사대를 만들고 지형을 이용하여 치고 빠지는 작전을 펼치면 오크를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당주들의 실력도 늘일 겸 놈들을 연습 상대 삼아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메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만이라는 숫자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엠버스피어가 다시 놈들에 의해 불타는 것을 막으려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최대한의 노력으로 머릿수를 줄여 놓는 방법뿐입니다. 모두의 의견이 그러하니 내공을 다스릴 수 있는 마교인 모두를 동원하도록 합시다."
메흘린의 말이 끝나자 애시턴이 바로 이었다.
"놈들이 우리를 노리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으니 미리 제거해 후환을 없애 놓으려는 것과 또 하나는 제시어스 왕자를 제거하려는 겁니다. 우리가 오크의 싸움으로 자리를 비우면 밤손님이 방문할 겁니다. 제시어스 왕자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마테니 장로가 없는 만큼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십 만의 대군이 나누어 움직이는 것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말이나 기타 운송 수단을 쓰지 않는 오크군이 움직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십만 대군이 먹어치우는 양도 어마어마하다. 오크는 주식이 고기인 만큼 산짐승 사냥은 필수다. 끼니때마다 사냥을 병행해야 하기에 속도는 더욱 더딜 수밖에 없고 그런 오크의 분산된 움직임은 마교의 재미있는 사냥 수단에 적합한 미끼가 될 수밖에 없는 그림이다.
***
노르딕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들어 날라오는 정보는 그런 기분을 더욱 부채질하게 했다.
어제 오크 십만이 후퇴했다. 그들의 목적지가 엠버스피어인 것은 이미 확인되었다. 그 전에 삼만 병력이 엠버스피어를 치러 갔다가 중간 지점에서 궤멸 됐다는 정보를 파악했으니 이번에도 그들이 목표는 엠버스피어일 것이다.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다. 오크의 세력은 반으로 쪼개졌고 더욱이 오크는 일선에서 몇 킬로가량 뒤로 후퇴해 버렸다. 이것은 솔라리스 정규군과 더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 것이다.
나는 잠시 물러날 테니까 날 건드릴 생각은 하지 말라는 통보와 같은 것이다. 노르딕은 이런 기회는 둘도 없는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오만의 대군은 오크 십만과는 능히 자웅을 겨뤄볼 만하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가 어쩌면 왕자를 구해낼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 계획의 핵심에 있는 사람이 요즘 전혀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시몰레이크 후작을 만나러 갔다 온 다음 날부터이다. 그가 혹시 자신의 계획을 시몰레이크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군을 지휘하는 장군으로서 볼모로 잡힌 왕자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꺼릴 것은 없다. 반란 행위도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다만 걱정하는 것은 제이미 백작이 빠지면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단장님 제이미 백작이 찾아오셨습니다."
노르딕은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가뭄에 단비처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노르딕은 뛰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 시키고 말했다.
"들어 오시라 해라."
천막을 해치고 들어오는 제이미를 기대감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자리에 앉으시오."
"소식은 들었습니까?"
"무슨 소식 말이오?"
"오크 십만이 이동하고 있다는···."
"아, 물론 그 정보는 며칠 전에 들었소."
"어떻게 보면 지금이 딱 적기 아니겠습니까?"
노르딕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한다.
"두말하면 입이 아픈 이야기지."
"그럼 슬슬 준비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럼 도와주시겠다는 말이오?"
"제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확실히 이번 기회에 오크의 머릿수도 줄이고 두 왕자까지 구해내면 시몰레이크 후작을 더 궁지에 모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음, 몇 주 전에 급히 시몰레이크 후작을 만나러 가지 않았소? 혹 그때 이야기를 하셨소?"
제이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말했습니다. 노르딕 단장과 후오란 백작이 두 왕자를 구하는데 저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는 말을 했지요."
노르딕은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최대한 자제하며 말했다.
"그래 그가 무어라고 하였소?"
"뻔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이라고 말하고는 저보고 나서지 말라고 그러더군요."
"그렇소? 그런데 제이미 백작은 왜 도우려는 것이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후작의 덕에 등용했지만, 후작이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는 인형은 아니지요. 제가 구한다면 구할 것입니다. 그럴 능력도 있고. 제가 후작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압박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갑자기 십만 오크를 엠버스피어로 보낸 것도 답답함이 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좋은 기회를 얻었지 않습니까?"
"두 왕자를 구하면 후작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 될 터인데 후환이 두렵지 않소?"
"후환? 하하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나라의 녹을 먹는 기사가 왕의 아들을 구하려 하는 일인데 어찌 후환 따위를 걱정하겠습니까?"
노르딕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그 말 정말 마음에 들었소. 제이미 백작의 결심이 그러하다면 이미 이번 계획은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노르딕은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크게 웃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