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뺀 김에 오크를 썰자.
마테니는 야생왕에게 배운 한가지 기술을 사용했다. 그것은 침묵의 언약이다. 이 기술을 알고 있는 하츠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나눠준 것을 모두 삼켜라."
마테니가 만들어낸 새끼손톱 크기의 작은 씨앗 모양 물건을 모두 입에 틀어넣고 삼켰다.
"이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제자들은 입을 여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절대 이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라."
마테니의 말이 끝나자 테츠는 엘빈을 돌아보고 말했다.
"엘빈 장로는 제자들을 이끌고 이동 준비를 해라. 이곳은 피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모두 장비를 점검해라. 이동 준비하라.
모두 이동하는 가운데 엘빈은 말을 몰며 하츠의 뒤로 바짝 붙었다.
엘빈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지만, 마교를 공격한 인물이다. 그런데 교주는 하츠를 아군으로 받아들였다. 다를 때 같으면 마교를 공격한 인물은 절대 살려 놓지 않은 교주가 별다른 용서 없이 하츠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그가 칠무신이라서 그런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츠다. 그는 칠무신이다. 세상에서 칠무신 위에 존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일 것이다. 성황 잉그람. 그 성황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칠무신 위에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칠무신은 특별한 존재들이다. 엘빈도 황당하리만큼 강한 하츠의 무력을 몸으로 겪어 보지 않았던가? 그런 칠무신이 교주에게 꽉 잡혀 꼼작도 못 하는 것이다. 누가 보면 교주가 성황 잉그람 정도 되는 모양으로 하츠가 교주에게 아주 쩔쩔맨다.
그가 칠무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 다루는 교주도 이해 불가능이고 그런 교주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하츠 또한 이해 불가능이다.
오늘 교주가 오지 않았다면 솔직히 자신들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오크에 산채로 뜯어 먹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하츠 뒤에 바로 붙은 거 보니까 왜 기습이라도 하려고?"
테츠의 말에 뜨끔한 엘빈이 살짝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저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츠 하면 누구입니까? 그런 대단한 지위를 가진 자들이 어찌 마교에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러려니 해. 언젠가는 알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직 끌어내야 할 무엇이 있거든. 그놈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도 꼼짝 않고 있어야 하거든."
"교주님의 말은 수수께끼 같습니다. 쩝."
"알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끔은 모른 척하고 넘어가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보는 시선의 높이가 다르다. 하늘을 나는 매가 보는 세상을 땅 위를 달리는 사자가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서로 보는 세상이 다르니 그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라."
"교주님의 명이니 그리 따르겠습니다."
엘빈은 하츠를 한번 흘깃 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저놈이 내게 앙심을 품은 모양인데요?"
"너 정말 스물다섯 살 맞냐?"
"후, 생긴 것이 이래도 나이는 안 속입니다. 뉘 앞이라고?"
"야, 칠무신이 마교 교주한테 쩔쩔매는 거 보면 이상하다 할 거야. 너도 좀 조심해."
"으, 어느 놈이 그런 생각을 합니까? 제가 당장···."
"넌, 생긴 것도 아이 같지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구나. 어찌 너 같은 애를 제자로 삼았을꼬?"
"뭐. 화나신다고 저희 가문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고 그 죄책감에 하나 살려낸 것이 저입니다."
"잉, 네 가문을 몰살시켰다고? 그럼 철천지원수가 아니냐?"
"사실 제 가문도 딱히 잘한 것이 없는 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건드리는 바람에···. 죽을 짓을 하긴 했죠."
"네가 아이의 모습으로 있는 것도 그 여파냐?"
"네, 저주라고 봐야 합니다. 사실 그날 저주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죽였는데 저만 살려 주셨죠."
"원수냐? 은인이냐?"
"둘 다겠죠. 뭐 어차피 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 상태로 계속 나이만 먹는 거냐?"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거참, 나중에 결혼이라도 하면 골치 아프겠구나. 아내는 나이를 먹어가는데 너는 아이처럼 지내면···."
"결혼 따위는 왜 합니까? 제 신조는 즐기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널린 것이 여자인데 하나만 데리고 살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 네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언행이군. 그래 마교에는 언제 숨어들었고?"
"두어 달 정도 됐습니다."
"너 같은 꼬마 놈을 어떻게 받아 주었을까? 신기하네."
"생긴 것은 그래도 힘은 장사니까요. 검술 한 번 보여 줬더니 바로 합격시키더군요. 출신 성분도 확실하게 위조했죠. 크크."
"그래서 태청과 매화는 다 익혔고?"
"그렇습니다. 테드버드 장로 밑의 거버트 당주에게 배웠는데 완전히 숙달했습니다. 합격도 했습니다. 이번에 엘빈 장로를 스승으로 선택하려 한다고 해서 엘빈 지원 부대에 지원했죠."
"왜? 엘빈이 마음에 들어서?"
"전혀요. 단지 엘빈 부대가 오크의 무리 중 가장 많은 선두의 오만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크가 가장 많은 쪽이었거든요."
"그래 이해가 간다. 다른 칠무신도 네 일을 다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다른 칠무신은 파견되기에는 너무 특별하잖아요. 제가 숨어들기에 가장 무난하죠. 다른 형들은 아우라가 남달라서 금방 표시가 나잖아요."
"너희들은 형제처럼 지내는구나."
"네, 일곱 형제죠. 우리 모두 테드 황태자 전하를 위해 성황께서 만드신 황태자의 그림자들이죠."
"용의주도한 네 녀석이 어찌 엘빈에 틈을 보였느냐?"
"솔직히 지원 부대 녀석들이 오크에 당하든 말든 신경을 안 쓰려고 했는데···. 마교 사람이 상하면 황태자 전하가 기분 나빠 할 거 같아서 제가 손을 좀 썼는데 엘빈 장로가 눈치가 너무 빠른 사람이라···."
"후후, 그는 유명한 도둑이라 눈썰미가 맵기는 하지."
"엑, 도둑? 심하네요. 교주님의 제자는 천하의 쓰레기 암살자와 물건을 훔치다 걸리면 손을 잘라 버리는 도둑에···. 출신 성분이 좀···."
테츠 옆에 바짝 붙어 있던 마네티가 은근히 하츠를 비꼬았다.
"그 도둑의 바늘에 찔려서 바닥을 뒹굴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등에 아직도 흙먼지가 남아 있군요."
마테니의 말에 하츠는 조금 전 고통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젠장맞을 치사하게 바느질하는 여자도 아니고 바늘을 무기로 사용하다니 기사로서 수치입니다. 기사란 자고로 검과 검을 맞대고···."
"사람을 죽이는데 검이면 어떻고 바늘이면 어떻습니까? 죽음이란 검이든 바늘이든 공평한 거지요."
마테니의 말에 하츠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최저층 암살자 놈이 기사의 도리를 논하는 자리에 끼어들다니 주제를 알아라."
테츠가 검을 들어 검 끝으로 하츠를 내리쳤다. 하츠는 그것을 보면서도 피하거나 움찔거리기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처맞고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엘빈은 더욱더 궁금함이 증폭되었다. 칠무신이 누구던가? 아무리 마교의 교주라고 해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칠무신이 테츠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방금 저 행위는 마치 왕이 옆에서 조잘거리는 시비를 혼내는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였으니. 테츠가 검을 들고 내리치는 것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고스란히 머리를 얻어맞았다? 그것도 칠무신의 한 명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마테니. 그도 이상하다. 마테니도 하츠가 칠무신인줄 알면서 전혀 놀라지 않는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교주의 행동에 웃음마저 짓지 않는가?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들 사이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지만, 감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밤길에 기동하는 마차의 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는지 모른다. 사냥감을 찾아 주변을 서성이는 오크들에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로 들리겠지. 그 소리를 듣고 오크 무리가 마차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바탕 또 움직여야겠구나. 엘빈 장로는 제자를 두 부대로 나뉘어 지원 부대의 좌측과 우측을 방어해라. 그리고 마테니 장로와 엘빈 장로 두 사람이 마차의 후미를 맡아라."
테츠는 하츠를 힐긋 보고 말했다.
"너는 나를 따라서 오고."
"네, 네 교주님."
테츠는 하츠를 데리고 마차 가장 선두로 달려나갔다.
"어이 마테니 장로.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때 마테니가 손을 뻗어와 엘빈의 입술에 대고 말했다.
"쉬이, 조심해야지. 침묵의 언약이 발동되면 나도 불감당이야."
"제길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은 거야. 마교는 어느 날부턴가 비밀투성이가 돼버렸어."
"비밀 없는 단체가 세상에 어딨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만 신경 쓰자고 우리는 뒤쪽에서 달려드는 놈만 제거하면 되니까."
"흥, 교주님 옆에 찰싹 붙어 있더니 능구렁이가 다 되었군. 치이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놈이 먼저 앞서가네. 아이고 화딱지나."
"앞서간들 무슨 소용이 있나? 교주님은 모든 제자에게 다 공평하니 내가 뭐 특별한 혜택이라도 받는 줄 아는 모양이네만 그런 거 단 하나도 없어. 솔직히 피곤만 할 뿐이지. 자네는 그래도 제자 가르치는 시간이라도 있지 않은가? 나는 마음 놓고 제자 가르칠 시간도 없다네."
"음, 그건 그렇군, 서로 장단점이 있긴 있구나."
"이제 닥치고 오크나 때려잡으세."
말머리를 세우고 앞으로 달려 나온 테츠와 하츠는 나란히 달렸다.
"이번 목적은 오크를 베는 거지?"
"네."
"그럼 목적을 달성해야지. 루옌의 성을 칠 거냐?"
"그럴 생각입니다."
"그런데 혼자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지원 부대에는 왜 따라붙었지? 괜한 일을 만들었잖아?"
"마교에 숨어들어 비밀 경호를 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마교에 적을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침 루옌성을 공략하는 부대가 엘빈뿐이라. 나름대로 생각해서 행동한 것인데···."
"흠, 그런 행동이 오히려 화를 불렀군.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고 나도 갑자기 귀찮은 것을 떠안게 되었는데 손을 좀 덜게 되었군. 우리 둘이 루옌으로 넘어가 오크 머릿수를 좀 정리 할까 싶은데?"
"저야 교주님이 옆에 있으면 더 활동하기 편하죠. 눈에 안 보이시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좋아, 그럼 지원 부대가 안전한 곳까지 빠지면 루옌으로 간다. 마침 루옌에 포탈에 남겨져 있으니까 역습하기 딱 좋지."
"포탈! 그거 혹시 네크로맨서들의 기술이 아닙니까?"
"어? 잘 알고 있네. 네크로맨서의 기술 맞아."
"세상에 그것을 어찌! 교주님께서? 성황이 아시면 까무러칠 겁니다. 그분은 워낙 네크로맨서를 싫어 하는 분이라."
"이거 어쩌지 나도 네크로맨서인데. 쩝."
"엑? 설마요?"
"온다. 저기."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것은 오크의 무리다. 야생 고양이 같은 눈을 가진 오크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뭐 저런 것들 때문에 굳이 검을 잡으실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처리합죠."
"어이 네 기술은 귀찮아. 괜히 길 위에 시체를 깔아 놓으면 마차 통행에 방해나 돼."
"그럼 놈들을 유인할까요?"
테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콜라다를 뽑아 들었다.
"검을 뺀 김에 오크나 썰어야지. 그냥 뚫고 나간다."
테츠가 힘차게 말을 달리며 달려오는 오크 무리를 향해 콜라다를 휘둘렀다. 오크는 정확히 반으로 나뉘며 길 양옆으로 튕겨 날아갔다.
"길 양쪽으로 갈라서자. 너는 왼쪽 나는 오른쪽."
"넵."
두 사람이 나란히 쭉 달리니 오크 무리는 정확히 길을 중심으로 반으로 갈라졌다. 레인 오브 데쓰 하츠의 기술은 대단했다. 정확히 오크의 심장만 노려서 공격한다. 성력의 힘이란 확실히 무섭다는 것을 테츠는 또 한 번 느꼈다.
그리고 한가지 의아심이 들었다. 이런 막강한 칠무신을 왜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인가? 순전히 개망나니 테드 황태자 한 명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수련시켰을까? 칠무신을 만든 성황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반신의 능력을 휘두르는 칠무신. 그리고 성력이라는 괴이한 힘을 쓰는 성황의 핏줄들. 신성불가침 조약의 비밀. 그 모든 끈이 뒤엉켜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이들 사이에는 성황만이 아는 모종의 비밀이 있을 것이다. 삼대 가문은 왜 신성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으며 성황은 모든 불합리한 조건만 가득 적힌 신성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느냐다.
앞서 말을 달리는 하츠의 신기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가 정말 제대로 마음먹고 검을 썼다면 만천화우에 당하기 전에 엘빈을 죽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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