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윈프리(2)
"뭐냐?"
"뭐긴 뭐예요. 저예요."
"누가 넌지 모르냐?"
레베카는 스스럼없이 테츠의 침실로 걸어 들어왔다.
"설마 자장가라도 불러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그녀의 당돌한 행동이 이어졌다. 거리낌 없이 걸치고 있는 옷을 홀딱 벗었다.
테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실소를 날렸다.
"여기가 목욕탕이냐? 왜 옷은 홀딱 벗고 난리냐?"
"왜요? 변태 성욕자라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아이의 몸은 관심 없는 모양이죠?"
"난 인간이다. 그것도 건전한 사고를 하는. 미친 지랄 떨지 말고 나가라. 좋은 말 할 때."
"이상하네요. 예전의 그 망나니라면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을 건데요. 정말 이상하죠? 그 망나니는 어디로 가고 성정이 높은 분이 갑자기 나타났을까요?"
"사람은 철이 드는 법이다. 나도 철 좀 들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위해 유익한 일이겠지. 오렌시아를 부르마. 누구와 같이 자고 싶거든 나브나 끌어 앉고 자라."
"안되죠. 전 성황님과 거래를 한걸요. 그거라는 반드시 지켜야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하, 내게 말도 안 해주고 뭔 짓을 하려는 거냐? 그 거래 내용이 무엇이지?"
그렇게 말하며 주섬주섬 걸어 들어온 레베카는 테츠의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내가 힘을 쓸까? 네가 곱게 내려갈래?"
"저도 강제로 하긴 싫어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려는 거예요."
"너 지금 네게 이상한 술수를 썼다가는 내일 나를 볼 생각을 하지 마라."
테츠는 내공을 모으고 눈을 부릅떴다.
"성황님은 브레니아스가의 핏줄이 끊어지는 것은 용납 못 하십니다."
"그거랑 지금 네 알몸이랑 무슨 상관이냐? 설마?"
"성황님은 브레니아스가의 핏줄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마녀죠. 브레니아스의 피에 섞여 있는 저주를 풀어내고 아이를 가질 수 있답니다. 성황님과의 거래 조건 중 두 번째가 손주를 만들어 바치는 것."
"미쳤구나! 네 몸이 몇 살로 보인다고 생각하냐?"
"말씀드렸잖아요. 원래는 스물일곱 살이라고 다니기 편하게 아이 몸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녀의 덩치가 조금씩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는 것처럼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한 성인의 모습으로 자라난 레베카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이것이 원래 제 모습입니다."
확실한 것은 테츠가 지금껏 황궁에서 봐온 모든 여성을 통틀어 가장 미인이다.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미녀였다. 한번 바라보는 것만으로 뇌리에 박힐 정도로 치명적인 미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나 테츠는 테드와 달리 여자에게 성적인 관심이 아예 없었다. 물론 천마 혁련광을 말한다. 중원에 있을 때 매화강설을 탐한 것은 자신을 욕보인 대가로 치욕을 안겨 주기 위해 강제로 강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성적인 관심 때문에 강간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치욕을 안겨 주기 위해 강간한 것뿐. 혁련광은 오랜 세월 중원을 떠돌며 방랑한 생활을 즐겼고 가족을 꾸리고 정착한 생활을 할 성격이 못됐다.
하루라도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체질에다가 사람과 술을 좋아했고 여기저기 끼어들어 짓궂은 짓을 하거나 천마의 위명답게 명문정파에 시비 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았다.
그러던 중 매화강설이 그 한 번의 강간으로 딸 설향을 나은 것이다. 설향은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체질과 병을 가지고 있었다. 원치 않은 아이. 매화강설은 천마의 자식이라고 설향을 버렸다.
혁련광은 그런 설향에게 아련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혁련광은 특히 여자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
레베카를 처음 본 순간 매화강설과 딸 설향이 떠올랐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난 여자에 관심 끊었다. 명령이다. 물러나라. 혼자 있고 싶으니."
"저런, 전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교주님의 명령권보다 성황님의 명령이 우선이라는 것 말이죠. 천하의 망나니가 이런 여자의 알몸을 보고도 흥분하시지 않다니 도대체 무엇이 교주님을 그렇게 만들었죠?"
그녀는 오른손을 입에 대고 훅하고 입김을 불었다.
"싫어, 싫대도···."
테츠는 갑자기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레베카를 끌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명령권의 우선순위가 있다고 했잖아요."
테츠가 눈을 떴을 때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가슴에 안겨 있었다. 홀딱 벗은 레베카였다. 그것도 벌써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기겁한 테츠는 레베카를 밀쳐 냈다. 자신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고 침대 위 흔적을 보니 어제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레베카가 또 마녀의 힘을 사용한 모양이다.
"아웅! 잘 잤다. 일어나셨어요. 교주님."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알면서 그러시네. 어제 제 위에서 열심히 헐떡대었잖아요."
그래 생각이 났다. 어제저녁 레베카를 끌어안고 광란의 밤을 보낸 기억이 확실히 살아났다. 환각에 걸린 것은 분명한데 환각이 걸린 상태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이 났다.
"이 미친 영감쟁이. 아무리 손주가 급해도 이건 아니잖아?"
"후, 망나니 아저씨 성황님이 왜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내 버려 둔 것인지 아세요? 사실 황태자님과 잠자리를 한 여자들 모두 성황님이 직접 고른 여자들이랍니다."
"하. 그 영감이?"
"중요한 것은 교주님의 방탕한 생활이 아니라 브레니아스가의 핏줄을 잇는 게 목적이었거든요."
"아니 핏줄 잇는 거는 하늘이 지정해 주는 거지. 그게 강제로 되나?"
"헛, 참. 여자를 안아야 임신이 되죠. 설마 여자도 안 안고 임신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죠?"
"그래, 영감이 내 아이를 가지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냐?"
"네, 그것도 확률은 반반이에요."
"뭐가 반반인데?"
"손녀는 패스 손자를 얻을 때까지···."
"네가 씨받이냐?"
"뭐, 성황님과의 거래니까. 아이 몇 명 낳아주는 것쯤이야."
"아니 남녀의 사랑과 순결을 너무 얕보는 게 아니냐?"
"흥, 마녀에게 그건 사치죠. 마녀의 운명을 타고난 이상 어쩔수 없는 거예요."
"넌 순혈의 마녀라며? 피의 승계로 이어지는 순혈 마녀라면서 나와 이 짓을 해도 되는 거야?"
"잠자리 함께하는 거랑 피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피는 내 것인데?"
"하긴 그렇긴 하다만은. 아니 영감은 무슨 당치도 않은 일을! 너 내게 이상한 짓 하지 말랬잖아?"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시네. 어디까지나 제게 명령권의 상위에 있는 분은 성황 님이라니까요."
"너 아이 가질 때까지 이 짓 할 거냐?"
"당연히 그럴 거예요."
"이봐, 그건 부부라도 돼야."
"어머, 어머, 순진도 하셔라. 아무나 눈에 띄면 들이대던 망나니 그분 맞나요? 고리타분하게 부부 타령은···."
"야, 그건 그렇다 치자. 꼭 그 애새끼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거냐? 누가 보면 오십 대 중년이 손주 데리고? 어, 아니구나. 나도 풀렸네."
테츠는 역용술이 풀렸고 황태자 테드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저도 비위란 게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오십 대 아저씨랑 어떻게 같이 자요. 하."
"돌아 버리겠네."
"그런데 환각에 걸렸다고 해도 오랜만에 하신 건가? 아주 신나 하셨는데요?"
"시끄러워. 누가 보면 욕먹을 짓이다. 그 애새끼 모습 안 하면 안 되냐?"
"왜요? 이거 얼마나 편한데. 어제 제 미모 보셨죠?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세상 모든 남자가 어떻게 할까요? 귀찮아요. 너무너무. 그래서 아이 모습을 하고 있으면 세상 편하다는 거예요."
"하긴 그 말도 일리는 있겠다. 네 미모는 가히 경국지색이었지. 아니 미모고 나발이고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 들켜봐. 나를 변태 교주라고 오해하기 딱 좋잖아?"
"뭐 원래 변태였잖아요? 지나다가 눈에 띄는 여자 죄다 불러 놓고 응응했으면서 그건 변태 짓이 아니에요?"
"야, 그거랑 이거는 하늘과 땅 차이지."
"어쨌든 손주 낳을 때까지만 참아 봐요."
"환장하겠군. 으. 영감이 그렇게 나오시겠다?"
"아, 도망가실 생각은 마세요. 마교 전부를 잠재워 버릴 테니까"
"너는 얼마나 자유가 그리워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버젓이 잠자리를 가지는 거냐? 그리고 내가 첫 남자지? 순결을 그렇게 날려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어머, 어머 왜 이러실까?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서? 망나니 변태로 지금까지 처녀 몇 명을 해 드셨던 분이? 첫날밤 보내놓고 던져 버린 아가씨가 몇 명이에요? 그 아가씨들도 교주님이 첫 남자인데? 가차 없이 팽개쳤잖아요. 그때 교주님이 그러셨다면서요? 나는 한번 담근 여자는 두 번 다시 담그지 않는다. 그게 신조 아니었어요?"
테츠의 인상이 오만상 구겨졌다.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모두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 자유가 그리도 그립더냐?"
"뭐, 자유만 받는 게 아니라서요."
"그럼 뭘 더 받았냐?"
"첫째 황태자비 자리 그건 내 것이라고 했어요."
"···."
"이봐, 황태자의 옆자리가 이렇게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대관식도 가져야 하고 백성에게 공표해야 하고 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지금 가셔서 그렇게 하시게요?"
"아니."
"그럼 조용히 짜져요. 후딱 애새끼나 하나 만들어 내면 끝인데 뭘 귀찮게 시리."
"아니, 그래도 이건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아."
"세상이 언제 이치대로 돌아가는 봤어요? 남자가 촌스럽게 자꾸 구시렁대요. 재미 봤으니까 이제 관심이 없다는 말?"
"그건 아니고."
"그럼 됐지 뭐래요? 이젠 부부예요. 부부. 알았죠?"
"으."
"으는 또 뭐에요?"
"야. 옷이나 좀 입어라. 민망해 죽겠네."
"어머, 그 민망한 것이 좋다고 밤새도록 위에서 헐떡댄 사람이 누군데?"
"그건 애새끼가 아니었잖아! 제기랄 옷 좀 입으라고."
테츠는 그녀의 속옷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자신도 급히 옷을 걸쳤다.
"너 이상한 기술 네게 쓰지 마라. 기분 나빠."
"제 말을 잘 들어 주신다면야 쓸 이유도 없지요."
"제길 영감이 널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육 년이에요. 육 년! 육 년 동안 집에 얼굴도 안 비치는데 걱정 안 할 부모가 있겠어요?"
"너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네. 황태자비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잖아."
"뭐, 브레니아스가의 피에 섞인 저주를 희석하는 할 수 있는 것은 저뿐이니 어쩌겠어요."
"음, 우리 가문이 자손을 못 보는 것은 피에 섞인 저주 때문인가? 그 저주는 누가 걸었지? 성력과 관계있나?"
"그렇죠. 둘 다 정답이지만 저주를 건 자는 나도 몰라요. 성력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맞아요. 다만 딱 하나만 허락하죠."
"그럼 너는 그 저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거냐?"
"네, 순혈 마녀이기 때문에 가능하죠."
"그럼 정말 나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거냐?"
"네, 그렇다니까요. 성황과의 거래였으니까요."
"후, 영감이 죽을 때가 다 되어가나? 그렇게까지 손주가 보고 싶었나?"
"호호, 브레니아스가의 피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성력을 가지면 몇백 살까지는 기본으로 가요."
"엑? 설마? 그러면 왜 난 할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그건 저도 몰라요. 브레니아스가의 비밀은 오직 저희 어머니 엘자임만 알고 있어요. 물론 성황님도 아시고 계시지만."
***
세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테츠가 황태자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메흘린과 마테니 외에 두 명 더 있다. 바로 세렌 라메이트와 아리스토틀이다. 마교에서 이 네 명이 테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너 인마! 오해하지마! 그게 아니란 말이다."
테츠는 장로 모두를 집합시켰고 오해가 생기기 전에 레베카의 일을 매듭지으려 했다. 괜한 오해가 쌓이면 교주의 위신에 큰 문제가 된다. 아동 성도착증 변태라고 낙인찍히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러니까 내가 오십 대 중년인으로 변장했잖아? 레베카는 그것과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는 거란 말이다. 그녀는 마녀니까 그럴 수 있는 거고···."
테드버드가 유심히 레베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반마르스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고 이미 부부가 되기로 양가 합의도 끝낸 사이라는 겁니까?"
"그래, 그렇다니까. 이봐 레베카, 네 본모습을 보여서 내 말에 진실을 더 해줬으면 해."
"싫어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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