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엇을 위해?
갑자기 주변에 짙은 조용함이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 죽었으며 바람에 이따금 날리는 눈발 소리뿐이었다.
엘빈은 눈 위를 누르는 뽀드득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을 잡아냈다. 엘빈의 고개가 서쪽으로 돌아갔다.
"누가 접근한다."
눈 위를 빠르게 움직이며 나는 소리. 눈의 두께는 4m 정도고 눈 신이 없으면 움직이기 힘든 상태다.
"교주님을 보호해라."
메흘린의 외침에 장로들은 테츠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이거 설마설마했더니 진짜 오는데? 어디서 오는 거지?"
"쉿, 조용해 아직 실체를 보지 못했으니 마족일 수 있고 그냥 들짐승일 수도 있어."
테드버드의 말에 엘빈은 코웃음을 쳤다.
"이런 곳에 무슨 들짐승이야. 교주님이 메테오를 사용하여 천지를 진동시켰는데 들짐승이라면 놀라 도망가야 정상이지. 저놈은 이쪽으로 오고 있구먼. 글고 움직임이 이렇게 빠른데 무슨 들짐승 타령이야?"
엘빈의 말은 정확했다. 다가오는 놈은 보통 빠르기가 아니었다. 거의 눈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모두 숨죽여 놈의 기척을 쫓는데 테츠가 천마비행으로 달려나가 눈 위로 뛰어올랐다.
"앗! 모두 교주님을 보호하라."
메흘린은 깜짝 놀라 외쳤다.
"저런"
메흘린이 외치기도 전에 뛰쳐나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테니다. 그는 테츠의 뒤를 잽싸게 뒤쫓았다.
테드버드와 나머지 장로들도 날아올랐다.
테츠는 다가오는 놈이 궁금해 도저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직접 마중 나가기로 한 것.
날아다니는 것은 보았지만 땅 위를 움직이는 놈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내공을 사용하여 눈밭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날렵하게 날았다. 당연한 이야기인가? 그 뒤를 마테니가 바짝 뒤쫓았다.
"보인다. 엇?"
하얀색 눈 밭 위를 미끄러져 오는 것은 기다란 놈이다.
"뭐냐 저건?"
테츠는 희한한 생물체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마테니는 재빨리 테츠 앞을 막아섰다.
"이봐 마테니 안보이잖아."
"네, 넵."
마테니는 다급히 무릎을 접고 허리를 숙였다.
"저거 뱀이냐?"
"뱀이긴 한데 상체는 인간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아니지 대가리가 완전 괴물인데. 도마뱀인가? 뭐 저딴 게 다 있어?"
머리통은 도마뱀, 상체는 인간 배꼽 아래부터 꼬리까지 거대한 뱀이다.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인간형 상체는 양팔이 있으며 심지어 옷 같은 천 쪼가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양팔로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는데 날이 세 개 달린 삼지창이었다.
다른 장로들도 얼이 빠진 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세상 살다 살다 처음 보는 생명체라 모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마족이겠죠?"
"당연하지, 세상 어떤 생명체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당연히 마족이겠지."
엘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것들 도대체 어디서 기어 나오는 거야?"
테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저놈 좋은 뜻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마족은 말이 통하나? 누가 저놈과 의사소통 해 볼 사람?"
당연히 아무도 없다.
"저번에 하늘을 나는 놈도 비명 같은 소리만 질렀지 않습니까? 저놈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도마뱀 주둥이는 말을 할 구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테니의 말에 테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도 때려잡자. 모두 조심해 저번 놈은 이상한 빛줄기를 쏘았는데 잘못 맞으면 죽을지도 몰라."
"네? 그런 이야기는 미리 해 주셔야죠. 모두 교주님을 보호하고 섣부른 만용은 부리지 마라."
테드버드는 메흘린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여기서 가장 강한 사람은 테츠다. 약한 사람을 보고 강한 자를 자꾸 보호하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처 없이 저놈을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이 테츠인데 메흘린은 지나칠 정도로 교주를 챙기려 한다. 마테니도 그렇고 제가 뭔데 교주 앞을 막아서고 방어 자세를 취하느냐는 말이다.
테츠가 수십 배는 더 강한데? 왜 저런 의미 없는 짓을 할까? 테츠에 잘 보이고 싶어서? 테드버드는 두 사람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적이면 선공 필살이지."
테츠는 메테오의 낙하속도를 계산해 기어오는 마족을 향해 정확히 떨어뜨렸다. 쉭쉭 소리를 내며 접근하던 마족은 메테오의 마력을 느꼈는지 갑자기 멈춰서 고개를 하늘 위로 젖혔다.
"어래? 저놈"
마족은 양손에 쥐고 있던 삼지창을 바로 세우더니 떨어지는 메테오를 향해 창을 번쩍 치켜 올렸다. 그러자 삼지창에서 작은 번갯불이 몇 번 반짝반짝하더니 갑자기 우레와 같은 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번개 줄기가 떨어져 아니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따르륵
번개 줄기는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메테오와 정면으로 충돌했고 공중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리며 메테오의 운석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수많은 파편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우왓!"
"모두 조심해, 저놈 마법을 쓴다."
-핑
루안의 은신전이 바람을 가르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루안의 저격 솜씨는 테츠도 인정한 부분이다. 무공을 익히기 전에도 눈에 띌 정도로 활 솜씨를 보여 주더니 내공을 익힌 이후로는 그 정교함이 몰라보게 나아져서 그 누구도 활에 대해서는 루안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루 천 번 이상 활을 쏘지 않으면 식사도 마다할 정도로 매일매일 활만 수만 번씩 쏴댔다.
테일리아드의 마법사들이 루안의 소문을 듣고 도전했다가 모조리 패배한 사실이 있는 만큼 마법사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가 바로 루안이다.
루안이 쏘아 보낸 은신전은 정말 두려울 정도로 공포 그 자체다. 화살이 발사되면 화살 깃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곡선으로 날아가지만 은신전은 오롯이 내공의 힘으로 화살을 일직선으로 밀어낸다.
상대가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화살이 날아오는 것조차 감지할 수 없는 게 은신전이다. 루안의 은신전이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그와 대결해 본 장로들은 모두 알고 있다.
루안이 나쁜 마음을 품고 불의에 급습을 가한다면 테츠 이외에 루안의 은신전을 피할 수 있는 장로는 아무도 없다. 엘빈이 항상 루안의 은신전 만큼은 사기라고 툴툴거리는 이유다.
단검을 이용해 은신전을 펼칠 수도 있는 만큼 엘빈과 마테니도 은신전을 배웠다. 그러나 단검은 화살만큼의 파괴력을 가지지는 못한다.
-쿠엑
은신전을 맞은 놈이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세웠는데 대가리 정 중앙에 화살이 박혔다. 하지만 마족은 머리에 박힌 화살을 바로 뽑아냈다.
"저런 큰 상처를 주지는 못했구나."
겨우 화살촉 부분만 박힐 정도였다. 2성 내공이 담긴 아름드리 거목도 관통하는 괴력이 담긴 화살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테츠가 고함치며 마테니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날았다. 다른 장로들도 기겁하며 뿔뿔이 날아올랐다.
-번쩍
눈앞으로 시퍼런 섬광이 번쩍이며 푸른 번개 줄기가 모두 모여있던 곳에 떨어지며 눈덩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루안은 뒤로 물러나며 화살통에서 강철 화살 하나를 꺼냈다. 화살대까지 모조리 강철로 제작한 특수 화살이다. 오직 관통력 하나에 모든 역량을 쏟기 위해 만든 화살로 화살촉도 송곳처럼 뾰족했다.
화살촉 또한 수많은 담금질을 통해 무쇠보다 단단하게 제련한 특수한 재질이었다.
-핑
다시 한번 은신전의 화살이 공기를 갈랐고 마족의 왼쪽 눈알을 뚫고 깊숙이 박혔다.
-쿠에에엑
이번에는 확실하게 제대로 박혔다.
"루안을 데려오는 게 정답이었네. 하늘 나는 놈을 대비했는데 이래서 마법을 쓰는 놈에게는 궁수가 사신이구나."
테츠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에게 뛰어갔다. 마테니도 잽싸게 단검에 내공을 싣고 은진전으로 던졌다.
소리도 없는 공포의 기술 은신전.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어디서 날아오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워낙 위험한 기술이기에 아직 제자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은 장로들만의 고급 기술이다.
-팍
거창한 소리가 났긴 했지만, 마족의 두꺼운 가죽을 뚫지는 못했다. 단검 끝이 겨우 들어 갔을 뿐 마족이 몸부림치자 단검은 튕겨 나가 버렸다.
"역시 맷집 하나는 끝장나는구나."
테츠는 달리며 파이어 볼을 던졌다. 아크 위자드의 무서움은 마법 지팡이나 완드가 없어도 자유자재로 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마법사들은 필수적으로 지팡이를 든다. 지팡이는 여러 가지 속성이 부여 되는데 마법의 마나량을 늘이거나 파괴력을 증가하거나 자신이 연마하는 원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역량의 맞는 지팡이는 마법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같은 것이다.
아크 위자드 등급인 테츠는 지팡이 없이도 5대 원소 마법을 무한으로 펼칠 수 있다.
-쾅
파이어볼을 정통으로 맞은 뱀은 똬리를 틀며 상체를 보호했다. 놈은 왼눈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깊은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냈다.
"모두 손에든 창을 조심해요. 저것으로 마법을 펼치는 모양이니."
메흘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삼지창은 정확히 루안을 겨눴고 작은 번개가 빠지직거리며 일기 시작했다.
"어딜!"
테츠는 이미 예측하였고 하늘 위에서는 메테오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피해!"
테츠의 한 마디에 다들 뒤로 몸을 날렸다.
-번쩍, 쾅
삼지창에서 푸른 번개가 번쩍이는 동시에 메테오가 떨어져 내렸다. 놈은 루안에 의해 상처를 입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에 메테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검은 연기와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지면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거렸다.
"끔찍한 위력이군, 이거 마법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는걸?"
엘빈이 두려움 섞인 외침을 토하자 메흘린이 차분히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교주님이 지나치게 강할 뿐이지 일반 마법사의 메테오는 이 정도 위력이 아닙니다. 그리고 천마비행으로 충분히 사거리 밖으로 피할 수 있는데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 교주님이 지나치게 강할 뿐이지. 괜히 쫄았잖아."
연기가 가라앉자 움푹 팬 구덩이 안에 걸레짝이 돼버린 마족이 축 늘어져 있었다. 장로들이 접근하자 메흘린이 다시 한번 경각심 조로 말했다.
"마족은 사악한 자들입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마테니가 제일 먼저 뛰어들었다. 자신이 나서 빨리 확인하지 않으면 참을성 없는 테츠가 먼저 뛰어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험보다는 테츠에 위해가 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휴, 이러다 제명에 못 죽겠다."
마테니는 투덜거리며 잽싸게 날아내려 마족 주변에 널브러진 창을 걷어차 밖으로 날렸다. 경공에서는 가장 느린 알프레드가 뒤따라 오다가 날아오는 삼지창을 잡아챘다.
마테니는 놈을 살폈으나 확실히 거대한 메테오에 정통으로 직격당했으니 아무리 마족이라 무적의 맷집을 가지고 있더라도 차원이 다른 공격에는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저번 마족도 메테오에 반죽이 되더니 이번 마족도 메테오 한 방에 떡이 되어 있었다. 마테니는 손을 흔들어 놈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알렸다.
"신기하네! 저 뱀 몸뚱이는 진짜냐? 붙인 거 아니지?"
"암놈이냐? 수놈이냐? 구분되나?"
"윽, 더러워요."
루안이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짓자 엘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번 놈은 루안 덕분에 쉽게 잡았다. 골치 아픈데? 한 놈한테 장로 전부가 애를 먹었어. 루안이 없었다면 꽤 고생했을 거야."
메흘린도 엘빈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정말 이런 놈이 더 있다면? 만약 떼로 공격해 온다면 승부를 자신할 수 없습니다."
"마테니 이놈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하자."
메흘린은 테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교주님 제 생각은 이만 철수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놈들의 존재가 확실하다는 증거만으로 충분합니다. 더는 무리를 하지 않는 편이···."
테드버드가 앞으로 나섰다.
"메흘린 군사는 교주님을 너무 편애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가장 강한 분이시고 거의 무적의 힘을 가지신 분인데 마치 집 밖에 나간 어린아이 걱정하듯 걱정하는 게 너무 티가 날 정도입니다. 물론 마교에서 교주님의 위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 과한 것이 아닙니까?"
테드버드의 말에 순간 메흘린의 눈빛에 노한 기운이 담아지기에 테드버드는 더욱 의구심이 증폭되었다.
"그럼 다 같이 조심스럽게 추적하자.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중요하니 여의치 않을 때는 언제든 포탈로 귀가 할 수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잖아?"
테츠가 앞으로 나서며 마족이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메흘린은 테드버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테드버드 장로는 알프레드 장로와 함께 마족의 시체를 수습하고 뒤따라 오세요."
"앗, 내게 벌을 주는 겁니까? 무엇을 잘못했다고?"
"흥, 나중에 알게 되면 목을 몇 개 내놓아도 모자랄 겁니다."
"잉, 그게 무슨 소리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내 명령이나 이행하시오."
메흘린은 차가운 시선으로 테드버드를 한번 쏘아 보더니 테츠를 따라가 버렸다.
"어이 알프레드 내가 뭐 크게 잘못한 것이 있나? 군사가 쌀쌀맞네."
"글쎄요. 어서 이놈이나 싸맵시다."
"우악, 구린내. 비린내 이런 제기랄."
그러나 금세 하늘이 어두워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마스터 이러면 흔적이 다 묻히겠는데요?"
"하 참, 하필 이럴 때 폭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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