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람(1)
세렌은 그 날밤 이후로 귀찮은 꼬리를 줄줄이 달고 다니게 되었다. 트리스탄의 말대로 세렌은 오크를 피해 당장 그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제럴드와 일행은 본의 아니게 자신을 따라붙은 상태다.
처음에는 경공을 써서 떼어 놓으려 하다 제시어스 왕자를 구한답시고 엉뚱한 행동을 할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대부분 인커전의 교육을 받았는지 주변 환경을 읽는 능력도 좋았다.
언제 오크가 지났고 이 정도 속도면 어느 거리 만큼 갔을 거라는 등 특히 제럴드의 동료 중 로이드는 인커전 능력이 상당했다. 세렌은 이들과 동행하며 잔버크 지역을 돌아다녔다.
이들은 엠버스피어로 들어가는 대신 세렌을 따르기로 했다. 그들이 그런 결론을 낸 이유는 알 수 없다. 세렌의 무위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렌의 말대로 불가능한 임무에 염증을 느꼈을 수도 있고 또 임무를 완수하지 않고 복귀를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부득불 세렌을 따르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
아침에 일어난 제이미는 따뜻한 세숫물에 손을 담그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요즘 날씨가 급속도로 추워져 가고 있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면 전투는 더욱더 힘들 것이고 땅이 녹는 내년 봄이 되어서야 다시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오크보다 솔라리스 군의 겨울나기는 빠르게 진행됐다. 경비도 소홀해지고 모든 병력이 겨울나기에 매달렸다. 천막을 덧대고 난로를 설치하고 천막마다 땔감을 가득 쌓아 두고 보급품이 얼지 않도록 지하 토굴을 파고 저장고를 만들었다.
제이미는 세면을 끝내고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왔다.
제이미는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네. 오늘은 훈련이 없을 텐데? 기마대 움직이는 소리 같은데?"
밖을 내려다보려 했으나 차가운 바람을 맞기 싫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 막사를 젖히고 경직된 얼굴의 조안이 뛰쳐 들어왔다.
"오크의 습격입니다. 대규모 습격입니다. 지금 최전방의 1군단이 박살 나고 있습니다. 2군단과 3군단이 급히 병력을 출동시켰습니다. 저희도 움직여야 합니다."
제이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니 예고도 없이 어떻게 오크가 선수를 친다는 말이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백작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가, 갑옷을 준비하라. 조안 너는 가서 기마대를 꾸려라."
"알겠습니다. 즉시 출병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하더니 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 갑자기 조용하던 오크가 돌연 쳐들어 왔다니. 거기다 예고에 없는 급습이라 1군단이 사정없이 당하는 모양이다.
제이미는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나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시종들이 달라붙어 갑옷을 입혀 주었지만 떨림은 쉽게 멎지 않았다.
제이미의 5군단은 가장 뒤쪽에 있던 관계로 오크와 직접적인 접촉은 일어 나지 않았지만, 선두의 1군단은 십만의 오크 군단에게 직격당한 모양이다. 물론 적지 근처에 나가 있던 정찰병이 적의 습격을 알려 왔지만 1군단이 미쳐 대비를 마치기 전에 오크의 선봉이 들이닥쳤다.
급히 대응에 나섰지만, 빠르게 밀리기 시작했다. 훈련은 완전히 중지되었고, 겨울 준비를 하느라 병력은 분산되었고, 땔감을 하러 산에 올라간 기사들도 복귀하지 않았고 난제였다.
그런 반면 오크의 대군은 한꺼번에 십만 명이 들이닥친 상태였다. 베고 또 베어도 오크들은 무섭게 들이닥쳤다. 노르딕 단장이 머물던 사령부도 오크의 발아래 완전히 무너져 짓밟혔고 1군단은 급속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방패병은 방어진을 구성해라. 2군단과 3군단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라."
그때 부관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우리를 지원하러 오던 2군단이 오크의 주력 부대에게 습격당해 난전 상황입니다. 3군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놈들 계획적입니다."
노르딕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졌다.
"후퇴의 나팔을 불어라. 차라리 후퇴해서 2군단과 3군단과 합류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1군단은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후퇴의 나팔을 불필요도 없이 저절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제이미의 5군단은 모두 겨울 준비에 동원되어 있던 탓에 장비와 무기류를 챙기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오크의 대규모 공세는 전혀 조짐이 없었다. 적진 깊숙이 정찰을 나가 있던 경계병 역시 당일 쳐 내려올 때까지 이렇다할 오크의 움직임은 전혀 읽어 내지 못했다.
천둥같이 고함을 치며 쏟아져 내려올 때야 비로소 문제가 생긴 거란 걸 알아차렸을 정도였다. 오크는 거센 해일같이 들이닥쳤다.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진정한 오크의 본성이 완연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전혀 대비가 없었던 1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냈다. 원래 인간 기사 하나당 오크 두 세 명은 가뿐히 상대할 정도였고 대부분의 일선 기사는 오라 블레이드를 사용하여 전투한다. 그것은 든든한 방패병이 방어막이 되어 주어야 하고 기마대가 오크 본진을 헤집어 놓아야 가능한 전투 방식이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밀려 버리면 전술을 사용할 틈이 없다. 사상자가 걷잡을 수 없이 나오기 시작하면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오크가 노린 것은 바로 이런 혼란이다.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 재정비하려면 달려드는 오크보다 더 빨리 물러나거나 오크의 무리를 막아 낼 병력이 버티는 동안 주 병력이 후퇴하는 방법밖에 없다.
오크는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고 1군단이 있던 곳은 이미 초토화되어 버렸다. 한 달 내내 겨울나기를 준비하던 곳이 단번에 잿더미가 되어 오크의 발아래 처참히 짓밟혔다.
오크의 우두머리는 1군단을 공격하면 2군단과 3군단이 합류할 것을 예측하고 삼만의 병력씩 세 부대로 쪼개어 각기 군단 하나씩을 맡게 하여 세 군단이 합류하는 것을 막아내고 각개 격파를 할 생각이었다.
노르딕은 그 작전이 이미 오래전에 오크가 계획하고 있었던 방법이라는 것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오크를 먼저 공격하자고 늘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먼저 오크를 쳤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미의 눈치를 보느라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이미 일은 터진 상태였고 겨울이라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안일하게 부대를 편성한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1군단은 계속 후퇴를 거듭하다 후방에서 지원 온 제이미의 5군단과 합류했다. 그동안 피해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5군단의 방패병이 앞으로 나서 밀려오는 오크를 막아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미 기세를 올린 오크들은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오크의 선봉을 꺾어 놔야 해. 제이미 백작 기마대로 오크의 예봉을 박살 내주게."
제이미는 온몸에 닭살이 돋아 올랐다. 눈에 보이는 지옥과 같은 광경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이미 백작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빨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 그래. 돌격 돌격하여 적의 예봉을 꺾는다. 달려라."
조안이 크게 소리쳤다.
"오크의 선봉을 뚫는다. 기마대는 나를 따라라."
조안이 오크 무리의 한 가운데를 꿰뚫고 나아갔다. 철갑 기마대의 난입으로 잠시 오크의 전진이 무뎌졌다. 그 틈에 정신을 차린 1군단의 방패병이 5군단과 함께 오크를 막아냈다.
"궁수를 집합시켜라. 궁수부대를!"
노르딕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고함을 내질렀다. 혼돈과 비명이 어우러진 전쟁터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더 크게 벌어졌다. 조안이 이끄는 기마대가 오크를 뚫어 놓기는 했으나 명령자의 부재로 어느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지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이다. 제이미는 달려나가지 않았다.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명령권자를 잃은 5군단의 기마대는 오크 무리 속으로 기어들어 간 꼴이 되어버렸다. 기마대는 신속함이 무기다. 신속하게 적을 치고 또 빠져나와야 한다. 명령이 없으니 기마대는 오크 무리 속 가운데로 계속 달렸고 그것은 오크에게 완전히 포위된 꼴이 되었다.
그물에 걸린 고기를 주워내듯 오크들이 몸을 달려 기마대를 덮쳤다. 지옥과 같은 참혹한 학살이 시작됐다.
노르딕이 고함을 쳤다.
"제이미 백작 무엇 하는 거요? 부하들을 지휘하지 않고 다 죽일 셈이요?"
제이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빨이 딱딱 부닥치며 그의 얼굴 위로 공포가 짙게 내려앉았다. 조안 남작은 제이미 백작을 찾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오크의 새하얀 송곳니만 가득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길을 열어라. 길을. 크윽"
조안 남작은 허리를 꺾으며 마상에서 굴러떨어졌다. 누가 던진 것인지 모를 썩은 자루의 도끼 하나가 옆구리에 박혀 들었다.
엄청난 고통이 몰려 왔다. 조안 남작은 기세를 잃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말에 오르려 등자에 오른발을 얹었다. 하지만 뒤이어 달려온 오크의 검이 조안의 등에 쑤셔 박혔다.
검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말 옆구리에 박혔다. 깜짝 놀란 말이 뒷다리를 치켜들며 몸부림치자 조안의 가슴은 완전히 갈라지고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제이미의 기마대는 순식간에 오크 무리에 휩싸여 박살이 났다.
"뭐 하는 거요? 제이미 백작!"
노르딕이 고함을 쳤으나 제이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눈앞으로 오크가 한 마리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제이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검을 그냥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런 패기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냥 단순한 찌르기. 오크는 아예 피하지도 않고 맨몸으로 제이미의 검을 받아 버렸다. 그만큼 어처구니없는 검이었다.
검 끝은 오크의 가죽조차 뚫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 위세에 제이미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놀란 말이 날뛰며 달려들던 오크를 앞발로 후려쳤다.
말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제이미는 말머리를 돌리고 뒤로 달렸다.
"저, 저게 무엇하자는 것인가? 제이미 백작이 왜 저러나?"
노르딕 단장은 멍한 시선으로 도망가는 제이미를 보고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각 단장은 흩어진 부하들을 한곳으로 집결해라. 터틀 대형으로 뭉친다."
말 고삐를 잡아당겨 날뛰는 말을 겨우 진정시킨 제이미는 부대의 후미까지 달려 나온 상태였다. 자신의 5군단은 명령권자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것이 한눈에 다 보였다.
제이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명색이 5군단의 군단장이 아니던가? 군단에서 최고라는 칭송을 받았던 자신의 기마대가 몰살을 당했다. 돌격했던 조안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제이미는 말고삐를 돌려 잡고 외쳤다.
"5군단의 단장들은 부하를 모아 1군의 후미를 받쳐라. 방패병은 모두 앞서 나가고 보병대는 넘어 들어오는 오크를 막아라. 궁수들은 일군의 궁수부대에 합류하여라."
제이미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5군단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만 하지 않고 뒤에서 지휘만 하면 된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지휘만 하는 거다.'
제이미는 그렇게 외쳐놓고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사납게 날뛰는 오크를 보다 보니 덜컥 겁이 났고 저번에 돌격할 때와는 달리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때는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곁에 있어 방향을 잡아 주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부대마다 최소 삼만의 오크들이 붙었다. 부대 인원의 세 배가 넘는 오크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노르딕은 큰 방심을 했다. 아칸시티에서 보고된 바로는 시몰레이크 후작이 엠버스피어 공략에 빠져 있어 이곳 오크는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이 공격하기는 최적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봉으로 제이미 백작을 내 세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제이미를 기다리다 보니 때를 놓친 것이고 역으로 대규모 공격을 받은 것이다. 시몰레이크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아칸시티로 전갈을 보내 지원병을 청해라. 우리가 무너지면 아칸시티도 위협받게 되니 시몰레이크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봐야겠다."
노르딕은 시몰레이크 후작과 오크 간에 어느 정도 선이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으나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태고 그것을 확실히 증명해줄 증거도 없었다. 지금까지 오롯이 제이미 백작이 하는 말을 믿고 있었다.
인제 와서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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