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는 자와 몰리는 자(3)
마교는 창단 이래 가장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십 만의 오크가 잔버크에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그러한 사실은 엠버스피어 전역으로 다 퍼져 나갔고 엠버스피어의 선량한 일반 시민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겁을 집어먹고 엠버스피어를 떠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같이 싸우기를 원하는 모험가와 용병들이 연일 줄을 이어 엠버스피어로 들어왔다.
주변 도시는 모두 오크에 파괴되고 이제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은 엠버스피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황이 다스리는 주신 제국의 중앙지역인 몬도르반과 몬도르반의 수도 어반마르스에서 대규모 상인들이 끊임없이 엠버스피어를 드나들었다.
흉흉한 시대에 맞게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용병들도 모두 엠버스피어로 들어왔고 엠버스피어는 용병과 모험가들로 연일 북적였다. 이들은 십만 오크가 침공해 온다는 사실을 알지만 두려움에 떠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저번 오크 삼만을 완전히 격퇴하면서 아군 사상자는 겨우 삼백 명이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살육전을 펼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마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고 소문은 불리고 더해져서 이제는 마교가 오크를 완전히 퇴치할 단체로 부각 되었다.
팬텀 가드너의 두 왕자 사망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팬텀 가드너의 수장인 윌리엄 대공은 자리에 누워 눈도 뜨지 못하는 상태다. 나라의 정권은 시몰레이크 후작이 쥐고 흔들어 엉망진창이 상태였다.
뜻이 있고 의무감에 사로잡힌 일부 기사들은 팬텀 가드너가를 위해 검을 세웠으나 기둥은 무너졌고 유일한 희망은 행방불명된 제시어스 왕자로 모였다.
팬텀 가드너가의 충신들은 시몰레이크 후작의 압정을 견디지 못하고 아칸 시티를 탈출하거나 일부는 솔라리스 군으로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칸 시티내 팬텀 가드너의 왕궁은 이제 시몰레이크 후작이 장악한 상태다. 하지만 왕좌는 비어 있다. 아직 팬텀 가드너의 적통성을 이은 제시어스 왕자와 윌리엄 대공이 살아 있는 한 두 사람 이외는 그 누구도 왕좌에 앉을 수 없다.
만약 그 왕좌에 앉는다면 신성불가침 조약은 자동으로 파기 되고 그것은 바로 성황의 개입을 의미한다. 그것이 두려워 시몰레이크는 매일 왕좌를 바라보면서도 선 듯 앉지 못하는 이유다.
마교는 느긋이 때를 기다리며 힘을 쌓고 있었다. 이번 달에 열린 축제에는 아델리오를 비롯한 서른여덟의 당주가 탄생했다.
마교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이 날을 마교의 성스러운 탄생일로 부르며 당주의 탄생과 마교의 위업을 칭송하고 술과 고기를 즐기는 축제의 날이 되어 갔다.
전쟁 시에는 당주는 백 명씩 할당된 제자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한다. 제자들은 태청검법과 매화검법을 배우는 자들로 구성이 되며 당주는 이들 백 명을 책임지고 지휘한다.
마교는 이렇게 당주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각 당주들이 소규모의 부대를 지휘하여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했다.
그렇기에 덕망 높고 실력 좋은 당주 밑으로 자연스럽게 좋은 인재가 모여든다. 즉 백 명이라는 소규모 단체지만 당주의 개성에 따라 부대 자체마다 독특한 개성을 줬다.
예를 들어 투 핸드 소드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고 방패와 한 손 검을 좋아하는 부류는 또 그런 부류들끼리 모여 대규모 군세를 이루는 형식이다.
소규모 부대원끼리 결속력이 높아지고 전우애도 돈독해졌다. 특히 마테니와 같이 특수한 부대는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한층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로미오와 아델리오는 성녀로부터 힘을 받았고 2성의 내공을 사용하게 되니 천마잠행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테니는 아델리오에게 엄격한 조언을 했다. 스승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검을 만들라는 것이다. 부르스와 오웬, 델리안등도 태청과 매화를 끝내고 천마잠행의 수련에 들어갔다.
아델리오는 워낙 뛰어난 재능으로 단번에 내공을 얻었지만 부르스와 오웬, 델리안은 평범한 인재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물고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노력과 근성으로 매달리는 방법뿐이었다.
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달리 매우 빨리 검법이 는 이유도 그것이다. 속박된 삶에서 자유로운 수행은 세 사람을 더욱 뭉치게 했고 로미오와 아델리오를 쫓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마테니는 다른 장로처럼 여러 제자를 두지 않았다. 암살과 염탐에 최적화된 인재만 골라 선택했고 마교의 제자들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 때문에 마테니 장로 밑으로 들어오려는 제자가 아예 없었다.
대부분 모험가나 용병은 암살자를 최악의 직업으로 꼽는다. 그들은 시장에서 폭력을 일삼는 하류 도적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정당한 방법으로 대결을 통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기사도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들어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암살자는 경멸대상이다.
마교는 공식적으로 암살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버릴 수는 없다. 누군가는 더러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기사도로 무장한 정규군이 있으면 밤의 세계를 누비는 뒤처리 전문가도 있어야 균형이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적들이 보내오는 암살자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서도 우리 측에도 그와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보유해야 한다. 사람들은 마테니 장로가 늘 교주 옆에서 그를 보호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 큰 믿음을 보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암살자 출신임을 잘 알고 있다.
무공 또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 많고 상대를 현혹하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 대 일로 붙어도 절대 밀리지 않고 수많은 적 틈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만큼 훈련 강도도 높다.
동료와 의리, 기사도, 정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마테니 장로를 선택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마교의 시험에 합격한 자들은 중 마테니 장로는 스승으로 선택하는 자는 아델리오 다음으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마테니로는 조금 섭섭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자신은 전쟁터에서 일선에 서서 병력을 지휘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교주의 그림자가 되어 교주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교주가 아니라 그가 황태자인 만큼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아델리오가 자신을 지목하고 제자로 들어온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테드버드가 초 기재라고 늘 침 튀기며 말하던 인재는 마테니에는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아델리오가 자신을 지목했을 때 속으로 얼마나 놀랍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세렌 라메이트 이후 최고의 기재였던 아델리오가 자신을 지목했으니 말이다.
그를 가르쳐 본 마테니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르쳐 주기 무섭게 익혀 버리는 아델리오의 능력은 두려울 정도였다. 로미오와 붙여 놓아도 절대 밀리지 않을 듯싶었다. 아니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로미오를 능가해 버릴 것이다. 그만큼 완벽한 기재였다.
테츠는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앞으로 있을 전투를 대비해 새로운 기술을 전수했다. 그것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점혈 기술이다. 테드버드와 애시턴은 각각 금장지법과 연환지법으로 내공을 사용해 상대를 점혈하여 움직임을 봉쇄하는 기술을 익혔다.
점혈은 전쟁터에서 아주 유리한 것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릴 때 지혈용으로 쓰면 효율이 극대화되는 기술이었다. 점혈만 제대로 배워 놓으면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다. 점혈은 의외로 간단해서 이른 시간에 터득할 수 있었다.
마교는 안팎을 단단히 하며 그 위세를 더욱 높여 갔다. 그러나 무공의 배움에 늘 빠지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무공보다는 머리 쓰기를 좋아하는 메흘린이다. 그는 늘 업무 핑계를 대고 무공 익히는 것을 게을리했다.
뒤늦게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에미르슨 백작에게 추월당해 버렸고 심지어 자신의 부관인 애시턴에게 조차 무공으로 상대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테츠가 호되게 야단을 쳤지만 그때뿐이었다. 테츠도 그가 맡은 업무가 마교에서 얼마나 중대한지 잘 알기 때문에 더는 다그칠 수 없었다. 지금 메흘린이 무너지면 마교는 마비될 것이다. 그가 퍼뜨려 놓은 정보원은 모두 2성의 내공을 가진 당주급이다.
이들은 최일선에서 매일 정보를 보내온다. 지금도 당주 세 명이 십만 오크를 감시하며 놈들과 같이 움직이며 연락을 취해 온다.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오롯이 메흘린의 몫이다. 그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마교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걸 잘 알기에 테츠도 메흘린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크는 잔버크의 중간 지점에 진을 치고 군량 조달을 위해 들짐승 사냥을 시작했다. 놈들은 십만의 대군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행군을 멈추고 최소 일주일 이상 사냥에 전념할 것이다. 오크는 따로 군량이 지원되지 않기에 이렇듯 행군 중간중간 멈춰서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십만에 달하는 숫자가 먹어대는 양은 엄청나다.
약탈도 이제 한계가 있고 잔버크 지역은 오크로 인해 완전 초토화되어 더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것은 야생 들짐승을 사냥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오크는 당연히 인간 고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을 먹으면 말썽이 일어나고 인간 토벌대가 밀려 들어오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인간 고기는 외면했으나 지금은 인간과 전투 상황이고 인간 고기를 따로 가릴 필요도 없었다. 인간은 눈에 띄면 들짐승과 마찬가지로 고깃덩이일 뿐이었다.
들짐승 사냥을 하던 오크 무리가 인간 하나를 발견했다. 그 인간은 넓은 평원에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암컷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붉은 머리. 끝이 뭉텅한 이상한 검을 들고 있었다.
오크들에는 이 인간 암컷은 맛있는 간식으로 비쳤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그 여성은 아무것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평원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오크를 무심히 주시했다.
"백 명도 안 되잖아. 그렇게 떼를 써서 나왔는데 쩝."
달려오는 오크를 보고 그녀는 허리는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 끝이 직각인 양날 검이다. 검은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다. 한 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검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크의 입 냄새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그녀는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녹슨 오크의 검이 번쩍 치켜 들려졌다. 검날을 갈거나 녹이 슬지 않도록 정비하는 일례조차 없는 오크이기에 오크가 든 검은 대부분 녹이 슬어 있다. 검 날도 무디다. 그래도 기사의 갑옷 정도는 충분히 잘라낼 완력이 있다.
-사각
무언가가 끊어져서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단지 가르는 시늉만 한 것일 뿐인데 달려오는 오크 서넛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더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녀가 휘두른 일 검에 담긴 검기에 급소를 잘리고 선 자세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힘을 잃은 몸체가 뒤늦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학살의 전조를 알리는 그녀의 검은 매우 아름답운 곡선을 보이며 움직였다. 죽음의 춤사위인 것을 모르는 오크는 무조건 달려들기만 했다.
살과 뼈가 함께 잘리는 소리는 섬뜩함을 주고 오금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기어코 미소로 만들어져서 얼굴 전체를 화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만들어 냈다.
아무리 오크지만 이런 살생을 벌이면서 저런 미소를 짓다니 뭔가 이상한 여자다. 한번 맛본 살인에 눈뜬 천살궁의 힘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칠무신의 부대에 있을 때는 살인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천살궁은 위계질서란 무서운 법칙에 순응하며 눌려 있었다.
그러다 오크와의 전투를 통해 피 맛과 살의를 알게 되자 그녀의 몸속에 잠자고 있던 천살궁이 화산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며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테츠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도 그것이다. 천살궁을 제어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여 후환을 없애라.
혁련광이 중원에 있던 시절 사부인 천마로부터 천살궁을 만났을 때는 두 가지 결정을 내리라 했다. 제자로 거둬들여 완벽한 자신의 개로 만들던가 아니면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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