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용과 오크의 몰락
마테니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감히 진실이라 말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장로들 앞에서 이야기해 봤자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말할 것이다.
"이건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거다. 저런 신의 능력을 갖춘 인간이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무엇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나? 아니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인간계에 내려온 거지? 마교라는 용병 단체를 만들려고? 도대체 저분의 의중을 알 수가 없구나."
마테니는 고개를 저었다. 성력을 쓰는 테츠의 진정한 위력은 지금 처음 보았다. 그에게 오크 따위는 적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인간이 무수한 개미를 발로 밟아 죽이는 것보다 더한 상황이다. 오크의 시체는 산이 되어 쌓였고 잘린 시체에서 뿜어지는 역한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 오크는 두 명의 사신에 의해 산산이 쓰러져 내렸다.
두 사람 앞에서는 어떠한 전술도 어떠한 책략도 무의미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두 사람에게 루옌의 오크 중 삼 분의 일이 쓸려나갔다. 사신도 이런 사신이 없다.
무자비. 문득 마테니는 오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무슨 죄인가? 영혼의 숲에서 본 내용이 맞는다면 이들은 다른 차원에서 흘러들어온 오크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들의 세상에는 오크의 나라가 있고 왕도 있다. 그리고 가족이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일념에 인간과 싸울 뿐이다. 물론 오크 특유의 광포한 성격과 투쟁심은 있어도 이들은 단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다. 전혀 생소한 세상으로 소환되어 무참히 쓰러져 간다.
이들을 전쟁 도구로 사용하는 시몰레이크 후작이 찢어 죽일 놈인 것이다. 너무나 처량하게 쓰러져 간다. 테츠에게 토막 난 오크는 그 몸 마저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하츠에게 쓰러진 놈들만 자신의 몸을 가진 채로 죽을 행운을 가졌을 뿐이다.
참담하다 못해 끔찍한 살육의 한 가운데 있는 마테니는 오크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암살자며 푼돈 몇 푼만 쥐여주면 가차 없이 대상을 죽였다. 양심의 가책 따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오늘 이 처참한 광경에서는 격한 동정심이 쏟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는 오크들이 애처롭게 보였다.
하늘과 대지 두 곳에서 쏟아지는 죽음의 비는 한동안 그치지 않고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테츠는 나름대로 또 한 가지 의구심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츠도 말했다시피 성력은 그냥 쓰는 것이 아니었고 각성이라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단계란 시련의 장이라는 브레니아스 핏줄을 타고난 장자들이 필수로 거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다.
시련의 장을 거쳐야 성력이 각성되고 브레니아스 가문의 진정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시련의 장을 거치지도 않았는데 성력이 터져 나왔으며 한 번 성력을 경험하자 범상치 않은 힘이란 것을 느꼈지만 또한 테드 황태자의 성격도 함께 나오는 터에 풍신왕과의 대련 이후 단 한 번도 성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테츠 자신도 느꼈지만, 그 이후 성력뿐만 아니라 내공을 사용해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테드 황태자의 성격이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그것이 테드 황태자의 영혼이 깨어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테드 황태자의 성격이 깨어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천마 혁련광일 뿐이고 자신의 영혼은 말짱했다. 단지 성격만 까다롭게 바뀐 것일 뿐.
천마 혁련광의 소원은 단 하나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든 간에 이곳을 무림화 시키겠다는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흘러들어왔지만 천마의 목표는 뚜렷하고 확실하다. 세상을 무림화 시키고 명문정파도 만들고 마나보다 마법보다 내공이 더 뛰어 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 무공의 완성단계에 있던 천마 혁련광도 성력의 힘 앞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인간이 사용할 힘이 아니었다. 무공과 내공은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겠지만 성력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다.
인간의 힘을 훨씬 초월하는 반신의 힘임을 이번 학살로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되었다. 아무리 천마삼검이 대단하다 하나 이처럼 한꺼번에 수백의 인명을 쉬지 않고 살상 할 수는 없다.
무공 자체도 다수보다는 고수와의 일 이인 대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수라고 해봐야 수십 명 정도. 숫자가 백이 넘고 천이 넘는다면 아무리 천하제일의 고수라 해도 내공이 소진되어 쓰러지게 된다.
머릿수가 천 단위가 넘어가면 이게 무공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고민 따위 할 필요가 없다. 몸 안에서는 끊임없이 성력이 솟구쳐 나오고 그것은 자신의 제어에 따라 정확히 죽음의 비를 뿌려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포. 한 마디로 결정지어 인간이 펼칠 능력은 아니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그런 단계의 신의 영역에서만 펼칠 수 있는 힘이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테츠는 지금 원하는 만큼 성력을 풀어 놓았다.
'이 정도 머릿수를 상대로 천마삼검을 쉬지 않고 펼쳐 냈다면 내공이 소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력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강과 같다. 아무리 퍼마셔도 아무리 쏟아내도 끊어지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구나.'
테츠 본인도 성력의 힘에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았다. 순응하는 것만이 답인 것을.
'이것이 내 몸에 흐르는 브레니아스 핏줄의 힘인가?'
그때 테츠는 한가지 무공 구결이 떠올랐다. 천마들에게조차 꿈의 무공으로 불리는 검법.
아수라멸천검.
하늘에서 아수라가 강림하여 적을 멸한다는 공포의 검결. 혁련광도 그 이론만 깨우치고 있을뿐 단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했다. 아수라멸천검을 펼치려면 최소 십성 내공이 필요했다. 만약 내공이 부족한 상태에서 아수라멸천검을 펼치면 모든 기가 순간적으로 빨려 나가 주화입마에 빠져 버려 기혈이 뒤틀리고 터져 피를 토하며 절명한다.
이론상 아수라멸천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최소 12성의 내공이 필요하다. 60년을 수행해서 1성의 내공을 얻는다고 가정하면 약 720년을 수행해야 12성의 내공을 가질 수 있다.
즉 하늘이 주신 기연이 있지 않고서야 12성의 내공을 달성할 수는 절대 없다. 한창 전성기 시절 온갖 비약을 가리지 않고 먹은 혁련광은 팔성 내공을 달성했고 그것만으로 천하 무림을 제 손바닥 안에 두고 있었음에야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흡성대법으로 인해 무려 칠성의 내공을 소유한 테츠는 이 세계에서 일인으로는 무적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성력이라는 이 비균형적인 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솔라리스는 우습게 털어 버릴 정도였다. 지금 당장 아칸시티로 날아가 시몰레이크 후작을 비롯하여 아니 아칸시티 하나를 증발 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테츠는 동공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졌다. 지금 성력의 힘이라면 충분히 아수라멸천검을 펼쳐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탑의 꼭대기를 힘차게 차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내공과 함께 성력을 운용하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성력이 완전히 내공과 함께 융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
테츠가 돌연 아수라멸천검을 펼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런 부분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천마 역사상 단 한 번 펼쳐 졌다는 꿈의 초식 아수라멸천검. 그것은 3대 천마이자 광천이었던 마의 천수량에 의해 창안된 검법이며 그는 이 초식을 세상에서 처음 펼친 장본인이다.
운기가 오고 있음을 느낀 테츠는 콜라다 위로 성력이 가미된 내공으로 아수라멸천검 기수식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하츠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 보름달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다. 거대한 유성처럼 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은 마황이었다.
아수라의 현신.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좌우 네 개씩 여덟 개의 팔을 가진 손에는 기다란 검이 들려 있다. 여덟 개의 팔이 움직이며 검기를 뿌려낸다. 새하얀 성력의 검기가 뿜어지며 주변을 휘감았다.
오크는 물론 성벽의 성채 잔해가 성력의 검기에 휘말려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아수라의 바로 밑에 있던 오크는 순식간에 증발하여 버렸다. 시체도 남기지 못했다. 아수라멸천검이 떨어진 곳에는 움푹 팬 구덩이만 남긴 채 모조리 사라졌다.
하츠는 멍하니 그 장관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금제가 통하지 않는다니 황태자가 금제를 깼단 말인가? 저건 뭐냐? 죽어야 깰 수 있다는 금제를 깬 건가? 말이 안 된다. 죽어야 깨진다는 금제가 어떻게 깨졌단 말인가?"
하츠는 갑자기 멍해진 머리로 거대한 아수라를 바라봤다. 하츠의 눈에는 여덟 개의 팔을 가진 아수라가 마황으로 보였다.
"마황을 소환하신 건가? 성력의 진정한 힘이 깨어난 건가? 서, 서황께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한다."
하츠는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무린가? 아직 내공이 옅다.'
아수라멸천검으로 주변을 폐허로 만든 테츠는 떨어지는 속도를 느끼고 몸을 바로 잡았다.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금세 들어찼다. 테츠는 공중제비를 넘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었다.
'이것이 아수라멸천검'
그 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한 테츠가 내려서는 곳에는 잡풀 하나 없는 공터가 되어 있었다. 굵은 자갈과 바위투성이 황무지만 있었다.
"우, 성 한쪽이 사라졌다."
마테니는 무너진 반대편 성벽 꼭대기에 쪼그려 앉아 방금 아수라의 공격으로 사라진 성벽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빈 황무지와 같은 공간만 남아 있었다.
"말이 안 되는군.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의 범위를 벗어났어. 진정한 파괴의 신이다."
마테니는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테츠는 모조리 뽑혀 나간 내공이 들어찰 때까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성체의 반을 날려 버린 테츠이기에 이미 하츠와의 내기는 무의미해진 상태였다. 이번 공격으로 거의 이만 이상의 오크가 증발하였기 때문이다.
"이건 무공 따위가 아니다. 내가 본 것은 신의 힘일 뿐이다. 브레니아스 가문의 핏줄은 저런 능력을 가졌는가? 저들은 신이 분명하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지? 평범한 암살자인 내가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지? 이것이 내 운명이란 말인가?"
마테니는 쪼그리고 앉았던 자세를 일으키며 우뚝 섰다.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나는···. 황태자가 아닌 신을 모시고 있다."
하츠는 입술을 깨물고 남은 오크를 베어 넘겼다. 테츠는 꼼짝하지 않고 있다. 여기 남아 있는 오크 모두를 잡아봐야 자신이 이길 일은 없다. 완벽한 패배다.
"어떻게 금제를 깼지? 성황께서도 성력을 무한으로 사용하지 못하는데 어찌 황태자께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해 사라진 6년 동안 황태자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해."
테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엇을 느꼈다.
"이건? 그래 이해가 된다. 이해가 돼. 내가 왜 성력을 이처럼 자유롭게 운용이 가능한 것인지. 라마단 정수. 라마단의 정수가 성력과 융합이 되었다."
모조리 빨려 갔던 내공이 순식간에 다시 들어차기 시작한 것은 성력의 힘이 아니었다. 라마단 정수의 힘이다. 테츠도 전혀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자신의 몸에는 세 가지 힘이 담겨 있다. 성력과 내공과 라마단의 정수다.
그동안 네크로맨서의 기술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마단의 정수를 이용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아수라멸천검을 사용할 때 모든 내공이 빨려 나가자 그 빈자리로 라마단의 정수가 밀려 왔고 그것은 성력과 융합되어 무서운 속도로 활성화됐다.
몸이 이상했다.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분명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분명했으나 테츠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마비행을 펼치자 주변의 사물이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공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운용이 되었다. 라마단의 정수는 네크로맨서의 정수이기 전에 무서운 독이다.
라마단의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시전자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미치거나 돌연사하게 된다. 라마단의 정수는 일인이 완성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라마단의 정수는 스승과 제자를 통해 전수 되었고 정수는 다음 세대로 끊어지지 않고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이다.
무려 수백, 수천 년 동안 라마단의 정수는 몸과 몸을 통해 전승되어 단련됐다. 라마단의 마지막 제자이던 아잠바크는 성황과의 전쟁 때 성황의 첫 번째 황비였던 세르자비 왕녀가 만든 차원 감옥으로 추방되었다.
마지막 라마단의 정수를 품고 있던 아잠바크 앞에 운명처럼 테츠가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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