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츠?
아이손 장주는 불안한 마음이 가득 피어났다. 사방이 너무 조용하다. 원래 모험가 출신이었던 아이손은 이런 분위기를 잘 안다. 산짐승이나 산새의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은 이미 그들이 다른 것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조용할수록 그 위험이 더욱 커진다. 가장 첫 번째 마차를 몰던 아이손은 결국 고삐를 잡아 당기고 마차를 세웠다. 뒤따르던 두 대의 마차도 모두 멈춰섰다.
"말을 조용히 시켜라."
아이손은 마부석에서 내려와 길바닥에 엎드려 귀를 땅에 대었다. 그리고 조용히 복마기공의 운용법을 순차적으로 진행해나가며 정신을 집중했다.
'오른쪽! 왼쪽! 전면 모두 우리쪽으로 오고 있다.'
땅의 울림을 감지한 아이손이 외쳤다.
"우리를 향해 몰려드는 무리가 있다.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오크 뿐이다. 모두 무기를 뽑아라. 마부석에 한사람만 남기고 모두 진형을 구축해라"
마차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어이 하츠 너는 내 뒤에 붙어라."
아이손은 하츠를 불렀다.
"어떻게 하든 엘빈 장로 부대에 가는 보급품을 지켜야 한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라."
아이손은 마차 세 대를 우선 뒤로 후퇴시켰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마차에 실린 보급품이다. 엘빈 장로의 보급품을 오크에 빼앗기면 더 곤란하다.
"너희들은 최후가 왔다고 판단하면 짐칸에 실린 기름통을 부수고 불을 질러라. 놈들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마차가 뒤돌아 물러나자 그 소리는 더욱 퍼져나갔고 언덕 위로 오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언덕 아래로 뛰쳐 내려왔다.
"백여 마리 정도 된다.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머릿수다. 평소에 배운 것을 잘 떠올려라. 우리가 배운 검법은 확실한 위력을 보여 줄 거다. 힘에 겨우면 상대와 함께 합심해라. 절대 혼자 이탈하지 말고 합심해서 싸워라."
아이손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하츠를 보고 말했다.
"너는 내 뒤만 따라 다녀라. 자 이걸 가지고 있어. 혹시라도 상처를 입은 아군을 즉시 치료해."
아이손은 힐링 포션이 든 가방을 하츠에게 던졌다.
"넌 싸우지 말고 다친 아군이나 잘 보살펴."
아이손이 가장 먼저 뛰쳐나가 선두의 오크를 단번에 베어 넘겼다.
"이놈들 덩치만 있지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 놓고 싸워라."
삼십 대 백의 싸움이지만 삼십 명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쓰러지는 쪽은 오크다. 놈들은 적은 수의 인간이라고 얕잡아 보는 것도 있었고 마차에 실린 보급품에 마음이 가 있어 제대로 덤벼들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오크가 쓰러지자 사기가 오른 아이손의 부대는 맹렬한 기세로 오크를 넘기기 시작했다. 한데 동쪽 수풀에서 또 다른 오크 무리가 튀어나왔다. 그들도 멀리서 말발굽 소리를 듣고 달려온 오크들이었다.
"저놈들이 붙기 전에 이놈들부터 눕혀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엔 서쪽에서 또 다른 오크 무리가 모습을 보였다. 이놈들 역시 말발굽 소리를 듣고 달려온 거였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뒤쪽에서 오크 무리가 더 몰려나왔다.
아이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대충 훑어봐도 사오백 마리가 넘었다. 아무리 일당백의 부대라 해도 결국 지원 부대고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도 반수가 넘는다. 무엇보다 내공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후퇴한다. 후퇴한다."
마차 세 대는 이미 왔던 길을 되달렸다. 이들이 내공이 있었다면 그리고 천마행공을 수월히 펼칠 수 있다었면 오크를 떼어 내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 부대 특성상 천마행공을 배운 사람은 아니 겨우 맛보기만 본 사람은 아이손 밖에 없었다.
결국, 오크와 달리는 속도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며 포위해 오고 있는 오크를 뿌리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미 마차의 보급품을 보고 눈깔이 뒤집힌 오크는 게 침을 흘리며 괴성까지 지르며 달려들었다.
오크는 준족에다 지구력도 높다. 놈들은 보급품을 가득 실은 느린 마차는 쉽게 따라잡는다. 그런데 더 한 문제가 발생했다. 마차의 전면에서도 오크가 출몰한 것이다. 가장 깊숙이 사냥 나가 있던 무리가 말발굽 소리를 이끌려 몰려 왔다.
아이손은 마음이 급했다.
"앞의 적부터 공격한다. 마차가 통과할 길부터 확보해라."
다행히 마차 전면에 나타난 오크는 오십 마리 정도 됐다. 녀석들도 마차를 보자 게 침을 흘리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손은 마차를 지나치며 말했다.
"하츠 넌 마차에 올라 여차하면 불을 내 버려라."
하츠는 고개를 끄떡이며 가장 뒤쪽의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뒤쪽에는 거의 사오백 마리의 오크들이 미친 듯이 쫓아 오고 있었다.
아이손과 부대원은 전면에서 몰려오는 오크를 향해 덤벼들었다.
"최대한 빨리 베어라."
삼십 명이 덤벼들어 오십 마리의 오크를 무참히 베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고 엄청나게 뛰어 왔기 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공도 이제 겨우 복마기공을 배우기 시작해 몇 푼도 되지 않았다.
태청검법과 매화검법도 호흡에 밀려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깊숙한 상처를 주지 못했다. 난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다 뒤에서 추격해 오는 오크에게 덜미를 잡히면 모든 것이 끝이다.
"하츠 불을 붙여라."
아이손은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오크에 빼앗겨 버릴 바에야 차라리 불을 붙이는 것이 나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홀로 남아 오크를 막아 낼 동안 부하들을 피신시킬 생각이었다. 하츠가 타고 있던 가장 마지막 마차에서는 불길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손은 눈앞에 오크 한 마리를 베어내고 고함을 쳤다.
"하츠 불을 질러, 오크에 보급품을 빼앗기면 안 돼."
하지만 마차에서는 불길이 치솟아 오르지 않았다. 다급해진 아이손이 마차로 뛰어가려 했지만, 오크가 가로막아 놈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오크를 베어낸 아이손이 급히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쯤 따라서 오던 오크가 바짝 붙었을 터였다.
"!"
마지막 마차로 접근하던 아이손은 눈앞에 벌어진 장면에 두 눈을 부릅떴다. 마차를 추격해 오던 오크 오백 마리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이상했다.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도로와 그 주변에 엎드려 있었다.
마치 전원이 엎드려 포복하는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꼼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 죽은 것이 분명했다.
이어 도착한 부하들에게 말했다.
"가서 살펴봐 놈들이 어떻게 된 거냐?"
몇 명이 달려나가 쓰러진 오크를 살펴보더니 목을 긋는 동작을 했다.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하츠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차 뒤에 있던 하츠는 머리를 쑥 내밀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장주님의 고함을 듣고 불을 지르기 위해 기름통을 찾다가 우연히 밖을 보았는데 글쎄 갑자기 오크가 우르르 쓰러지더니 꼼짝을 하지 않더군요."
그때 오크의 시체를 살피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죽은 것이 분명하냐?"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무슨 말이지?"
"저기 쓰러진 오크의 상처가 모두 똑같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심장 부위에 +의 상처가 있더군요."
"네 맞습니다. 다른 오크도 살펴봤는데 정확히 심장에 +의 상처만 나았고 다른 곳은 멀쩡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기술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왜 우릴 구해주고 그냥 가버렸지? 하츠 너 뭘 본 것은 없냐?"
"전혀요. 전 기름통 찾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장주님 설마 한 명이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죠? 누군가 같은 기술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우리 마교에 이런 특별한 상처를 남기는 무공이 있습니까?"
"글쎄다. 무공의 종류도 많고 아직 내가 못 본 무공도 많다. 장로마다 무공의 특징이 있고 특히 교주님은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무공을 아시고 계시니···."
"혹시 교주님이 스쳐 가신 것이 아닐까요? 그런 분이 아니라면 어찌 그 짧은 시간에 오크 오백을 동시에 같은 상처로 쓰러트리겠습니까?"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를 도와준 것은 틀림없구나. 우리는 오늘 생명의 구함을 받았으니 누군지 모를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겠다."
아이손 장주는 허공에다 크게 고함을 쳤다.
"누군지 모르나 저희를 도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마교에 들려주시면 나 아이손을 찾아 주십시오."
"됐다. 서두르자. 또 오크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약속 장소에 제때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마차가 지나가기 위해 길에 널브러진 오크의 시체를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그때 작은 바람 소리가 일며 누군가 모습을 보였다.
아이손은 움찔했으나 상대는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이손은 상대를 확인하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제자 아이손이 엘빈 장로님을 뵙습니다."
엘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 급히 달려왔어.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지?"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이 오크 떼는 어떻게 죽어 널브러졌지? 자네를 습격한 것으로 아는데?"
아이손은 급히 방금 일어났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 갑자기 이놈들이 쓰러졌다고?"
엘빈은 널브러진 오크 한 마리의 가슴 섶을 풀어헤쳤다. 심장 부근에는 아주 작은 +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
엘빈은 단검을 꺼내 오크의 상처를 도려냈다. 그리고 그 상처의 깊이를 살폈다. 그리고 오크를 뒤집어 등판을 봤다. 역시 + 무늬의 상처가 등에도 나 있었다.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었군. 이 많은 오크를 한꺼번에 꿰뚫었다? 이런 기술은 직진성을 이용한 찌르기다. 베기가 아니어서 한 마리당 한 번씩 찔러야겠지? 그런데 동시다발적으로 쓰러졌다고? 누가 오크가 쓰러진 것을 본 사람이 있나?"
아이손이 하츠를 불러내며 말했다.
"우리 팀의 막내입니다. 이 녀석이 본 듯합니다."
엘빈은 하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런 전장에 아이를 데려온 거냐?"
"하, 저도 처음 보고 놀랐습니다만. 워낙 동안이라 나이가 25살이나 됩니다."
"25살? 네가 쓰러지는 오크를 봤다고?"
"아니 정확히는 아닙니다. 제가 바라봤을 때 오크는 이미 쓰러져 있었습니다."
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손을 바라봤다.
"이 아이가 네 부대의 제자냐?"
"다른 당주의 명령으로 오늘 지원 부대에 막 들어온 제자입니다. 아직 스승을 지목하지 않은 상황이고 태청과 매화는 마스터했습니다. 이번에 스승을 선택할 권리를 받았는데 오크와의 전쟁 때문에 조금 뒤로 미뤄졌나 봅니다. 엘빈 장로님을 스승으로 선택하려 했다고 하니 저희 지원 부대에 넣어 준 것 같습니다."
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떤 장로가 햇병아리인 너를 지원 부대에 가라고 하든?"
하츠는 품속을 뒤져 서신을 한 장을 내밀었다. 엘빈은 서신을 펼쳐 들고 읽었다.
"전출서? 거버트 당주면 테드버드 장로의 제자가 아니냐? 거버트 당주 밑에서 수련을 했나?"
"네, 거버트 당주에게 태청검법과 매화검법을 수련했습니다. 태청검법과 매화검법의 시험에 통과했고 엘빈 장로님을 스승으로 선택하려 했는데 오크 때문에 출타하신 관계로 제가 떼를 써서 지원 부대에 가겠다고 했더니 거버트 당주께서 전출서를 써 주셨습니다."
엘빈은 하츠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만약 거버트라면 널 위한 전출서 따위는 써주지 않았을 거다."
"네?"
"너 같은 꼬마 놈을 사지로 몰아넣을 만큼 악독한 당주는 마교에 없으니까. 너 누구냐?"
아이손 장주가 황급히 엘빈 장로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이가 매우 어려 보이고 덩치도 작아 소년처럼 보이나 하츠는 태청과 매화를 마스터했으니 당당한 마교인으로서 제 몫을 다하는···."
"쉿, 너는 가만 있어 봐. 난 테드버드 장로의 성격을 가장 잘 알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어 오랫동안 그와 함께 생활했으니까. 그는 진정한 기사도 정신을 가진 장로지.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지독한 성격을 가진 녀석들은 도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는 완벽한 기사들이지. 특히 테드버드의 제자들은 골수까지 기사들이다. 협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는 부류들이다. 살인 하나에도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이지. 그런 거버트 당주가 너를 위해 지원 부대로 진출서를 써주었다고?"
"···!"
"거버트라면 네 몰골을 보고 당장 호되게 야단을 쳤을 것이다. 전장은 아이들 놀이터가 아니라고 말이다. 네가 25살이건 35살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거버트라면 절대 너를 지원병력으로 보낼 자원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까."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름이 하츠라고 했나? 그래 하츠 너는 폭이 매우 좁은 이상한 검을 쓰는구나. 네 검을 나에게 한 번 보여 줄 수 있겠나? 설마 장로인 나의 말을 거역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츠는 엘빈을 무심히 바라보다 허리에 찬 검을 풀어 엘빈에게 넘겨 주었다.
건네받은 검은 무척 희귀하게 보였다. 엘빈이 가장 놀란 것은 무게감이었다. 가냘픈 소년이 들고 다니기에는 상당히 벅찬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신의 폭이 겨우 중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검이다.
"본래 검사란 검을 생명과도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지. 명검이라면 더더욱. 검사는 자신의 검이 타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한다. 너는 나에게 이 검을 넘길 만큼 자존감을 꺾고 있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내가 이 검을 못 뽑는다고 생각한 거냐? 그래서 넘겨 주었나? 마교의 장로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교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내공이란 것은 때때로는 넘지 못할 벽을 넘게 해 주지. 하츠 너만의 검을 타인이 뽑으면 정말 싫겠지? 마교 당주로서 말하는 거다. 검을 뽑을까? 그냥 둘려 줄까?"
"그냥 주세요."
테츠는 검을 던져 주었다. 하츠는 깃털보다 가볍게 검을 받아 들더니 한 바퀴 빙글 돌리며 허리에 찼다.
"···제길,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있으라 명령받았는데, 쩝···."
하츠가 허리에 찬 검을 뽑자 '창'이라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접힌 또 다른 검날이 세워지며 검은 마치 + 모양의 검날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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