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걸린 공자로 환생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부암(富馣)
작품등록일 :
2023.04.22 14:23
최근연재일 :
2023.08.12 22:00
연재수 :
123 회
조회수 :
40,310
추천수 :
455
글자수 :
668,135

작성
23.07.27 22:00
조회
202
추천
4
글자
13쪽

영웅 (4)

DUMMY

성벽 위, 어색한 정적만이 감돈다.

그때야 목적이 있어 대화가 이어졌다지만 막상 이렇게 만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는 내 가슴에 곡도를 찔러넣은 장본인. 이자벨라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니. 불렀으면 말이라도 하지.’


엘사를 순례자에게 인도한 뒤 나는 소리 없이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잠시만요.”


그녀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할 얘기가 있어요.”


무슨 얘길까?

사과일까?

용서를 바라는 걸까?

그 얘기라면 이미 끝난 거 아닌가?


“절 용병단에 넣어주셨다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어른 둘의 어색함이 답답했을까?

우리 둘 사이에 적막을 깬 건 다름 아닌 엘사였다.


“베인이 잘 해줘?”


“단장님은 워낙 바쁘셔서 얼굴 뵙기 힘들어요. 그래도 최대한 신경 써주고 계세요.”


“장하네.”


내가 엘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부모를 잃고 터전을 잃어가며 낯선 환경에 던져졌음에도 이 작은 아이는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제가 부른 이유가 이 아이 때문이에요.”


“감사 인사라면 됐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면 이 아이가 메피스토를 잡을 힌트일지도 모르거든요.”


내가 눈을 깜빡였다.

루나교의 생존자라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도 없는 이 아이가 어떻게 메피스토를 잡을 단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로마는 완벽주의자였어요. 특히 메피스토의 강림 건은 더욱 철두철미하게 준비했죠. 그래서 그날은 인원수를 철저히 제한했어요.”


“6,666명으로?”


“네. 그다음에 의식은 시작됐죠.”


“당신도 거기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했죠. 그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유독 엘사만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소설 속 묘사대로라면 그들은 마법진 안에 갇혀 메피스토의 재물로 전락한다. 헌데 여기 생존자가 있다. 그 뜻은 순례자도 엘사도 마법진 안에서 살아서 돌아왔다는 뜻.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저는 음식이었다고 생각해요.”


“음식?”


순례자의 가설은 이랬다.

평소 굶주림이 일상인 신도들이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그로마는 소환에 필요한 매개체를 음식에 집어넣었을 거고 엘사는 그 음식을 순례자랑 나눠 먹기 위해 아껴둬서 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뜻은 메피스토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다?”


“네. 제 생각은 그래요.”


내가 엘사를 바라봤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제이 파치노가 죽었듯

메피스토도 몸이 온전치 않을 수 있다.


“전 성검의 시험에서 유바르를 만났습니다.”


“유바르 님을요?”


평소 표정 변화가 없던 순례자다.

하지만 종교적인 얘기가 나오자 몸이 일순 나에게 쏠렸다.


“혹시. 루나 님도 만났습니까? 그분께선 저에 대해 뭐라 하시던가요? 제가 걷는 길이 옳은 길이라 하시던가요?”


그녀의 표정은 간절했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교리가 흔들리고 종교는 마왕을 소환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으니 그럴 수밖에.


“직접 만나진 못했습니다. 다만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내 말에 순례자의 몸이 더욱 가까워졌다.


“지금 루나교의 경전도, 메피스토가 강림을 위해 루나교를 이용하는 것도 루나 님은 몹시 언짢아하고 계십니다.”


내가 남의 종교에 대해, 남의 인생에 대해 옳고 그름을 정하는 건 옳지 않다. 그저 이 말을 전해줌으로써 자신의 길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도움을 주면 그만. 하지만


“어두운 길을 걷는 이에게 앞길을 비추는 달빛을 내려주는 것.”


조금은 주제넘어도 괜찮겠지.


“지금 그렇게 사는 거 아닙니까?”


내 말이 위로가 된 걸까?

순례자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영웅 님.”


엘사가 다시금 내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누구? 나?”


“네. 사람들이 다들 영웅이라고 부르던데요? 물론 저한텐 아니지만.”


요 당돌하고 새침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근데 영웅 님은 세죠? 세니까 영웅 아니에요?”


“글쎄. 적어도 너만 한 여동생 하나는 지킬 힘이 되지.”


“정말요?”


“난 어린이 앞에선 거짓말 안 해.”


엘사는 큰 결심을 한 듯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다름 아닌 단도.


“우리 언니 때린 사람 혼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단도를 건넸다.


“알겠어. 반드시 그렇게 해줄게.”


질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


다음 날을 알리는 태양이 밝았다.

왕국은 고요했다.

국민들도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싸움이 시작될 것이란 걸.


휘이이이잉.


1주일이 지났다.

국왕은 대답해줘야 했다.

그리고 보여줘야 했다.

그들의 의지를.


“폐하. 굳이 나오시지 않으셔도.”


국왕은 카일과 탈론을 대동한 채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정치 싸움이라는 부질없는 짓으로 시간을 낭비했네. 태양성 밖으로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그리고 뭐가 걱정인가? 이리 듬직한 자들이 나를 호위하고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메피스토가 건조한 눈빛으로 성벽에 다가왔다. 국왕은 그의 등장에 일순 태양이 삼켜지는 착각을 받았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목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먹을 꽉 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이 왕국의 명운을 짊어진 지도자다. 지도자 대 지도자의 만남에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게 선조의 가르침이었으니까.


“......”


메피스토가 해자 너머의 평야를 바라봤다.

그곳에 탐욕쥐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어떤 놈은 꼬리가 잘리고

어떤 놈은 머리가 짓뭉개졌으며

어떤 놈은 피부색이 변해 죽어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들 모두 이제는 파리떼의 먹이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이게 너의 대답인가?”


“그렇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


“합리적인 선택이지.”


“멸망이 합리적일 수 있나?”


“개처럼 연명하느니 존엄성을 갖고 맞서 싸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국왕이 눈에 힘을 주며 메피스토를 바라봤다. 너에게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듯.


“우리 승리가 있을 것이다.”


메피스토는 국왕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시선을 카일에게로 옮겼다. 카일도 팔짱을 낀 채 메피스토를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겠다.”


“그래. 조만간 만나지.”


짧은 대화를 끝으로 메피스토가 돌아갔다.


“하아.”


국왕은 메피스토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피하지도 식은땀을 흘리지도 주저앉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가 사라지나 참아왔던 숨을 뱉은 게 전부.


“훌륭했습니다.”


탈론이 몸을 비틀거리는 국왕을 부축했다.


“아까 한 말 취소할 수 있나? 나한텐 정치 싸움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무르고 싶습니까?”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네.”


국왕과 탈론은 서로 격식 없이 대화했다.

이를 보며 카일은 생각했다.


그는 정복자의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신성 왕국 헬리온이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탈 권위 의식과 사고의 유연함이 아니었을까 하고.


“결국 마무리는 자네한테 맡겨야 할 거 같군.”


국왕이 카일을 바라봤다.


“저한테 어려운 일만 시키십니다. 폐하.”


“명령도 하나 내리지. 반드시 이기게.”


“반드시 그러하겠습니다.”


***


“개전의 나팔을 울려라!”


뿌우우우우!

뿌우우우우!

뿌우우우우!


개전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엘사는 순례자의 안대를 질끈 묶어주고 있었다.


“언니 괜찮겠어?”


엘사는 걱정했다.

그녀는 지금 검은 사제복에 검은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

검은 사제복은 루나교의 상징.

이 복장으로 임시천막을 나가는 순간, 그녀는 성벽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돌팔매질로 맞아 죽을 수 있었다.


“괜찮아.”


두려워도 가야 했다.

엘사가 어깨를 펴고 떳떳하게 루나교를 믿는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루나교의 이미지를 바꿔야 했다. 그 첫 단추가 이 전투다.


촤악.


천막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하지만


“응?”


터전을 잃은 난민들이, 술에 취한 주정뱅이가, 전쟁이 두려워 뒷골목에 숨은 비겁한 왈패들이 순례자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단이다!”


“이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순례자의 복장은 그들에게 물어뜯기기 딱 좋은 명분이었다.


“이 더러운 년!”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거라고!”


“죽어! 죽어!”


“악마의 자식이 어디 왕도를 걷고 있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얼마 안 가 순례자에게 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 나중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퍽.


그중 하나가 순례자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휘청.


순례자가 비틀댔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걸었다.


“죽어!”


“사악한 년 죽어!”


공포와 통제로 억눌렸던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돌팔매질에도 순례자가 묵묵히 걸어가자 술에 취한 주정뱅이 하나가 병을 깨트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있어! 알았지?’


엘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순례자를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나서는 게 순례자에게 방해가 될 뿐이란 걸.


‘달의 신 루나 님! 우리 언니를 구해주세요!’


순례자가 걷는 길은 너무 힘겨워 보였다.


쨍그랑.


그때 밖에서 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사가 너무 천막을 열었다.


“안 돼!!!”


주정뱅이가 깨진 술병을 든 채 순례자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푹.


술병이 피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피륙음이 들렸다.

잠시 후


똑. 똑. 똑.


바닥으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당신이 왜···.”


“참 미련하십니다.”


순례자의 앞, 카일이 손으로 주정뱅이의 술병을 막은 채 서 있었다.


쨍그랑.


카일이 술병을 뺏어 바닥으로 던졌다.


“뭐 좀 물어봅시다.”


“어···. 네···.”


주정뱅이는 정신이 확 돌아왔다.

지금 자신은 영웅의 손에 술병을 찔러 넣었다.

이는 자칫하면 모든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쏟아질 수 있는 위기.


“이 여인이 당신에게 먼저 공격했습니까?”


“아니요.”


“이 여인에게 가족을 잃었습니까?”


“아니···.”


주정뱅이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근데 왜 그녀를 공격합니까?”


“이교도니까!”


하지만 주정뱅이에게도 믿을 구석 하나쯤은 있었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여인입니다. 여기서 술이나 퍼마시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주정뱅이를 다그친 카일이 돌팔매질하던 사람들을 둘러봤다.


“나 카일 자르온이 이 자리에서 외칩니다. 나에게 있어 종교의 다름은 이단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뱉은 말이 신성모독이라 생각한다면 나에게도 돌을 던지십시오.”


사람들은 망설였다.

누가 감히 왕국 최고의 영웅 카일 자르온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하나, 둘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았다.


“갑시다.”


“이렇게 또 빚을 졌네요.”


“빚은 곡도로 갚으시죠.”


엘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순례자는 자신에게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 영웅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줬으면 했다.

그리고 지금 카일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줬다.

자기 영웅은 순례자지만 순례자의 영웅은 카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루나 님.”


성벽 중앙, 그곳엔 대륙에 이름난 걸물들이 모여있었다. 카일을 필두로 다리아, 포이즌 슬레이어 이자벨라. 엘프 로드 탈리아와 그녀의 제자 조이, 릴리. 이제는 최고의 용병단으로 우뚝 선 붉은뱀 용병단 단장 베인과 왕국 근위대장 탈론까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다리아가 순례자를 데려온 카일을 질책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유저에요. 돌팔매질로 죽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공자님! 제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요.”


“나 소드 마스터야. 돌 맞고 안 죽어.”


“그래도요!”


“모두 긴장해. 시작한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탈리아의 한 마디로 순식간에 변했다.


쿵. 쿵. 쿵. 쿵.


오크, 구울, 스켈레톤, 오우거, 트롤, 시체 골렘에 와이번까지. 메피스토는 글리셰 대륙에 끌고 올 수 있는 모든 마물을 이곳에 집결시켰다.


씨익.


카일이 이 광경을 보고 웃었다.


“공자님?”


“이자벨라. 저 평야를 꽉 채운 마물들을 봐. 저게 뭘 뜻하는지 알아?”


“위기다?”


“아니. 이게 진짜 마지막이다.”


내 말뜻을 이해한 이자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척.


마물들의 진군이 멈췄다.

마군과 연합군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마물들이 일으킨 모래 먼지가 성벽으로 날아왔다.

제일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이자벨라였다.


“모두 물러나요!”


선공은 라플레아스의 맹독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불치병 걸린 공자로 환생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3 에필로그 +1 23.08.12 231 5 14쪽
122 돌아가자 23.08.11 215 4 12쪽
121 절공(切空) 23.08.10 210 4 12쪽
120 각자의 역할 (6) 23.08.09 188 4 12쪽
119 각자의 역할 (5) 23.08.08 184 4 11쪽
118 각자의 역할 (4) 23.08.07 191 4 12쪽
117 각자의 역할 (3) 23.08.06 194 5 13쪽
116 각자의 역할 (2) 23.08.05 194 5 13쪽
115 각자의 역할 (1) 23.08.04 193 4 12쪽
114 돌격 23.08.03 197 4 12쪽
113 약속 23.08.02 202 5 13쪽
112 스승과 제자 (5) 23.08.01 204 4 12쪽
111 스승과 제자 (4) 23.07.31 203 4 12쪽
110 스승과 제자 (3) 23.07.30 197 4 12쪽
109 스승과 제자 (2) 23.07.29 192 4 12쪽
108 스승과 제자 (1) 23.07.28 202 4 13쪽
» 영웅 (4) 23.07.27 203 4 13쪽
106 영웅 (3) 23.07.26 199 4 12쪽
105 영웅 (2) 23.07.25 207 4 13쪽
104 영웅 (1) 23.07.24 211 4 12쪽
103 시험 (4) 23.07.23 202 4 13쪽
102 시험 (3) 23.07.22 198 4 12쪽
101 시험 (2) 23.07.21 204 4 12쪽
100 시험 (1) 23.07.20 214 4 13쪽
99 너라는 변수가 (4) 23.07.19 222 3 13쪽
98 너라는 변수가 (3) 23.07.18 216 4 12쪽
97 너라는 변수가 (2) 23.07.17 218 3 12쪽
96 너라는 변수가 (1) 23.07.16 223 3 12쪽
95 모래성 23.07.15 234 3 13쪽
94 내 집 마련 (4) 23.07.14 231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