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걸린 공자로 환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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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부암(富馣)
작품등록일 :
2023.04.22 14:23
최근연재일 :
2023.08.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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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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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돌아가자

DUMMY

순례자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진 않는 것엔 익숙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감에, 피부에, 후각에, 청각까지. 그 어떤 감각에도 걸리는 게 없었다. 한 발짝이라도 뻗는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한 공포.


“너 바보야?”


그때였다.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례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말 안 들려?”


“들려요.”


“근데 왜 대답을 안 해.”


“무슨 대답이요?”


“너 바보냐고.”


“아닙니다.”


루나교의 경전엔 이렇게 적혀있다.


‘너희가 죽음의 문턱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그분께서 마중 나와 너희를 인도하리라.’


순례자는 생각했다.


‘죄 많은 인생. 그분께서 나를 마중 나오는 건 사치.’


손에 너무나 많은 피를 묻혔다.

카일을 만나 회개하고 엘사의 인생에 빛을 밝혀주며 살려 했지만 지은 죄가 너무 컸다. 무엇보다 달의 신 루나라고 하기엔 목소리가 엘사 또래처럼 어렸다.


“누구십니까?”


“누굴 거 같은데?”


“제가 알 리 없죠.”


“나는 달의 신 루나다.”


“......”


순례자는 믿지 않았다.

애초에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장난을 칠만큼 달의 신 루나는 괴짜가 아니니까. 이런 반응에 속이 터지는 건 도리어 루나였다.


“루나교 교리 몰라? 죽으면 누가 인도해줘?”


“루나 님이 인도해주죠.”


“그래. 그럼 내가 누구야?”


“......”


순례자는 이번에도 답이 없었다.


“아!!!! 짜증나!!!!!!”


결국 루나가 바닥에 드러누워 울분을 표출했다. 4살 또래 아이들이나 할법한 땡깡.


‘엘사?’


순례자는 이 와중에도 엘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엘사는 야무진 아이다. 악과 깡이 있고 용병단에서도 차별받지 않고 잘 적응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이 난 이유는 왜일까?


“이러면 믿을래?”


순례자의 귀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왔고 이내 순례자가 착용하고 있던 안대를 날려버렸다.


“안 돼!”


순례자가 다급히 눈을 가렸다.


“눈 떠봐.”


“......”


“괜찮으니까 눈 떠보라고.”


순례자가 속는 셈 치고 눈을 떴다.


“어때?”


그녀의 눈동자는 달을 닮은 은빛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은빛 눈동자 안으로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가 담겼다.


“루나 님?”


“그래. 이제 믿을 수 있겠어?”


순례자가 루나를 바라봤다.

키는 엘사만 했고 얼굴도 앳돼 보였다.

눈동자는 달을 머금은 듯 푸르고

머리칼은 밤하늘처럼 어두운 흑발.


“그래 내가 달의 신 루나다. 뭐 하는 짓이냐!!”


순례자는 자기도 모르게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죄송해요. 엘사가 생각나서.”


“그것보다 눈은 어때? 잘 보여?”


“네. 잘 보여요. 아름답네요.”


순례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이유가 밤하늘의 떠다니는 은하수를 담아서인지 오랜만에 바라보는 풍경에 벅차서인진 그녀만 알 뿐이었다.


“좋아?”


“너무 좋네요.”


“원한다면 그 상태로 너를 살려줄 수도 있다.”


“왜요?”


루나의 말에도 순례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봤다. 루나 님을 위해 살아온 자신의 마음은 당당했지만, 자기 손엔 타인의 피가 흠뻑 묻어 있었다. 그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 개.”


루나가 손가락 두 개를 활짝 펼쳤다.


“첫째 유바르가 개입했으니 나도 개입한다.”


순례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루나는 그냥 넘어가라 말하며 검지를 접으려다 중지를 황급히 접었다.


“이게 더 중요한 이유다. 네가 죽으면 더 이상 루나교를 알릴 신자가 없어.”


“아직 엘사가 남아있어요.”


“너무 어리다.”


“그 외에도 아직 몸을 숨기고 있는 신자들이 많을 겁니다.”


“너처럼 당당하게 밝힌 신도는 없었지. 만약 몸을 숨기고 있는 신자들이 있다면 그들도 네가 모아라.”


“알겠습니다.”


순례자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

루나 님의 명령이다.

당연히 따라야 했고 다음으로 다시 엘사를 만날 수 있게 됐다.


“바로 부탁드릴게요. 지금 전투 중이라.”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싸움은 끝났다. 카일의 승리로.”


“그래요. 다행이네요.”


순례자가 안도했다.


“지금 루나교의 위상은 바닥. 부디 추락해버린 그 명성을 회복해주길 바란다.”


“노력해볼게요.”


“그간 나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은 점. 끝까지 순례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한 점. 이 점을 높이 사 너의 눈을 회복시켜주마.”


“......”


순례자는 기뻐하지 않았다.

도리어 생각에 잠긴 모습.


“혹 흉터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말끔하게 지워줄 테니.”


“아니요. 그거 말고.”


“혹 따로 원하는 축복이 있느냐?”


“눈은 됐으니까 아까 날아간 안대 하나만 다시 만들어 주실래요?”


***


“헉. 헉. 헉. 헉.”


이자벨라의 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으로 들어갔다.

붉어지는 시야.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음 한 방에 끝난다.’


“카...일... 카... 일....”


그로마의 몸도 처참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그는 언데드.

이자벨라와 달리 고통을 느끼지 못했고

그렇기에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그때였다.


우웅.


거대한 파동 하나가 이자벨라의 몸을 통과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그그그그그.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공작성의 망루와 성벽이 사선으로 잘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카일... 카일!!!!”


그로마가 절공검에 반응했다.

그는 눈앞에 이자벨라를 무시한 채 앙상해진 날개를 펼치고 공작성으로 날아갔다. 이게 패착의 원인이 됐다.


‘지금이다!’


이자벨라의 왼손에 포이즌의 독이, 오른손에 정령의 힘이 깃들었다. 이자벨라가 의도적으로 길을 터줬다. 그로마의 시선은 성벽에 고정돼 있었기 때문에 이자벨라의 마지막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이자벨라가 날아가는 그로마의 날개를 잡아챘다. 포이즌의 독으로 등을 녹인 후, 가슴 중앙에 정령의 힘을 응축해 폭발시켰다.


쾅!!!!!


“크악!”


그로마의 육신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카일!’


이자벨라는 쉬지 않았다.

그로마를 처치한 직후, 곧바로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


그리고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카일을 발견했다.


***


‘내가 왜 그 남자를 알아버려서는.’


운명을 바꾼 만남일까?

운명을 이끈 만남일까?

그것까진 모르지만, 베인은 확신했다.

적어도 카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마물들이 득실한 지옥도에서 바닥을 구르진 않았을 거라고.


‘내 선택이 옳았던 걸까?’


‘이 전투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지원은? 정말 저들은 지켜보고만 있는 건가?’


육체와 정신은 하나라고 한다.

리자나르와의 전투로 상처를 입은 베인이다. 육체의 피로가 야금야금 정신을 갉아먹었고 결국 지금에 와서는 나약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게 했다.


퍽!


“커헉.”


결국 나약함이 빈틈을 만들었다.

베인은 뒤에서 달려오는 오크의 움직임을 놓쳤고 결국 등에 공격을 허용하고 만 것.


털썩.


베인이 무기를 놓치고 쓰러졌다.


“우오오오!”


마물은 본능적인 존재.

베인이 쓰러지자 녀석들이 귀신처럼 베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경쟁했고 결국 베인을 차지한 건 오우거였다.


쩍!


오우거가 입을 벌렸다.

베인이 주먹으로 녀석의 손을 내려쳤다.

하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

자신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단도를 던지는 베인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너무 약했고 손에는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려줘!’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할 말.

칼밥을 먹는 순간 다짐했다.

절대 목숨을 구걸하지 말자.

그때였다.


서걱.


오우거의 대가리가 혀 위로 잘려 나갔다. 녀석의 몸이 기울어졌고 베인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꺅!!!”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베인이 여성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베인을 안아 드는 우람한 손.


“괜찮나?”


고개를 들자 자신을 감싸 안은 탈론의 모습이 보였다.


쿵. 쿵. 쿵. 쿵.


베인의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고맙다.”


“싸울 수 있지?”


“물론.”


“등은 맡기겠다.”


베인과 탈론이 등을 맞댔다.

베인은 몸의 이상함을 느꼈다.

심장이 진정되지 않고

몸과 얼굴이 달아올랐다.


“긴장해라. 온다.”


설렘도 잠시.

마물들은 여전히 배고팠고

궁지에 몰아넣은 먹이들은 여전히 팔딱거렸다. 그렇게 고립된 탈론과 베인을 향해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우뚝.


게걸스럽게 침을 흘리고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던 마물들이 멈췄다.


‘설마?’


베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방패로 궁수들을 지키던 병사들도 피를 흘리며 마법을 캐스팅하던 마법사들도 말에 떨어져 바닥을 구르던 기사들도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카일이 해냈다!’


“와아아아아!!!!”


병사 하나가 소리 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이윽고 함성은 들불 위에 퍼진 불꽃처럼 빠르게 번져갔다. 그리고 전장의 중앙, 다른 의미로 가슴에 불이 붙은 베인이 탈론을 바라봤다.


“저기.”


“수고했다. 베인 스네일.”


탈론이 베인에게 손을 뻗었다.

베인이 탈론의 우람한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결혼했나?”


***


성벽이 갈라지는 순간,

다리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도달했구나.’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절공이 펼쳐지고 얼마 뒤


우뚝.


썰물처럼 밀려오던 마물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카일!!!”


다리아가 순식간에 성으로 도약했다.


“이자벨라! 너도 무사했구나. 카일 너는···.”


다리아가 시선을 옮겼다.

이자벨라에게서 카일로.

그리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거대한 피 웅덩이.

그리고 그곳에 몸을 누인 카일.


“이게 무슨 상황이야?”


다리아가 이자벨라에게 물었다.

이자벨라라고 어찌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두 여인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몸을 누인 카일에게 무릎베개를 해준 순례자. 그녀의 손이 카일의 복부를 향했다.


“일단 지켜보죠.”


순례자의 손이 빛났다.

사제가 내뿜는 치유의 빛과는 다른 느낌. 사제의 회복 마법이 태양처럼 강렬한 빛이라면 지금 순례자의 손에서 나오는 빛은 별처럼 은은했다.


“이걸로 조금은 속죄가 됐길 바랍니다.”


순례자는 급하게 달려온 두 여인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안대? 안대는 왜? 이제 필요 없잖아.”


“제 눈을 회복해주는 대신 카일 자르온을 회복시켜주세요.”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야 하지?”


“빚을 진 게 있거든요.”


“후회하지 않나?”


루나가 순례자의 눈을 바라봤다.

호수에 비친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순례자의 은빛 눈빛. 그 눈빛에는 일말의 후회나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순례자의 손끝에서 빛나던 별빛이 사라지고 카일이 눈을 떴다.


“어라?”


카일이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안대를 쓴 순례자의 얼굴.


“메피스토는?”


카일이 주변을 살폈다.

메피스토도

인파니아도

성 어디에도 녀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고의 풍경이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이자벨라와 다리아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벨라. 조금 도와줄래?”


“물론이죠.”


이자벨라는 울고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 울었고

동료들이 살아있어 울었고

카일이 살아있어 울었다.


“지랄도. 지랄도.”


이자벨라와 다리아가 카일을 부축했다. 그리고 천천히 성벽으로 그를 이끌었다. 카일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외쳤다.


“탈리아!!!!”


“내가 네 친구니? 그렇게 부르게?”


“우노아!!!”


“살아있어요!”


“토테미넴!!!!”


“저도요!!!”


“릴리!”


“왜 나는 이렇게 늦게 불러!!!!”


“해머!!”


“여기 있다!!!”


전쟁은 참혹했다.

카일의 부름에 대답하는 이보다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으니까. 카일이 모두의 이름을 외친 뒤,


“마지막으로 이자벨라.”


“네.”


카일이 그녀를 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돌아가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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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에필로그 +1 23.08.12 231 5 14쪽
» 돌아가자 23.08.11 215 4 12쪽
121 절공(切空) 23.08.10 210 4 12쪽
120 각자의 역할 (6) 23.08.09 188 4 12쪽
119 각자의 역할 (5) 23.08.08 184 4 11쪽
118 각자의 역할 (4) 23.08.07 191 4 12쪽
117 각자의 역할 (3) 23.08.06 194 5 13쪽
116 각자의 역할 (2) 23.08.05 194 5 13쪽
115 각자의 역할 (1) 23.08.04 193 4 12쪽
114 돌격 23.08.03 197 4 12쪽
113 약속 23.08.02 202 5 13쪽
112 스승과 제자 (5) 23.08.01 204 4 12쪽
111 스승과 제자 (4) 23.07.31 203 4 12쪽
110 스승과 제자 (3) 23.07.30 197 4 12쪽
109 스승과 제자 (2) 23.07.29 192 4 12쪽
108 스승과 제자 (1) 23.07.28 202 4 13쪽
107 영웅 (4) 23.07.27 202 4 13쪽
106 영웅 (3) 23.07.26 199 4 12쪽
105 영웅 (2) 23.07.25 207 4 13쪽
104 영웅 (1) 23.07.24 211 4 12쪽
103 시험 (4) 23.07.23 202 4 13쪽
102 시험 (3) 23.07.22 198 4 12쪽
101 시험 (2) 23.07.21 204 4 12쪽
100 시험 (1) 23.07.20 214 4 13쪽
99 너라는 변수가 (4) 23.07.19 222 3 13쪽
98 너라는 변수가 (3) 23.07.18 216 4 12쪽
97 너라는 변수가 (2) 23.07.17 218 3 12쪽
96 너라는 변수가 (1) 23.07.16 223 3 12쪽
95 모래성 23.07.15 234 3 13쪽
94 내 집 마련 (4) 23.07.14 231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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